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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영 월드
xxx 월드; 현대 독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비공식 비평 용어로, xxx에 들어가는 작가의 저작들을 읽는 동안, 그들 사이에 공통으로 묶이는 요소들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마치 탐험하듯, 독서 과정을 한층 즐겁게 표현한 말이다. 공허함, 우물 등의 키워드로 읽을 수 있는 하루키 월드나 장편들을 부조리 3부작으로 묶고 단편들의 각종 기이한 설정들이 사이사이 동시 존재하는 공간처럼 읽히는 카프카 월드 등이 그러한 용례이며, 한 작가를 탐독하는 독자들은 거진 그 애정을 담아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 한국 문단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했다고 평가받으며, 현재까지 4권의 소설, <밤의 징조와 연인들(이하, 연인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이하, 앨리스)>, <북해에서>, 그리고 가장 최근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이하, 검은 밤)>를 출간한 우다영 역시 그런 “월드”를 언급할 때 빼놓기 작가이다. 앞서 언급한 이유들이 아니더라도(소소한 애정이라던지), 그녀의 소설 간 관계는 덧댄 유화처럼 엉기성기 모여있을 때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식으로 쓰여졌고, 여러 단편들을 읽은 상태일 때 복합적인 면모를 더욱 발하며, 소설집 간에도 상호지지의 관계를 보인다.
이때까지 출간한 세 권의 단편집은, 첫 수록 소설에선 소설집 전반이 공유하는 모티프를 제시하고 이후 이에 대한 다양한 감성의 변주를 시행한다. 세 소설집 모두 분위기의 환기를 위해서인지 중간에 이질적인 성질을 띠며 튀는 듯한 소설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 밖의 공통점은 아래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체코의 소설가 쿤데라는 소설과 인간의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 대해 이런 뉘앙스로 이야기하였다. 돈키호테가 드넓은 세상을 뛰쳐나온 이후 우리내 삶은 점차 그 주변에 울타리를 세워갔다. 발자크에 이르러 역사의 울타리가 세워졌고, 플로베르에 이르러 일상까지 그 범위가 축소되었다. 톨스토이는 사건들이 발생하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함으로 이를 좁혔고, 조이스는 정제되지 않은 개인의 의식으로까지 울타리를 두르는데에 성공했다.
카프카에 이르러 우린 지나치게 많은, 또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울타리들 아래에 깔려 자신의 위치도 망각하게 되었고, 헤르만 브로흐부턴 사람들끼리 울타리를 공유조차 하지 않고 세계 자체가 개인보단 울타리들로 가득찼다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쿤데라가 선언한 울타리의 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의 초입을 넘어서는 지금, 이런 상황은 더 가속했지, 세르반테스의 과거로 회귀하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탈출할 기미는 그때도, 지금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우린 만원전철 속 직장인 처지로다, 철학, 사상, 이념,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등 인간을 규정하고자 한 각종 항목들에 낑긴 채, 바로 옆에 선 사람의 얼굴도 보지도 못하고 퀴퀴한 암내 진동만을 감각하며, 그래도 그 향기로나마 무언가를 파악해보고자 매일 아침 칠흑의 출근길을 나서는 판이다.
최대한 손가락을 움직여(혹은 따로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머릿속 생각으로다만) 옆 사람의 꼬랑내 가닥을 간신히 잡아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처지고 진리이다!라고 선언하는 눈 먼 작가들을 보면 어떠한 게으름마저 느껴지는 기분이고, 그런 상황에서 남다른 세계관을 선사하는 우다영의 소설들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 대부분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흔한 소재들(혹은 흔히 발생한다 착각하는)을 소소한 일기를 적듯 써내는, 일명 커뮤니티의 “썰풀이”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에, 우다영은 택하는 소재부터 실제와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어휘들이다. 징조, 우연, 꿈, 신화 등 그녀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몽유에 가까우며, 어딘가 흐리멍텅하면서도 독창적이고 명료한 색채를 띤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암시를 완전히 잃지 않고 있는 균형감 또한 보여준다. 각각의 책들을 살펴보며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자.
진자와 성좌 - <연인들>과 <앨리스>
우다영의 첫째, 그리고 둘째 소설집은 비슷한 결을 띤다. 어딘지 나른한 일상의 분위기와 함께 저 멀리 추상과 환상의 세계로 뻗어나가는 필치의 대담성, 무미건조한 듯 하면서 애틋한 내음을 머금은 공기, 현실이 아니라 꿈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전개 등 사람들이 우다영하면 생각하는 그 특징들은 이 두 소설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약간의 차이를 두고 말이다.
