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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본문 인용은 모두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역, 『윤리적 폭력 비판』, 인간사랑, 2013에 따름.)
0. 서론
최근 한국 문단에서 주디스 버틀러만큼 자주 호명되는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소개든 혹은 <윤리적 폭력 비판>이라는 작품에 대한 소개든, 개략적인 내용 설명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일단 서론 격인 차원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윤리적 폭력 비판>은 이전 작품인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이루어진 논의를 연장시키거나, 혹은 첨예화하기 위해 쓰인 글로 (적어도 내게는) 다가온다. <권력>에서는 주체가 폭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제작하는 과정이, 그리고 비난의 내재적 전도인 '양심의 가책'이라는 테마가 다루어지는데, 이는 푸코적인 주체의 형성과 프로이트주의의 전도된 처벌 공포를 교차하며 사유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즉 이전 저작의 제목 중 '권력'은 권력-주체에 대한 푸코주의적인 접근을, '정신적'은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을 의미한다고 간단히 소개 가능하다. 혹은 주체의 형성에 대한 푸코의 담론(<성의 역사>)을 프로이트주의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시도(물론 그 반대에 대해서도)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버틀러가 이러한 시도를 했던 이유는 주체가 권력의 효과일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권력이 주체에 의해 변형되거나 주체 자신이 권력을 전유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권력의 주체화-예속화(버틀러에게 이 둘은 항상 동시에 이루어진다)가 갖는 효과는 주체로 하여금 예속화를 저항의 자원으로 전용하게 하는 효과도 가지며, <권력>은 우울증의 자아라는 모델로 이런 전용의 범례를 설명한다. 즉 프로이트의 우울증은 애도 불가능한 이상으로서의 타자를 자기 자신에게 '흡수'하는 증세인데, 정신분석학적 논의의 악명 높음으로부터 요점만을 건져낼 수 있다면(솔직히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상실된 타자의 흔적에서 자기자신을 형성하기, 자신에게 선차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담론과 주체로서의 자신 사이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되돌려짐의 운동에서 주체의 형성을 파악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늘 그렇듯 주체화-예속화에 대한 버틀러의 설명은 상당히 난해하며 논쟁적이라, 정신분석학에 과문한 나로서는 이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라 장담할 수 없다.
어쨌든 <비판>은 <권력>의 논의가 놓치고 있거나 혹은 충분히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지점, 즉 이러한 자기 형성이 일종의 '윤리적 폭력'일 수 있다는 의문에 대해 답하려는 글처럼 읽힌다. 확실히 <권력>에서 버틀러는 주체화-예속화에 대한 니체의 관점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혹은 그렇게 읽힐 만한 지점이 있으며), 주체는 오로지 폭력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고 그러므로 폭력의 효과라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판>에서 그는 자신의 관점이 니체의 것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며, 주체가 폭력에 의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기꺼이 설명하려는 말걸기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 또한 그러한 설명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려는 한계 인식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가능한지를, 즉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동기에 의해서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 탐구에서 새롭게 인용되는 두 사상가가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에마뉘엘 레비나스다. (헤겔, 장 라플랑슈, 프로이트 등은 당연하게도 언급된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판>은 버틀러의 평소 글쓰기와 거의 다르지 않다. 여러 사상가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의 담론을 분석하며, 비판하고 교차시키고 수용한 채 나아가는 서사적 여정이다. 이런 스타일에 대해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기본적으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되 중요한 지점에서는 개인적인 코멘트를 약간씩 덧붙이려 한다. 대학원 수준의 전공자가 아닌 만큼 코멘트는 하나의 아마추어적인 관점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1.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
