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그대로, 현대 건축과 공간에대한 철학적 검토를 담은 책.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나 역시 건축과 미학에 대해 독자적인 사유를 나름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임. 내가 가진 아이디어가 이미 남들이 생각한것인지 확인하고싶었음. 나는 미학에 거의 문외한, 건축에는 완벽하게 문외한이라 이 책이 건축 미학의 전체중 얼마만큼을 대변하는지는 잘 모름. 아무튼 결과적으로 이 책에서 파악한 현대 건축미학의 수준은 내 기대보다 낮았음.
첫 장에선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근대 건축이론과 공간론의 철학적 의미를 이야기하며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함. 예를들어 코르뷔지에와 그밖의 근현대인들의 건축론과 도시계획은 보편적이고 균질적인 이상적 공간을 재현하는 행위로 볼수 있음. 이러한 공간관은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기하학과 르네상스의 원근법, 계몽주의라는 키워드로 이해할수 있음. 그 시절 수학자나 기술자들이 그랬던것처럼, 공간에 대해서도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보편 형식(혹은 추상적 구조)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을 건축으로서 드러내는것은 곧 계몽주의적 행위라고 볼수 있는것임.
르페브르같은 사람들은 저러한 근대 공간론을 비판함. 그들에 따르면 근대 공간관은 모든 공간을 보편적이고 균질한 대상으로 놓음으로서 동시에 의미가 제거된 공허한것으로 전락시켜버림. 공간을 체험하는 주체와의 관계가 배제된 공간 그 자체는, 주체와의 관계라는 의미가 부여된 '장소'와는 다른것임.
이후 이어지는 내용도 근대건축에 대한 비판임. 건축물에 사용되는 재료의 성질(물성)에 대한 외면,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과 신체에대한 무시를 통해서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된것이 근대건축과 공간론이라고 말함.
나는 전반적으로 이런 비판에 대해 거의 동의할수가 없음. 왜냐면 나는 근대건축이 비인간적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분명 그들이 말한대로, 유리 마감이나 노출콘크리트, 철과 페인트, 매끈한 겉면, 평면과 직선같은 요소들은 영속성에대한 추구와 관련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함. 근대건축의 비판자들은 근대건축이 이런식으로 자연스럽게 노화되는 물성을 가진 재료들을 배제하고 소멸하지 않는 건물을 추구하는것이 역설적으로 죽음에대한 강한 두려움을 의미하며,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존재로서의 참된 운명을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것이라고 말함.
그러나 이것은 내가 보기엔 후대인의 입장임. 건물을 짓고 그 건물에서 활동하는 당대인의 시각은 배제된 생각임.
상식적으로 건물을 짓는다면 오랫동안 변치않기를 바람. 기술적으로 그게 가능하다면 근대 이전에도 그렇게 했을것임.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석조건축이나 콘크리트같은, 오랫동안 변치 않는 재료를 사용하는것은 결국 건물의 지속성이라는, 당대인에게 필요한 실용성에 의한 행동일뿐 딱히 미학적인 이유에 의한것은 아님. 나무나 흙같이 (그들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낡아가며 세월을 받아들이는) 재료들을 사용한것은, 그러한 점차적 소멸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기술적으로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일뿐.
오히려 이것은 생활인의 입장이 아닌 후대인의 입장에서 건물을 주거공간이자 주체와 관계하는 장소가 아닌, 자신의 미학을 만족시키는 예술작품으로 보는 행위이며 그들이 비판했던 비인간성의 한 사례라고 할수도 있을것임.
또한 그들은 근대적 재료와 근대적 욕구가 반영된 건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자연스러운 장소가 되어가는지를 경험하지 못한것 같음.
왜냐면 나는 (전형적인 근대 건축물인)콘크리트 아파트를 보고서 건물이 시간의 흐름을 몸에 새기며 변화하는 존재라는것을 깨달았기 때문.