간단히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보자. 우다영의 이 두 소설집에는 인공물들의 묘사가 많이 나온다. 호텔 내 자리한 수영장, 인공적으로 조성된 해변이나 수로, 섬 전체를 꾸민 휴양지 등의 배경이 존재하고, 그 외의 장소들도 인공물들과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듯한 카페, 병원, 도시 등의 공간들이 소개된다.
생생한 자연이나 살아움직이는 물생은 거의 흔적이 없다(<연인들>의 <노크>, <조커>, <셋>, <기분에 이르는 유령들>이나 <앨리스>의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이하, 당풍)>,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밤의 잠영> 등, 물론 <메조와 근사>처럼 자연물이 배경인 예외적인 소설도 존재하나 여기서 등장하는 호수 또한 고요한 정적의 장소이다).
의도적으로 자연물들이 배제된 채 딱딱한, 그러나 익숙한 소재들의 잦은 사용은 소설들의 비현실감에 일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밖에도, 한 지점에서 갈라지는 두 개의 서사(<조커>와 <해변 미로>), 서로 인물들을 공유하며 연관된 이야기들(<밤의 징조와 연인들>과 <밤의 잠영>) 등도 소설집들의 유사성에 일조하리라.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두 소설집의 차이점이다.
만남과 그 이면의 진자
유리 궁전 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지켜본 적이 있는가? 바깥의 무더운, 혹은 냉혹한 기후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유리 궁전 내 환경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볼 때 묘한 비현실성을 낳는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방금까지 느끼던 날씨는 거짓말인 것처럼 안온하게 변하고, 나 자신이 계절의 시간성으로부터 유리된 투명한 감각이 인다.
<연인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와 같다. 무미건조하고 차분하다. 표제작은 연인의 갈등을 소설 내내 보여주지만 어떤 격렬함이나 감정의 폭발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노크>는 소설의 상황처럼 축축하고 포근하며, <조커>는 카페 내 가구들에게로 비쳐드는 햇볕처럼 몽환적이다.
김승옥의 <건>을 읽어본 독자는 다음과 같은 감각을 알리라.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볼 때, 세상 전체는 투명한 대기에 감싸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고요함이 감돌지만, 그 속은 격렬한 과거와 강렬한 색채, 비정한 인간들과 동물적 의식들이 꿈틀거리는 몸짓의 세계임을. 우다영의 세계는 그와 정반대이다. 대기의 투명함은 정말 그저 평온할 따름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조용하다. 김승옥의 세계에서 본질인 야성이 거세된, 또 다른 의미로 무정한 세계.
그 세계는 돌연한 징조과 미묘한 조짐들로 가득차 있다. 이는 모든 만남이 끝난 뒤, 혹은 누군와 함께 있는 중 긴장을 풀 때 불현득, 지나간 관계를 쫓으며 매달릴 때 우리가 지나치거나 잊은, 혹은 갑자기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만남과 관계를 지금에 이르게 한 그런 소소한 징조들이다. 너무나 소소해서 아무리 주의깊게 바라볼지라도 무엇을 암시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런 조짐들 말이다.
그러나 이는 납득하기가 힘들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 징조와 조짐이 있었다고 확신이 든다면, 당시에 이를 몰랐다는 것은 그저 등장인물들의 부주의함이 아닌가? 이는 징조가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 원인은 저 위에, 우리도 알지 못하는 세계의 너머에 존재한다.
이해를 위해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다. 다각도로 움직이는 진자를 상상하자. 이 진자는 모래 위에 자신의 궤적을 남기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인간은 각자의 진자 위에서 궤적을 따라 삶을 수행한다. 그는 즉각적인 궤적을 바라보며 다음의 행로를 예측해보고, 기존의 행보를 돌아보며 더 깊은 추측을 가정한다. 그러다 어느날 불현듯, 그는 깨닫게 된다. 사실 바뀌는 것은 궤적이 아니라고, 진자가 어딘가 바뀌었다고. 앞뒤로 존재하는 궤적은 그저 무언가의 반영일 뿐, 실제 그의 행보를 결정한 것은 진자의 중심축에 달린 무언가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게 해준 것은 진자 경로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아니라, 특정 시점과 시간과 공간이 굉장히 멀어진 마치 진자의 한 끝에서 다른 끝에 이르렀을 때, 시점에 존재할 때는 알아채지 못한, 거리감이 주는 새로운 경지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한 어긋남과 꼬임이다. 징조, 조짐이란 진자의 원점에 알 수 없는 변동이 생겨 삶이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기 시작할 때, 두 삶의 시간 간극을 두고 유사한 경험을 궤도의 위치에서 관측할 때 드러난다.
