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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책임.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무엇을 상징할까, 표면적인 내용이 모여서 어떤 패턴을 형성하는가 등을 생각하면서 예민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줌. 눈 먼 사람, 추락의 이미지, 함께 식사를 하는 것 등이 무엇을 상징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니 줄거리만 따라가는 것보다 독서가 재밌어질 듯함. 안타깝게도 절판이더라. 원서는 개정판도 나왔던데.... 개정판에 후기가 추가됐던데 전체를 총괄하는 듯해서 가져와 봄.



<여기 담당자가 누구야?>


그 질문은 악의 없이 찾아왔다. 곤란한 것들이 자주 그러하듯. 한 학생, 한 질문, 해결되기를 요구하는 문제 한 다발, 그것은: “친애하는 포스터 교수님, what about…”

우연히도 이것은 내가 전 인생에 걸쳐 씨름하고 있는 문제이다. 앞으로 스티븐이라고 부를 누군가가 이메일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물어 본 질문을 던졌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어떻게 제가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나요?”이다. 전문은 더 성가시지만 “스티븐”의 질문과 내가 이전에 받은 것들을 종합해서 말해보도록 하겠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야기 속에서 저 자신 상징이라고 여기는 것을 발견했고(이를 테면 눈 먼 사람), 제 생각을 친구들과 나누어 보았더니 그들도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작가는 단지 글을 쓰다가 눈 먼 사람이 길을 걸어가는 것을 우연히 보고 눈 먼 인물을 만든 것입니다.

제 질문은, 정말 우리가 작품을 그토록 특별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작가들에게 그렇게 큰 믿음을 주어야 할까요? 특히 그들이 아직 좋은 작가라고 검증되지 않았을 경우에도요?”


이것은 물론 문학 분석에서 중요하고 성가신 질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옳고, 정확하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사실 여기에는 여러 질문이 있으므로, 주요한 두 개만 먼저 다루어 보자: 우리의 독해가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는 한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질문에 대답해 보자면, 만약 주의 깊게 읽는 도중에-중간중간 뛰어넘거나 실제로는 없는 단어를 삽입해서 읽지 않는다면-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정말 있다고 여겨도 괜찮다. 상술한 눈 먼 사람의 예시를 보자. 그의 존재가, 이야기의 다른 요소를 고려했을 때, 보는 것이나 보는 것의 실패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는가? 누군가가 바로 그 눈앞에 있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관계를 보는 것은 항상 쉽거나 재빨리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그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눈멂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을 고려해 보라. 맹인을 이야기에 도입하는 것은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면, 그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 대한 계획을 짜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그를 배치하기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다르게 증명되기 전까지는 그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라.


질문의 두번째 부분은 더욱 흥미롭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작가가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는 일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만약 내가 요술봉을 휘둘러 모든 사람이 작가에게 가지는 의무감을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당장 그럴 것이다. 내게 있어서 독자의 유일한 의무는 텍스트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작가에게 그의 의도에 대해 심문할 수 없다. 그러니 유일한 권위의 토대는 텍스트 자체에 있다. 단어들을 믿고, 오직 그것만을 믿어라. 절대 그 뒤의 동기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작가가 당신에게 의도를 말해 준다고 해도, 그들은 집단으로 볼 때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들이고 신뢰할 수 없다. 게다가, 작가들은 가끔 “그냥 맞는 것 같아서” 무언가를 하기도 한다. 즉 모든 행동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다. 비록 이 말이 그 행동 이면에 이유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이 글의 제목으로 선택한 문장이다. 여기 담당자가 누구야? 우선 약간의 맥락을 밝히도록 하자. 1967년, 문학과 문화 문제에 대한 사상가로 약간 알려진(물론 미국에서) 롤랑 바르트는 똑같이 약간 알려진 잡지인 아스펜에 “저자의 죽음”이라고 불리는 짧은 에세이를 출판했다. 그 반향은 약간 알려짐과는 정반대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후기 구조주의 이론의 프로그램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앵글로-아메리칸이 대륙적이고 특히 프랑스적인 사상에 대해 싫어하는 모든 것의 상징이 되었다. 다른 말로, 그것은 모두에게 의미가 있다. 나는 이 에세이를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항상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르트와 그 무리에 대한 우리의 문제에 실례가 될 만하다. “이럴수가, 그는 작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네. 그럴 수는 없어! 작가들은 중요해야 해. 아니라면 우리가 영문학 전공자로서 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등등.


이 에세이를 처음 읽는 독자가 자주 놓치는 것은, 글의 쾌활함과 짓궂음을 제외하고도, “저자author”는 “작가writer”와 완벽하게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둘을 서로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르트는 ”작가“를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 écrivain를 , ”저자“를 의미하는 auteur과 동일시하는 것은 피한다. 사실 이것이 그의 요지이다: 누가 쓰던 작가에게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텍스트의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저자에게 있다. 그 인물, 창조주로서의 저자(그는 계속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우리가 요지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한다)는 죽었다.


이걸 다른 각도에서 보자. 당신이 읽은 작품의 작가는 대부분 죽었다.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모든 작가는 우리의 손에서 벗어난다. 비록 그렇게 보이지만 음울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모든 작가는 결국 하늘에 있는 거대한 재고본 거치대에 걸리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정의상 그들은 우리가 의미에 대한 단서를 구할 수 없는 지점으로 간다. 그들의 육체와는 달리 작품은 살아남으며,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 근거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언제 작가는 죽는가? 대단하긴 쉬운 단순한 의학적인 질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기체로서의 작가는 사망 증명서가 찍히는 날에 죽는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라. 작품의 창조자로서의 작가는 어떤가? 소설을 출판한 첫 날과 그로부터 백 년 후가 정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단어가 바뀌었을까? 작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제하는 작가의 능력이 변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 작가는 헨리 제임스처럼 출판 후 시간이 지나고 “뉴욕 에디션”을 내서 수많은 변경점을 줄 수도 있다. 루이스 어드리치와 존 파울스는 각각 <사랑의 묘약>과 <마법사>의 개정판을 출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시인들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생각나는데, 잡지에서 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를 개작하기도 하고, 시집에서 선집으로의 과정에서 그러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일단 작품을 한번 쓰고 나면, 좋든 나쁘든, 그대로 놓아 둔다. 대부분 좋다. 애초에 좋게 쓰고 그걸로 끝이다. 개정판을 쓰고 있는 작가로서 하는 말이다.