90년대에 태어났고, 당연히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세계는 온통 콘크리트로 채워져 있었음. 콘크리트는 나에게 낯선것, 새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따스한 느낌을 주는것임. 스티븐 홀같이, 40년대에 태어나서 흙과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전근대적 건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이해할수 없는것임. 어째서 콘크리트가 비인간적이지 않은지. 예를들어 나는 시립 5층 아파트에 살았던 어린시절 기억을 갖고 있음. 우리는 5층에 살았고, 옥상은 누구나 이용할수 있는 공간이었음. 지극히 기능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며 지어진 당시 아파트답게, 옥상은 노출된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었고 단지 몇미리정도의 작은 틈새로 이루어진 (아마도 건설과정의 기술적 이유때문에 남은) 격자가 바닥 평면을 분할하는 단순한 구조였음.
언뜻보면 이런 구조는 비인간적임. 극도로 경제성을 추구해서, 어떤 장식도 없고, 곡선도 없음. 날것 그대로 노출된 콘크리트와, 자연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완벽한 정사각형으로 분절된 평면이 덩그러니 존재할뿐임. 그리고 이런 구조, 이런 건물, 이런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보는 이러한 공간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살풍경일 뿐이겠지.
그러나 나에겐 다름. 나같은 사람에겐 다를것임. 나는 그런 옥상에서 놀았음. 격자는 어린아이에게 하나의 구획이 되어줌.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상상의 놀이를 하는 아이에게 하나의 격자는 하나의 구획이고 그렇게 광대하게 펼쳐진 평면공간은 아이가 가진 극도로 인간적인 능력, 바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성질을 지님. 사람들은 종종 비인간적인것은 비자연적인것이라고 착각함. 그러나 그렇지 않음. 예를들어 전자기기 디스플레이 화면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인식되는 종이는 사실 전혀 자연적이지 않은것임. 순수하고 깨끗한 기하학적 평면이지. 그러면 종이보다 더 자연적인것은 더 인간적인가? 예를들어 흙바닥은 종이보다 더 인간적인가? 그렇지 않음. 인간적이란것은 극도로 자연적인것과 극도로 비자연적인것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것임. 우리 인간은 자연에 맨몸으로 뒹구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정도 거리를 벌리되 너무 멀어지진 않으며 그 거리를 유지하는 존재인것임. 그것이 인간적인것임.
그런 의미에서 분할된 평면은 아이에게 전혀 비인간적이지 않음. 오히려 그렇게 공허하지만 최소한의 규칙성이 존재하는 공간은 인간만의 특징인 상상력을 자극함.
완전한 연속이자 아날로그인 점토보다, 이산화되어있고 더 많은 제약을 가진 레고가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는것처럼, 인간의 인지는 완전한 자유나 불규칙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제약과 제한, 그리고 규칙성을 가진 조건에 친화적임.
콘크리트 평면이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건 단지 하나의 예시일뿐임. 콘크리트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콘크리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느껴질수 있는지 수없이 많은 예시를 들수 있음. 예를들어 콘크리트는 돌보다 약하고, 더 빠르게 손상됨. 손상된 콘크리트 벽면이나 바닥은 그것이 겪어온 시간을 느끼게 함. 그런 균열과 흔적은 마치 신체에 새겨진 흉터처럼, 불과 수십년 전의, 멀지않은 과거로 우리를 이끌고 그러한 상처를 낸 원인, 비나 바람같은 자연적것과 인간의 활동을 포함한 전체가 그 '장소' 에서 그 시간동안 계속 '있었다' 라는것을 말해줌. 콘크리트에서 살아왔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면 그런것을 느낄수 있지.
콘크리트 위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수 없을것임. 그들에게 그건 단지 경제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 비인간적인 기술일 뿐이지.
그러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콘크리트가 얼마나 따스한지를 기억함. 콘크리트는 많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고, 비열이 높다. 많은 열을 축적하고 서서히 식어감. 낮동안의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한 콘크리트가 석양지는 저녁에 여전히 따스함을 전해주는 느낌이 어떠한지 옛날 사람들은 알수 없음. 해가 지면 돌과 공기는 빠르게 식고, 아이들은 하루의 놀이를 끝내고 집에 가야하는 시간이 다가온단걸 느낌. 그때도 다른것들보다 여전히 따스한 콘크리트에서 인간이 느낄수 있는 감각은 단순한 온도가 아닌것임.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이해해 주기라도 하듯, 조금은 더 있어도 된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여전히 따뜻함이 남아있는 그 까끌까끌한 투박한 평면에서 느끼는것 말이지.
