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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남한산성
★★★★★
(19.01.25~02.05)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는 흔히 잘 알려져 있는 1636년 병자년 겨울의 이야기이다.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 청의 제2대 칸 홍타이지는 앞으로 조선이 명 대신 청나라를 사대할 것과,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 청에 군신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칸의 국서에 얼어붙은 조정은, 오랑캐를 어찌 예로서 대할 수 있겠느냐며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칸의 요구를 무시한 대가로 강화도로 가는 길조차 막혀버린 채 쫓기듯 숨어든 남한산성에서 버텨낸, 조선의 47일간의 처절한 기록이다.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주시옵소서.’


소설의 중심이 되는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겠다 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은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 둘은 성안의 말먹이 풀 하나를 말의 먹이로 쓸 것인지 군병의 추위를 막는 데에 쓸 것인지조차도 뜻이 갈린다. 역사에 다신 없을 충신들의 언쟁을 잠자코 듣던 인조는 옆으로 돌아앉아 벽을 향해 한 마디를 던질 뿐이다. -마루가 차니 경들이 춥겠구나.


이렇듯 조선이 버텨낸 성 안에서의 47일은 창과 방패의 싸움이 아닌, 말(言)들의 싸움이었다. 대의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불사하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으나 치욕은 견딜 수 있다는 이조판서 최명길. 두 충신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는 힘없는 군주 인조와 영의정 김류, 수어사 이시백 등 패망해가는 나라를 지키고자 애쓴 이들 사이를 오고 간 피 튀기는 말들의 전쟁이었다. 그들의 생각과 방식은 각자 달랐을지언정 뜻은 하나로 같았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그저, 무너져가는 조선이 조금 더 버텨주는 것과 굶주린 백성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이 책이 병자년 조선의 임금과 주요 대신들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곡식 몇 알을 얻으려 청병들에게 얼음 위로 길을 내어주는, 그래서 결국 김상헌의 환도에 맞아 죽게 되는 늙은 사공, 또 우연찮게 성 안으로 들어와 상헌의 손에 맡겨지는 죽은 사공의 어린 딸, 정찰을 위해 척후로 내보낸 군사들이 돌아오지 않아 중곤 스무 대를 맞는 수어사, 먹을 것을 풍족히 주지 않는 영의정을 대놓고 비꼬는 향병들, 성에 임금이 들어오자 서둘러 처와 아이들을 성밖으로 내보내고 대장간에 홀로 남은 대장장이, 밤새 비에 맞아 젖어서 얼고 가마니로 겨우 추위를 피하는 성첩의 군병들, 깃발을 팽개치고 달아나는 기휘들과 달아나는 자들을 쏘지 않는 사대들, 달아나는 자들을 잡으러 쫓아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군사들, 그리고 그 매일매일을 기록하는 울지 않는 사관들의 쓰라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들의 복잡한 흐름 사이사이로 조선은, 제물을 얻어 백제 온조왕 사당에 제사를 드리고, 설날을 맞아 명이 있는 북방 쪽으로 절을 올리고, 신년엔 동방의 예법을 지킨다며 소를 잡아 칸에게 세찬을 보낸다. 이처럼 조선이 붓 하나로 이어온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키려 고리타분한 노력을 하기도 하고, 성에서 가까운 지역에 밀서를 보내 남은 군병들을 긁어모아 결전을 도모하자고 긴박히 계획을 짜기도 하는 동안, 청의 용골대와 정명수는, 밖에서 보기엔 편안해 보이는 남한산성을 보며 노후에 저런 성이나 하나 차지해서 물러앉고 싶다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할 뿐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릴 때보다 이 용골대와 정명수가 남한산성을 멀리서 바라보며 시시덕거리는 장면이 읽는 도중 더 치욕스러웠다.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병자년 겨울의 조선인들을 희롱하는 여유로운 청나라 군신들의 대화를 엿보는 것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읽으면서 실제로 울컥한 대목들이 꽤 많았다. 하루아침 아버지를 잃은 어린아이에게 조선의 임금이 되려 위로를 받는 모습, 성첩의 군병들이 밤새 내리는 비에 얼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인조가 내행전 마당에 이마를 찧으며 울부짖는 장면, 출성 명령이 떨어진 후 최명길과 당하들의 반응, 자살기도를 하는 김상헌, 청색 옷을 입고 칸 앞에 무릎 꿇은 임금과 속절없이 끌려가는 세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비통했던 대목은 교리 윤집과 부교리 오달제가 척화신으로 묶여서 청진에 가기를 자청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각각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이었으나 적과의 화친을 도모하던 최명길을 통렬한 언사로 규탄한 후 파직되었다. 자신들을 파직시킨 조정에 대한 원망이 조금이라도 있었을 법 한데, 그들은 스스로 임금을 따라 산성 안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죽음의 심양길을 자원했다.