징후는 사건의 발생 후에야 그 타당성을 갖는다. 물론, 우린 편의상 그러한 감각을 징후라 부를 뿐,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진 무엇이 징후고 조짐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치 문학을 탐독하던 젊은이가 자신 주변의 일들을 시적 경험에 비쳐 은유의 이미지를 통해 그 귀결을 해명하려하나 전부 빗나가는 상황과 닮았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이별 후에야 자신들의 연애가 당시 감정 상태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튜브를 타고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다 언뜻 서로 닿고 흐름에 멀어지던 수영장 데이트처럼, 마치 두 우주의 우연한 스침을 반영할 뿐임을 생각한다. <조커>에선 타인이 개에 물리는 광경이 관조자의 병을 치유한 것처럼 생각된다(그리고 타인의 살인 욕구의 고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던 현실을 보이며, 빗겨나간 또다른 징후를 상기시킨다). 사건들 간의 직접적인 인과를 벗어난, 저 위에서 움직이는 무언가…
정말 친한 친구들 간의 남편 뺏기와 서로 숨기고 숨기던 불륜 관계가 도출되던 연유(<셋>), 억지로 유제품을 썩게 만든 진의와 이를 회피한 우연한 사건(<크림>), 뜬금 없고 개연성 없는 이러한 전개는 작품들의 차분한 분위기와 어우려져 그 자체로 독자들을 납득시킨다. 이 소설들과 이를 반영한 우리의 삶까지, 세계의 인간들을 움직이는 세계 밖의 무언가, 혹은 인지 가능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무언가, 우연이라기엔 무겁고 운명이라기엔 가벼운 이와 함께 진자 간의 시간차로 끌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음을.
재밌는 점은 <연인들>에서 세상을 조종하는 그 무언가는, 그들 사이에선 또 알 수 없는 연관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수영장의 은유로 끝난 표제작에서 인공 수로로 가득한 <노크>로, 이사의 모티프로 이어지는 두 소설 <조커>와 <얼굴 없는 딸들>, 할머니들이 되는 막연한 미래의 공상에서(<얼굴 없는 딸들>) 실제 할머니로의 이어짐(<미래와 밤>)에서 볼 수 있는 건 소설 내에선 찾을 수 없는 인과성이 오히려 소설들 간에서 발견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자 끝에 위치한 무언가는 세계를 넘어 서로 맞닿아 있을까? 어딘가에 한껏 매인 진자들이 서로 간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다른 진자의 움직임을 결정하며 세계 사이의 간섭을 일으키는 걸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연작처럼 보이는 소설들의 관계는 징후와 진자에 대해 이런 공상까지 가능케한다.
보이지 않는 성좌와 징후
반대로, 징후가 그대로 사건의 발생에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때의 징후는 전혀, <연인들>의 미묘한 징후들보다도 더욱 사건 자체와 관계없이 다가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또한 이때 영향 역시 직접적인 인과의 영역이라기보단 관계를 뛰어넘은 암시와 은근함이 되어 인간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예상할 수 없는 진자에 끌려 지나고나서야 징후를 감각하는 세계와 다르게 <앨리스>의 세계들은 그 징후가 태생의 성좌로서 주어진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탄생의 성좌는 자신의 탄생 시점에서 볼 수 없다. 단지 그 성좌가 나의 탄생에 함께 있었다는 막연한 추억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다, 그 형태로 삶과 만남들이 배열되는 순간 그 진실에 탄식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앨리스>는 <연인들>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선 고요함이 어느정도 탄생과 유아기의 애틋함을 머금은 아련함이 깃들어 있다. <당풍잠>은 동화풍의 창세기를 그대로 닮은 채 결말까지 이어진다. 표제작은 그 자체로 아동기의 추억이며, 다른 단편들도 <연인들>에서 볼 수 없던 따뜻함이 조금씩 가미된 모습이다.