게다가 근대 건축물이 사용한 재료들은 실제론 영구적이지 않음. 콘크리트는 쉽게 부숴지고, 철은 쉽게 녹슬어, 오래된 아파트들을 보면 알수 있음. 비바람이 콘크리트에 새긴 균열과 얼룩, 녹슨 볼트에서 흘러내린 붉은 자국. 나무나 흙같은 자연적인 재료는 건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며 파괴되지만, 근대적 재료는 기능을 유지한채 서서히 파손됨. 손상되어가며, 낡고 지쳤어도 거기에 여전히 서 있는 근대 건물보다 더 시간의 흐름을 잘 기억하는 건물은 없어.
콘크리트와 철과 페인트, 근대적 재료들로 지어진 건물을 유심히 관찰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유한하고 약하고 인간적인지 느낄수 있음.
결국 내가 보기에, 근대 건축과 공간론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지극히 근대적임. 마천루에서 내려다 본 잘 분절된 뉴욕 시내가 만족시키는 전지전능한 관음자의 시선,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찰자의 시선은, 비근대인의 입장에서 근대건축에게 다시한번 반복될뿐임. 삶의 한복판에 있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관찰자로서 평가하는 객체로서의 건물과 공간으로써. 비판자들은 근대건축이 인간과 공간, 인간과 건물 사이의 관계를 배제시켰다고 말함. 그들은 근대건축이 시각중심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태도로 이상적인 균일공간을 추구하고, 그런 이상적 공간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있어야 할' 인간을 도외시했다고 말함.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음. 모든 근대건축이 이상적 공간을 추구하 며 인간과 분리된것은 아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엄격하고 장대한 직선은 당대인들의 보편 공간에대한 추구를 상징하는것이 아님. 왜냐면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와 당대인은 다른것이기 때문임. 건축가가 무엇을 추구하며 그 건물을 지었든, 실제 그 건물에서 살고 일하고 그 건물을 바라보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그들은 보편공간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마천루가 상징하는 발전된 삶과 그 속의 자신을 느낄뿐임. 누군가는 매일 그 건물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누군가는 매일 그 건물을 올려다보며 꿈을 꾸고, 누군가는 그 건물을 올려다 보며 비참함을 느끼겠지. 무엇을 느끼든, 사람들은 느끼고있음. 그 건물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비평가들은 건축가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 하고있음. 실제로 그 건물을 '장소' 로서 활용하고 체험하는것은 단 한명의 건축가가 아니라 수만 수십만의 시민들임. 건물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결정하는것은 바로 그 수십만의 시민들인것임.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아쉽게 느낀것은 건축미학에서 다루는 건축물이 대부분 (어느정도는 예술가의 경계에 있는, 이름있는)건축가의 작품이라는것임.
이것은 내기보기엔 예술가와 그 작품이라는, 전통 예술관과 미학을 탈피하지 못한것임. 예술가를 자처하는이가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에 함의된(거의 대부분 작가에 의해 의도된) 철학적 담론을 전개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비판한 근대 스타일 그 자체가 아닌가?
인간으로부터 격리된 보편공간에대한 추구는 근대적 편협함으로 보면서, 여전히 그들은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지어진' 의도에만 반응하고 있음.
내가 보기엔 그것 역시 대부분의 인간 삶으로부터 분리된 이데아적인 무언가, 이성중심적인 무언가임.
그들에게 수많은 무명의 건축가들, 그리고 그들을 고용한 시민들이 만들어낸 도시 전체는 단지 근대성이 드러날때 예시로서 비판될 대상일뿐, 미학을 논해지는 대상이 아님. 실제 인간이 상호작용한 의미있는 공간으로서의 장소를 논하면서, 정작 그들이 주제로 삼는것은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나 스티븐 홀의 스트레토 하우스같은, 도시로부터도 시민으로부터도 삶으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는 상징물들임. 나는 이러한 미학이 전통적인 방식이며, 이것이 전부 배격되어야 할것은 아니지만, 건축에 대한 미학은 도시 전체로 확장되고 삶으로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함. 훌륭한 예술적 감각과 지성의 상징인 개별 건축물만을 탐구할것이 아니라, 이름모를 누군가들에 의해 지어지고 형성되고 변화하고있는 도시 전체, 그리고 그 전체의 일부분들, 그것들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작용하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말해야 한다고.
