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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서울역 주변에서 재밌는 것을 보았다. 한쪽에는 파란 옷에 파란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반대쪽에는 빨간 옷에 빨간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두 진영 모두 피켓을 들고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재미있게도 두 피켓의 소재는 같은데 결론은 달랐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진정 이해하고는 있는지 의심스러운 두 진영이 서로 씩씩대는 것을 보고, 나는 이들을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세력을 두고 다투는 들짐승들 같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코뿔소」를 읽었다. 한때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했듯이 이 희곡 속에는 '코뿔소'가 되는 병이 무대를 강타한다. 코로나 속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왔듯이 무대 위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온다. 코뿔소가 동네를 휘저었음에도 돈부터 찾는 사람들, 권위에 아첨하는 사람들, 이때다 싶어서 권위를 얻어보려는 사람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를 하나씩 대가며 코뿔소로 변한다. 끝까지 사람으로 남는 것은 작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베랑제였다.
나는 「코뿔소」의 등장인물들이 코뿔소가 되기 전부터 코뿔소 같다고 느꼈다. 각자의 언변으로 각자의 입장을 합리화하지만, 정작 핵심이 되는 문제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1막에서 장과 베랑제의 대화는 논리학자와 노신사의 대화와 겹친다. 장과 논리학자는 나름대로의 이론으로 상대를 가르치려 든다. 그러나 의식 있는 독자는 둘의 논리가 차마 다루는 것조차 처참한 수준임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들은 논리를 합리적인 설명을 위해 쓰지 않는다.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다. 논리는 본래 객관성을 갖지만 그들의 논리는 주관적이다. 이성을 갖고 있지만 논리조차 구사하지 못하고 감정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등장인물들은 몸이 코뿔소로 변하기 전부터 이미 코뿔소였다.
코뿔소 사태에서 무엇을 논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코뿔소 무리 사이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논해야 한다. 코뿔소가 뿔이 몇 개인지, 아시아코뿔소인지 아프리카코뿔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베랑제를 제외한 모두가 코뿔소 무리에 합류하는 것을 택한다. 심지어 이성의 면에서 사람보다 코뿔소가 열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코뿔소가 된다.
장은 말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거야." 하지만 장은 베랑제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장이 저 말을 했을 때, '삶의 방식'이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했다. 장은 평소에 교양 있는 삶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으니. 그러나 코뿔소가 되기 직전 장은 베랑제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코뿔소로 변하는 게 좋으니까 그 길을 택했겠지. 내 보기엔 별로 나쁘지 않아! 코뿔소도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이거든." 장은 돌연 상대주의를 지지한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표준을 자신이 못 지킬 것 같자, 자신이 곧 놓일 상태를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삶의 다양성은 사람이라는 지위를 포기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이때 자신을 합리화하려 내세우는 논리들은 어떻게 해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중립을 취한다며 코뿔소 무리로 들어가는 뒤다르가 비겁한 이유, 그리고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가치에 감흥을 못 느끼고 코뿔소 무리로 들어가는 데이지가 비참한 이유가 이것이다.
뒤다르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해하는 것, 그건 곧 정당화하는 것이지." 사실과 가치는 별개의 영역이다. 사실을 파악한 뒤에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 이성의 사용법이다. 이미 가치를 매기기 위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다. 보타르는 코뿔소가 되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자기 시대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이성을 오용하는 것도 아니고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과 자신에 대해 어떤 숙고도 하지 않고 바람 따라 날아다니는 삶은,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캐물음 없는 삶이기에 가치 또한 없다.
남겨진 베랑제는 비참하다. 그는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앞으로도 전망은 좋지 못하다. 코뿔소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히스테릭해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그러나 그는 사람으로 끝까지 산다. 분명 모두가 변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그는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한다. 다수가 돼버린 코뿔소들이 그의 모습보다 아름다워 보임에도,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난 최후의 인간으로 남을 거야. 난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어! 항복하지 않겠어!" 코뿔소에 둘러싸여 히스테리를 부리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다. 하지만 모두가 코뿔소인데 자신만 사람의 모습을 지키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장면은, 마치 생각을 포기한 군중들 속에서 생각하는 개인으로 남겠다고 힘없이 소리 지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베랑제는 모습이 초라하지만 실존하고 있는 셈이다.
「코뿔소」는 20세기 유럽을 휩쓴 나치즘과 파시즘을 풍자하는 희곡이다. 코뿔소는 이데올로기에 취한 사람들의 은유다.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니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려 이성까지 뜯어고치는 이들은 애초에 코뿔소가 될 운명이었고, 결국 사람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인류에 죄를 저질렀다. 코뿔소는 아직도 나타나고 있다. 자기한테 유리한 대로 살기 위해 사상을 바꾸고 사상에 파묻히는 이들이 많다. 나는 이들을 설득시킬 능력은 없다. 나든 베랑제든 세계를 구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나든 베랑제든 코뿔소로 사는 일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이성적으로 살 것이다. 나도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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