이 주장은 스티븐의 “검증되지 않은” 저자의 대한 걱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텍스트를 판단한다면, 저자의 나이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 다음의 두 예시를 보자. 1983년에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루이스 어드리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크지도 않은 대학에서 나보다 두 학년밖에 어리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납득할 순 있다. 아무런 장편도 아직 발표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곧 장편을 하나 발표했고, 대단한 소설이었다. <사랑의 묘약>은 소설 부문에서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첫 장편은 보통 최고나 그 부근에 도달하기도 힘든데(헤밍웨이와 하퍼 리는 예외이다), 이 소설은 곧바로 그렇게 했다. 물론 출판 너다섯 해 전에 각 장들이 스탠드얼론으로 문학 저널에 나왔으므로 어드리치가 완전히 무명이거나 읽히지 않은 작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이 첫 장편이라는 점에서는 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기록이 확립된 후에만 그 중요성이 유효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적어도 작가가 명성 측면에서 "성장"할 때까지 멋진 소설을 놓칠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나는 명성보다 소설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아니면 이를 고려해 보라. 나는 이 후기를 2013년 여름에 쓰고 있는데, 흥미로운 출판계 폭로가 일어났다. 영국에서 4월에 미스터리 소설 데뷔작이 출판되었고 평론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 판매량은 매우 부진하였다. 7월 중순, 아마 남은 사본이 수거돼서 폐기될 법한 시점에, 선데이 타임즈 신문에서 진짜 작가를 폭로했는데, 실제로 첫 성인 미스터리 소설은 맞았지만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였다(스티븐 킹이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로버트 갤브레이스는 <쿠쿠스 콜링>을 필명으로 출판했을 때 평론가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던 J.K. 롤링으로 밝혀졌다. 그녀의 전작 <캐주얼 베이컨시>는 백만 부 이상 팔렸지만 비평가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동기가 있었다. 작가에 대한 폭로 다음 주에, 이 소설은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1위를 차지했다. 모든 종이책은 즉시 쓸려나갔기에 판매의 대부분은 전자책이었다. 출판사는 곧 수십만 부를 새로 인쇄하도록 지시했다. 이제 내 질문은 이것이다: 이 소란은 무엇인가? 마케팅 관점에서 나는 완전히 이해한다. 그러나 미학적인 문제로 봤을 때, 그게 정말 중요한가? 그 책이 그녀의 은퇴한 군 관계자 분신보다 롤링의 책일 때 조금이라도 좋아지거나 나빠지는가? 궁극적으로, 그 책은 저자의 브랜드가 아니라 텍스트의 가치에 의해서 등락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평론가들이 우리를 대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주 판매량이 우리를 대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 최악의 독서 경험 중 일부는 “모두”가 읽고 칭찬하는 책들에 대한 것이었다. 경험은 몇 번이고 내가 “보통 사람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분명 “모두”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찬탄하는 것, 내가 거부하는 것에 대해 나는 스스로 읽음으로써만 찾을 수 있다.


똑같은 것이 분석과 해석에 대해서도 혹은 우리가 지난 수백 페이지 동안 한 일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나는 주로 소설이나 시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신의 독서가 되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문학과 문학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에 대해 꽤 알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 당신은 매우 고마워해야 한다. 세상의 누구도 <파이 이야기>, <폭풍의 언덕>이나 <헝거 게임>을 당신이 읽는 식으로 읽을 수 없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자주, 너무 자주, 나는 학생들이 그들이 작품을 보는 방식에 대해 사과하는 경우를 본다. “이건 제 의견일 뿐이지만, 그래도” 혹은 “아마 제가 틀렸겠지만, 그래도” 혹은 이런 변변찮은 사죄의 다른 반복들 말이다. 사과하지 마라! 도움이 되지 않으며, 말하는 이를 작아보이게 만든다. 당신의 독서에 재치 있고, 대담하고, 확신하며 자신감을 가져라. 그것은 당신의 의견이고(그러나 “단지”는 아니다) 틀릴 수도 있지만,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주는 아니다. 이제 내 마지막 조언은: 당신이 읽는 책을 소유해라. 시, 이야기, 플래시 픽션, 연극, 회고록, 영화, 창의적인 비문학, 그리고 나머지들 전부 또한. 축자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비록 문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거기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당신의 독서에 책임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건 당신의 것이고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은 것이다. 코나 손가락이 그러한 것처럼 당신의 일부이다. 문학에 대해 읽고 토론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우리의 독서는 그런 토론을 통해 바뀌기도 한다. 나는 내가 그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내 관점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며, 당신이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의견에 대한 통제력을 비평가나 선생, 유명 작가 아니면 모든 것을 아는 교수에게 넘기지 마라. 그들의 말을 듣지만 자신감 있고 확신을 가지고 읽고, 당신의 독서를 부끄러워하거나 사과하지 마라. 당신과 나는 모두 당신이 그럴 능력이 있고 재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누구도 다르게 말하지 못하게 하라. 텍스트를 믿고 자신의 본능을 믿어라. 거의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