<비판>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도덕철학의 질문, 즉 행위, 따라서 행동하기와 연관된 질문을 동시대의 사회적 틀 안에서 제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면서 나의 논의를 시작하고 싶다(p.11).' 달리 말해 이것은 도덕철학적 질문이 언제나 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서 출현하거나, 혹은 질문 그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선차적인 외부에 내속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버틀러는 우선 아도르노를 읽으며(<Problems of Moral Philosophy(Probleme der Moralphilosophie, 버틀러는 Rodney Livingstone이 번역한 2001년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 판을 참조. 이하 PMP)>) 도덕적 질문이 출현하는 것은 항상 집단적 관습의 에토스가 파괴되는 조건 아래서임을 시사한다. 관습은 그것이 순전한 폭력으로 쇠퇴한 이후에도 우리를 강제하려 하기에 도덕과 갈등한다(PMP, 17). 아도르노는 관습의 쇠퇴를 애도하는 복고주의를 거부하며 관습은 실제로 억압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 지점에서 버틀러는 아도르노가 탈시간적 개인의 품성(Ethos) 문제로 환원되는 윤리(Ethik) 대신 - 더 시공간적이고 구체적인 함의를 갖는 - 도덕(Mor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보편적인 것으로의 윤리는 반드시 폭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특수자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존중을 결여할 때는 폭력이 된다. 보편성이 더는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함에도 계속 특수성을 지배하고 있을 때 개별자는 그 억압적인 불일치를 극복해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개별자가 관습으로부터 도덕을 전유해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아도르노는 '흡사 키르케고르 같은(p.17)'데, 그러나 그는 동시에 '나'가 순전히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러니까 행위하는 '나'는 언제나 도덕이나 윤리적 규범들에 이미 연루되어 있음(PMP, 28)을 언급한다. 버틀러가 <비판>의 서두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논의도 이와 같은 결에 놓여 있다. 즉 주체로서의 '나(I)'는 순전히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간성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자기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p.19).' 하지만 버틀러는 아도르노가 윤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지점, 요컨대 개인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없는 윤리는 '나쁜 양심(bad conscience of conscience, 원문의 용어는 참조 불가)'이라는 언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나'자체의 생존가능성, 다시 말해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이미 규범이 결정하고 있다면, '살아있는 방법으로 전유할 수 없는 윤리는 나쁜 양심'이라는 언술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은 아닐까? 그런 나쁜 양심을 나쁘다는 이유로 단순히 포기하거나 반대해버린다는 것은 가능할까?
여기서 버틀러는 잠시 아도르노에 대한 논의를 중단한다. 그 논의는 주체와 도덕의 관계가 아닌 주체를 생산하는 도덕의 힘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겠지만, 그리고 주체가 반성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도덕과의 '살아있는' 관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단 그는 반성적 주체의 형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 니체를 읽고자 한다(<On the Genealogy of Morals(Zur Genealogie der Moral, Walter Kaufmann이 번역한 1969년 랜덤하우스 판에 따라 페이지 표기. 이하 GM)>). 니체에게 있어서 자신에 대한 설명은 상해를 입는 것에서 시작되며, 상해-처벌의 체계가 우리를 설명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처벌은 기억 만들기(GM, 80)'이다. 니체의 입장을 따른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를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적이게 되거나, 혹은 두려움과 공포의 결과로서 도덕적으로 설명 가능해지는 셈이다(p.25). 그러나 버틀러는 오로지 '나와 너'라는 2자적인 구조를 받아들이는 부분에 한해서 니체를 수용한다. 내가 '너'에게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반드시 두려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니체의 전제는 이상하다. 두려움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서술은 가능하며, 어떤 의미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서사-말하기(telling story)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의 전제가 된다. (서사를 말하는 것이 자기 설명의 전제가 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도 버틀러는 다분히 헤겔 같다.)