유년기의 기억을 장식하는 <당풍잠> 속 신화(중요한 이미지인 그대로 옮겨보겠다); “태초에 거인이 있었고, 거의 영원한 시간 동안 홀로 존재하던 거인의 눈에서 어느 날 신이 태어나. 눈이 멀어버린 거인은 본래 가지고 있던 특별한 힘과 능력을 잃어버리지. 신은 기회를 놓지지 않고 무력해진 거인의 따뜻한 내장을 꺼내 그것으로 산과 바다를 만들고, 진흙과 공기를 분리하고, 다시 진흙과공기를 한데 빛어 세상 만물을 창조해. 그러고는 눈과 심장을 모두 잃은 거인에게 땅과 하늘 사이에 서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것을 영원히 짊어지는 형벌을 내린 거야."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은 거인이 되어(소설에서 괜히 직접적으로 ‘거인처럼’이라는 비유를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신(그와 친하던, 감정이 결여된 대신 타인의 관찰과 자신의 이성과 추론으로 도덕을 쌓고자 하였고 결국 그러한 세계를 작게나마 만드는데에 성공한 친구)이 만든 안정된 세계를 바라본다. 단지 신화와는 다르게 더 평화롭고 따스한 방식으로 완성된 세계를.
그 밖에 표제작엔 인공적으로 만든어진 휴양섬을 조용하게 즐기는 주인공이 자신의 끝을 예지한다, 아동기의 꿈 속에서. <메조와 근사>에선 과거를 회상하던 주인공이 그 당시의 알 수 없던 예감과 징후가 미래를 반영하고 있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앨리스>의 단편 3개, <해변 미로>, <밤의 잠영>, <창모>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인들>의 수록작을 닮는다. 분기점에서 갈려 서로 다른 두 인생이 공존하는 서사를 <해변 미로>와 <조커>가, 동일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른 시각에서 <밤의 잠영>과 <연인들>의 표제작이, 그리고 앞서 언급할 이질성의 문제로 <창모>와 <얼굴 없는 딸들>이 서로 연관된다. 이 중 <창모> 쪽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앞에 두 쌍만 얘기해보자.
<해변 미로>와 <조커> 사이엔 인간 존재를 결정하는 진자와 성좌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서로 닮은 삶을 살아가는 두 인생이 교차할지라도, 진자로부터 유도된 삶은 서로를 관조하듯 바라보고 그 동질감이 다가올 때 비로소야 깨닫지만, 성좌가 예견한 두 삶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의 삶에 동일한 요소들을, 그 옷감만 바꾸어 출현시킨다. 그렇기에 두 인생은 이미 갈라져 아무 상호작용을 할 수 없을지라도 진자가 끌어간 삶들에 비해 포근하고 정겹다.
<밤의 잠영>과 <연인들>은 서로 이어진 이야기들이다. 불륜 커플이 주인공 커플과 만나고, 불륜남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자 폐병에 걸린다. <연인들>에서 상간녀와의 이별은 그 즉시 아내의 폐병을 야기한 것처럼 그려지고 이는 불륜남 평생의 후회가 된다. <밤의 잠영>에선 상간녀가 배불리 먹던 새하얀 과육에 검은 씨가 박힌 용과가, 아내의 몸속에서 자라는 현무암과 같이 변할 폐, 새까맣고 구멍이 뚤려 마치 반대편이 보인다면 하얗게 보일 폐와 대조를 이루며 상간녀에게 서늘한 의도를 은근히 내비친다.
물론 정말 이들 사이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상간녀가 뭘 했겠는가). 단지 앞서 언급했듯이, 진자의 유도는 징후의 사후판단을 낳고, 성좌는 알아볼수만 있다면 분명히 미래를 암시한다.
<연인들>과 <앨리스>는 허공에서 우다영이 본 세계의 두 축이다. 우리 모두를 무겁게 누르는 정보와 해석의 과다, 이를 뚫고 가장 추상적으로 사고해 본 세계를 가르는 두 질서, 한 쪽은 인간들을 끌고다니며 이리저리 만남을 만들고, 그 사태가 지나서야 완전한 해명이 가능해지는 반면, 다른 쪽은 시작부터 모든 답을 쥐어준다.
그러나 그 답의 실마리조차도, 경우에 따라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불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법칙과 질서란 그저 법칙과 질서이고 옛적부터 인간들의 불평을 들어주지 않았거늘.
(2)는 좀만 더 다듬고 낼 올릴 예정
<검은 밤>도 어서 읽어야겠지?
2 링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596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