'신들이 극언으로 화친을 배척하여 성총을 흐리고 나라를 그르쳤으니, 신들을 보내어 적의 요구에 응하시고 사직과 강토를 보전하소서. 미거한 신들이 죽음의 자리를 찾았으니, 그 또한 삶의 자리일 것이옵니다.'


윤집과 오달제의 차자이다. 처자식을 성 밖에 두고 외로이 항전했던 젊은 당하관들이 올린 차자에 임금은 서안에 쓰러져 오열한다. 윤집은 피란간 처와 세 아들의 생사를 몰랐고 오달제는 성 밖에 노모와 임신한 처가 있었다. 두 충신은 함께 심양성 서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어찌 되었건 전쟁은 끝났다. 송파강은 녹았고, 봄은 왔고, 패망한 나라의 성벽에도 다시 민들레는 피었다. 청으로 구 년간 끌려갔던 소현세자는 조선에 돌아온지 두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청에서 첨단과학과 신사상을 공부했던 그는 여전히 멸망해버린 명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던 제 아버지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헌은 자살에 실패하고, 일흔의 나이에 최명길과 감옥에서 만나 몇 편의 시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이백오십 년을, 이백오십 번의 봄을 맞으면서 조선은 무너진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 후에도 수백년을 조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과, 병자호란보다 더한 전쟁들을 겪으며 버텨냈다. 조선은 지금도 버티고 있다. 오늘도 이 작은 땅 어딘가에서 민들레는 피어난다. 그 민들레는 어쩌면, 사백 년 전 이 땅을 스쳐갔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넋일지도 모른다.





밑은 1월에 읽은 다른 책들 짧은 후기입니당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 ★
(1.2~1.22)

어쨌든 하루키 딱지를 붙이고 나온 작품인지라 기대가 컸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결말이 별로에요. 그래서 시로에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정말로 강간을 당한 것이라면 그 죄를 왜 무고한 다자키 쓰쿠루에게 뒤집어 씌운 것인지, 하이다는 왜 갑자기 떠나버린 것인지, 쓰쿠루와 사라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열린 결말의 극저에 위치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루키가 내용의 전개나 등장인물, 이야기의 분량, 결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의식의 흐름에 기대어 반 년간 써내려간 소설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이 어렵지도 않은 책을 어째서 20일 가량이나 붙들고 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 ★ ★
(1.16~1.23)

부산 여행 도중, 새벽에 잠은 안 오고 가져온 책은 없고 해서 급하게 이북으로 구매한 책입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이북 추천 도서 중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읽게된 책인데 생각보다 정말 재밌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의 칼럼들을 엮은 책으로,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블랙코미디 소스들이 매력적입니다. 배꼽을 잡고 웃은 대목들도 꽤나 많았을 정도에요. 한번에 쭉 정독하기 보다는 다른 책과 같이 읽으면서 중간중간 기분전환 겸으로 꺼내읽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 ★
(1.23~1.25)

김영하의 저서들 중 이 작품이 지뢰라는 사람들도 있던데 전 나쁘지 않게 읽었습니다. 이 책이 등단 후 그의 첫 장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괜찮았던 것 같아요. 자살도우미가 주인공인 독특한 소재의, 130쪽 정도의 매우 짧은 작품이고 쉽게 읽힙니다. 죽음을 주재하는 자의 시선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들의 내면을 세련되게 풀어낸 책이에요.




올해는 책 좀 많이 읽어야지 했는데 1월 꼴랑 네권...
지금은 칼의 노래 읽고 있는데 후딱 읽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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