니체는 공격을 삶과 동연하는(coexistence) 것으로 파악하는데, 심지어는 갈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려는 시도(GM, 76)'라고까지 쓴다. 그는 전적으로 복수의 원리에 기대어 논지를 전개하며, 그러므로 주체에게 호소해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고통겪기(suffering)와 상해를 삶이 어느 정도 수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p.27), 자신의 행위를 알리는 데 솔직해지는 대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다(p.28). 버틀러는 <권력>에서 자신이 너무나 성급하게 주체의 이런 취임을 받아들였다고 인정하면서, 처벌 체계가 나를 나의 행위에 묶으며 '법을 내면화하는 주체에 대한 설명에 의존(p.31)'한다고 지적한다. 이제 그는 사법적 체계에 의해 인과적으로 설명되는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 후기 푸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The Use of Pleasure: The History of Sexuality, vol.2(Histoire de la sexualité 2, 1985년 랜덤하우스 영어판에 따름. 이하 UP)>). 처벌 장면의 일반화로부터 양심의 가책(자기 자신에게 전도된 공격성)을 곧 반성으로 파악하는 니체와 달리, 푸코는 처벌의 효과 및 양심의 가책으로 환원되지 않는 반성성에 대해 탐구하기를 시도한다. 초/중기의 푸코는 주체를 담론의 효과로 다루었으나, 1980년 이후의 푸코에게서는 주체가 일군의 기호와 규범들 속에서 (a) 자기-구성을 제작(poiesis)으로 드러내고 (b) 자기-제작을 자기-제작보다 더 거대한 차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감을 말하는 경향이 나타난다(자기배려 시기 푸코가 윤리와 정치를 연결짓는 방식).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한계 규정과 제3이율배반의 양자 모두 다분히 칸트적인 언어인데) 주체가 무로부터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실천의 대상을 이룰 자신의 일부를 정하는 것(UP, 28)'이며, 이런 한계짓기는 '주체를 선행하며 주체를 초과하는(p.34)'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창안하기 위한 무대에 있지만 삶의 조건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인데, 그러므로 '윤리적 행위성은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p.36).' 독자가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미묘한 맥락은 푸코의 담론/권력이 갖는 한계를(즉 결코 주체가 완전히 구조결정론적이진 않음을) 칸트적인 스타일로 비판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만약에 권력이 우리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총체성을 형상화해내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 아닌가?
섣부름을 무릅쓴 채 선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다음의 질문이 1장의 - 더 나아가 <비판> 전체의 - 핵심을 관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정초적이지 않은 주체, 다시 말해 출현의 조건이 완전히 설명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그런 주체를 단언하면 책임의 가능성,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훼손될까?(p.37)' 버틀러는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데,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불투명하기 때문에 주체는 윤리적 속박을 초래하며 유지시킨다고 말한다(p.39).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은 한편으로는 (반성성에 타자가 우선하는) 2자적인 말걸기의 구조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회적 언어들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타자의 선차성과 외재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방향성은 이 텍스트가 (비록 종종 비판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레비나스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느끼게 한다. 또 3장에서도 언급될 것이지만 타자와 사회의 선행은 우리가 필연적인 취약함으로 상처 입은 하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미니마 모랄리아>의 테마를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비판>의 이야기 구조는 종종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결국에는 외재성, 취약성, 사회성, 한계 인식, 책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며 이에 답하기 위한 것이 된다.
핵심적인 화두를 던진 이후 버틀러는 1장의 나머지 부분으로 다시 돌아간다. 여기서 그는 푸코와 헤겔을 병렬시켜 읽으면서, 헤겔적인 인정 모델에 대한 아드리아나 카바레로의 비판을 다루고자 한다(한편으로 이것은 아도르노가 규범윤리에 대해 제기했던 비판을 우회적으로 재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푸코에게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진리 체제(regime of truth)의 틀은 우리가 인정받을 수 있는 형식을 결정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우리에 대한 인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틀)에 대해서만 결정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정의 조건들을 전유하며 비판하는 것은 주체로서의 인정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기도 한데, 마치 관습의 에토스가 파괴될 때 도덕적 질문이 출현한다고 언급했던 아도르노의 예에서처럼, 이 의문 하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고 인정가능한가를 묻는 것이 가능해진다(p.44).
