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어디선가 발행한 추천 도서 목록에 있어서 읽은 작품이다. 생소한 작품에 짧은 분량이라 기대가 작았다. 예상 밖으로 정말 참신한 작품이었다. 독특한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돋보였고, 샌디가 문학 작품 속으로 들어가 속편을 쓰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브로디 선생은 정말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려 한다. 그러나 학생들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브로디 선생이 규정한 울타리 안에서만 허가된다. 그녀는 감성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감성적인 곳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결부됐다고 믿으며 반성하지 않는다. 그녀가 파시스트와 나치를 찬양하는 것도 그들이 독재자의 규정 하에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브로디 선생은 그 정도의 힘이 없다. 조이스 에밀리를 선동했지만 조이스 에밀리의 삶을 책임질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로더 선생을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장악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브로디 무리를 가스라이팅 해서 그들을 개인이 아닌 브로디의 작품으로 만들려 애썼지만, 현실을 접해가는 아이들의 변화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권력은 전적으로 학교라는 좁은 공간 덕분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브로디 선생은 자기가 수업하는 교실 밖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나는 브로디 선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고등학교 시절의 담임이 생각났다. 담임은 유쾌한 사람이고 아이들을 자유분방하게 가르치기를 선호했지만, 은근히 제 고집이 있어서 아이들이 원하는 노선으로 향하지 않을 경우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브로디 선생이 파시즘을 옹호했다면 담임은 노골적으로 좌파를 옹호해서(수업 시간에 특정 정치인을 찬양하는 일도 잦았다), 그를 열렬히 따르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좌파가 됐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광경이다. 좌파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비판 의식이 부족한 시기의 아이들을 공략해 손쉽게 좌파로 만드는 것이 끔찍하다. 교육과 선동을 구분하기 어려웠으니, 브로디 선생과 담임은 학교를 망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브로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의 어린 어깨 위에 원숙한 머리를 올려주는 거야. 그러면 내 제자들은 모두 크림 중의 크림이 되는 거지." 브로디 선생은 그렇게 해야 하는 근거로 자신이 '전성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볼 때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어디까지나 브로디 선생의 것이어서,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고정하는 듯한 모습은 솔직히 불쾌했다. 브로디 선생은 직접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교육이란 학생들의 영혼에 이미 있는 것들을 밖으로 이끌어내는 거야. 매카이 교장에게 교육이란 학생들의 영혼에 현재 없는 것들을 집어넣는 것인데, 난 그건 교육이 아니라 침입이라고 생각해." 브로디 선생은 확실히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성기라는 알쏭달쏭 한 말을 근거로 학생들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 점령한다. 브로디 선생의 교육은 결과적으로 침략이다. 브로디 선생의 태도는 나르시시즘이다.


침략에 대응하여 아이들이 각자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브로디 무리는 전성기에 있던 브로디 선생에게 배웠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성장은 브로디가 만든 틀을 깨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브로디의 손이 닿지 않는 학년으로 올라가 각자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브로디와 별개인 새로운 관심사를 갖는 순간, 그들의 전성기가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것과의 만남, 그리고 그것이 주는 황홀함. 이런 기분으로 가득 찬 시절이야말로 전성기다.


샌디가 빈민가를 걸으며 에든버러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샌디의 세상이 넓어지는 것이 독자로서 기뻤다. 마찬가지로 샌디가 점점 브로디 선생의 계획에서 벗어날 때 희열을 느꼈다. 절정에 이르러 샌디가 진 브로디의 아류가 아닌 개인이 되기를 선택했을 때, 나는 박수 칠 수밖에 없었다. 성장이란 틀을 깨는 것이다. 물론 윤리적인 틀을 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남이 정해 놓은 노선에서 벗어날 합당한 이유를 대며 자신의 노선을 걷기 시작할 때 사람은 성장하기 시작한다. 샌디는 정말 훌륭한 여주인공이다.


해설은 브로디 선생이 계획에 실패해 좌절할 때마다 비치는 인간미에 주목한다. 오히려 그런 경험이 브로디 선생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반쯤 동의한다. 자신의 세계가 외력에 의해 부서졌다면, 그것을 고치는 과정에서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고하기 직전까지 배신자를 찾은 것으로 보아 브로디 선생은 성장의 발판을 밟았지만 앞으로 가지는 못한 듯하다. 그래서 나는 브로디 선생이 내비쳤다는 인간미에 공감하지 못하겠다.


샌디는 자신이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담임은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살고 있을까? 아이들은 여전히 담임의 전성기의 영향에 살고 있을까? 갑자기 많은 것이 궁금해진다. 연락이 끊겨서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아이들이 샌디처럼 자신이 됐기를 바랄 뿐이다. 선생의 모작이 아니라 새로운 선생이 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