우리는 이 지점에서 버틀러가 타자와 사회 양자를 계속 분리시켜 파악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정의 모델에서는 오로지 2자적인 관계만이 드러나지만, 현상적으로 그 2자적 관계는 2자 바깥의 사회적 규범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2자적 타자를 붕괴시켜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은 온당하지 못하다. 나, 타자, 그리고 2자 바깥에 있는 것으로의 사회 - 이것이 <비판>의 논의에서는 기본적인 설명틀로 작동한다. 비록 버틀러 본인은 이런 식의 단순화에 난색을 표할지도 모르겠으나, 타자를 나라는 개별자 앞에 드러나는 특수자로 이해하는 한, 그가 헤겔식 삼각형 변증법의 운동을(사회가 총체성totatlity이라는 온전히 헤겔리언적인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제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타자에게 인정받거나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에 의해 위태로워지며, 자칫 자명한듯이 보이는 규범의 소여성은 이 위태로움에 의해 의심스러워지고, 규범들을 심문하기 위한 비판적 질문은 타자의 인정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다(p.46). 푸코는 자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덕의 신호라고 말하는데, 비단 그럴 뿐만 아니라 이것은 진리체제 그자체를 의문삼는 동기이기도 하다.(ibid.) 나, 너, 규범, 권력은 이 맥락에서 따로 사유될 수 없으며 내가 너를 인정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우리는 사회적인 것들, 나에게 선차적으로 주어진 것들로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그 선차적 규범은 물론 권력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게서 너로 향하는 인정은 그러므로 이제 규범과 진리체제에 대해 질문해야만 한다.
그럼 헤겔로 넘어가서,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파트에서 드러나듯 헤겔의 2자적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인 것이다. 헤겔은 나와 너 사이에 놓여 있는 동등성을 가정하며, 내가 너에게 인정을 주는 만큼 너도 나에게 인정을 베풀길 바란다고 말한다. 자신의 즉자적인 지위를 회복하려는 주체의 노력은 언제나 대자적인 것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결국 각자는 타자가 자기자신과 같은 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헤겔의 체계에서 - 그리고 레비나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듯이 - 우리가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은 순수한 제공이 아니라 언제나 인정이 되어 돌아온다. 선물은 우리 손을 떠나는듯 보이지만 결코 떠나지 않는다. 이 동일화의 모델을 계속 따라간다면 우리는 주노변증법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1) 헤겔의 스타일이 제국주의적이며 동일화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로 동일화한다는 비난, (2) 혹은 타자를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잃어버린 채 타자가 되어간다는 관점. 결국 나는 바깥에 있는 것으로의 타자에게 가서 돌아올 때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타자가 되는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에 이르게 된다는 것. 버틀러는 여기서 후자의 입장을 취하며 인정투쟁은 결국 '나'가 탈구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물론 순전한 2자적 인정투쟁의 장은 헤겔이 본디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며, 헤겔은 오히려 관습과 규범을 통해 상호인정은 생사투쟁이나 속박체계보다 안정적인 방식으로 유지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p.53). 나의 얼굴이 타자에게 독해가능하다면 그것은 타자가 내 얼굴을 독해할 수 있는 어떤 휴머니티의 틀 아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푸코로 받아와서, 오직 어떤 특수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틀 안에서만 하나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로 독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진리-권력에 종속된 휴머니티의 순간에 속하는 나는 무엇인가(p. 55. 원문은 미셸 푸코, "What Is Critique?" in the political, ed. David Ingram, 191-211. here p.191)?'
버틀러는 카바레로를 인용하며 '나는 무엇인가'라는 푸코의 질문을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 사유하려 시도한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된다(p.56). 하지만 여기서 버틀러는 우리의 단독성으로부터, 그러나 그러한 단독성이 우리 자신의 절대적인 대체불가능성을 확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말걸기 앞에서 단독자로 존재하게 되는 하에서만 인정 개념을 재구성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개별 존재자로서의 타자를 무한에 연결짓고,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무한성에 대한 계시를 준다는 레비나스의 테제를 상기할 때 이 부분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진다. 단독자이자 동시에 무한성인 타자 앞에 섬이라는 문제는 낭만적 실존주의의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전유한다. 한편으로 이 부분에서 언급되는 '대체(substitution)'는 레비나스적인 맥락에선 '대속'으로 번역된다. 사실 대체와 대속 어느쪽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논지는 성립한다). 물론 버틀러가 단독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의 개념을 여전히 유지하는 것에는 호의적이지만 말이다(우리로 돌아오기를 요청한다는 점에 한해 버틀러는 여전히 헤겔적이다). 요컨대 1장의 마지막 논의가 몰두하는 주제는 단독자로서의 '나'와 '너'가 '우리의 취약성 안에서 서로에게 노출(p.58)'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데 놓인다.
'나를 무대화 할 수 있을 뿐인 칸트적인 윤리 형식은 '너'를 은폐한다. [...] 많은 혁명적인 운동들은 대명사의 내적 도덕에 기초한 기이한 언어학적 약호들을 공유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복수 너희들은 가능한 우리편이고 그들은 반대편의 얼굴을 갖고 있고 나는 꼴사납고 너는 물론 불필요하다(pp.59-60, 원문은 <서사들을 연결하기>, 카바레로, pp.90-91, 정확한 서지 정보는 참조 불가).' 이 인용에서 표명되고 있는 바 칸트의 독백적 의무론에도, 개인주의에 반하는 혁명적 담론들에도 '너'의 자리는 없다. 하지만 버틀러는 카바레로의 설명에서 '너'를 도입하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아론을 넘어서고 삶을 파괴에 연결시키는 니체의 태도에 반대하는것, 결정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상호 존중에 연결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단독성이라는 테마를 수용하면서도 버틀러는 규범과 담론이 '나'와 '너'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점을 유지하며, '사회성 안의 무관심의 심급이 그럼에도 나의 살기를 유지시킨다(p.64)'라고 말한다. 단독자에게 근본적으로 무관심한 시간, 단독자들에게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 바깥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성은 물론 엄연하다. '담론은 삶이 아니며, 담론의 시간은 당신의 시간이 아니다(p.65, 원문은 미셸 푸코, "The Politics of Discourse", in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ilty, ed. Graham Burchell, Colin Gordon, and Peter Miller(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p.72).'
우리는 비록 단독자로서 '나'와 '너' 사이의 말걸기라는 2자적 구조를 통해서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지만, 서사적인 방식으로 나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곧바로 단독성과 경합하는 역사와 시간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p.67). 그러나 우리는 설명의 불확실함을 인정하더라도, 혹은 설명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이전에 존재하는 역사성과 시간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한에서만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한 관점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뚜렷한 기원(이 용어는 당연히 니체의 Ursprung을 암시한다)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가능한 다양한 기원의 판형들로부터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허구적인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나 자신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역사의 외재성을 제외한 방향에서도 한계에 부딪히며,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된 단독자로서 우리의 노출이다. 노출된 몸, 취약한 몸, 신체로서의 단독자인 우리 몸의 역사에는 사실적인 부분이, 서사화되지 못하는 잔여가 존재한다. 우리 몸 그자체에는 이미 나 이전의 역사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내가 전혀 회상할 수 없는 역사이다(p.70). 따라서 여기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이 남을 것이다. (1) 단독자로서 서사화되지 못하는 나의 노출(취약성, 신체성)이 존재한다. (2) 나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프로이트에게서는 '욕동'인) 일차적 관계가 존재한다. (3) 따라서 나의 부분적인 불투명성을 확립하는 역사는 존재한다. (4)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돕지만 나를 탈취하고 나의 것이 아니며 나를 대체가능하게 하는 규범들이 존재한다. (5) 이러한 탈취는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이 말걸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으로 강화된다(pp.70-71). 이제 버틀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의 불확실함이 반드시 윤리적 실패를 의미하는지 자문하면서, 2자적 관계의 구조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윤리를 출현시키는 것은 아닌지를 탐구하려 한다. 이렇게 수사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비판>의 1장은 끝을 맺는다.
P.S.: 용어 번역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용될 때는 종종 이해가 난감하다. singularity를 (단독성이 아닌) 단수성으로, substitution을 (대속이 아닌) 대체로 옮긴 것은 당연히 결점이 아니지만, 나는 이게 레비나스와 연결지어야만 이해가능한 용어라는 걸 파악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단수성의 경우 드물게 사용되는 번역인 듯해 (보다 편안한 이해를 위해) 내 요약노트에서는 단독성으로 갈음했다.
P.P.S.: <비판>은 (사실 그 번역본은) 전체적인 개요를 파악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상세한 해독을 시도하면 꽤 골치가 아파오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주디스 버틀러의 악명 높은 글쓰기가 늘 그렇다, 라고 말할 만큼 버틀러를 많이 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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