간만에 건축글 독갤에서 읽었네요 잘읽었습니다!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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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소외되지 않은' 이라는 관점에서도 도시는 건물에 비해 관심을 덜 받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도시를 바라봐야 할 다른 이유들이 더 있다 생각함. 예를들어 건물은 건축가의 의도가 반영된 예술적 창조행위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 그리고 전통예술의 방식은 대체로 이렇게 '예술로서 창조된' 이력을 가진 창조물에만 예술작품의 지위를 부여하는것이었음. 자연발생적이거나, 창조의 의도로 창조된것이라는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창조물로서의 예술품의 지위를 얻지 못했던거지. 뒤샹의 '샘' 은 역설적으로 예술과 미학에서 그러한 창조 의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함. 공산품을 사서 사인을 하는것에 지나지 않는 행위지만, 그럼으로서 변기는 작품이 되었지. 작가가 대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상의
일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이름을 지어주었을때 비로소 변기는 그런 일련의 행위를 통해 의도적 창조물이 되어 예술작품이 되지. '샘'이 함의하는바는 많지만, 여전히 비평가들은 '어떤식으로든 예술적 의도로 만들어진' 것들에만 집중하는것같음. 이론가들의 태도가 이렇다면, 샘의 의미는 단지 '직접 제작하지 않은것도 예술이 될수 있다' 라는 수준으로 좁혀지고 말게 됨. 그러나 나는 모든것이 미학적 대상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미학의 담론은 너무 협소하다고 느낌. 도시는 개별 건물과 달리, 수많은 서로 다른 의도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만들어내는것이지. 따라서 개별 건물에 적용되는 하나하나의 의도는 전체 도시의 규모에 희석되고, 도시는 인공물임에도 마치 자연물처럼 자연의 원리를 따르게 됨.
이렇게 만들어지는 시스템은 높은 다양성과 복잡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다양성과 복잡성으로부터 나는 인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의미들을 발견할수 있음. 예를들어 사람들은 서울이란 도시가 미적으로 형편없다고 말함. 물론 나도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함. 서울은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없고, 전체적인 미적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 만든듯한 난잡함만이 존재함. 그러나 그런 추함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잘 계획되고 통일성 있는 도시에서는 발견할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음. 2010년대에 세워진 원룸과 80년대에 지어진 단독주택이 불과 3미터 거리를 두고 같이 있음. 플라스틱 빠께스와 석면슬레이트, '노출 콘크리트' 같은 정제된 방식이 아닌, 말그대로 돈이 업어서 쎄멘 미장으로 마감한 담벼락. 이런 근본없이 추한것들이 도시의
귀퉁이들을 채우고, 조금 더 경제적인 기대가 반영된 장소에는 조금 더 돈을 쓴 건물들이 들어섬. 그러나 그 건물들 역시 '이제 막 미개인을 벗어난듯한' 느낌을 지우진 못함. 교양인의 취향으로서의 미학이라기보단, 졸부의 상류층 모방에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미적감각이 적용된 건물들. 추함과 근본없음을 가리는 기능만을 겨우 할뿐인 껍데기들이지. 양식을 찾아볼수 없거나, 양식이 적용되었다면 정신적 깊이 없는 모방에 불과한것들....만약 이 도시가 어떤 개인의 작품이었다면, 이건 그야말로 빵점짜리임. 그러나 도시는 개인의 작품이 아니지. 도시는 긴 시간동안 다양한 의도가 새겨진 기록임. 이 도시의 근본없음은, 이 도시를 세운 사람들이 그야말로 무에서 시작했다는것을 보여줌. 그들은 미적 취향이란것을 만들수 있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 못한채 성장했음. 플라스틱 빠께스를 가진 노인들과, 90년대의 미적으로 어설픈 공공기관을 세운 장년들, 콘크리트에서 태어난 90년대, 커튼월에서 태어난 2010년대생이 한 도시에 있음. 극단적인 수준의 경제적 발전은 이 도시를 고도로 시간적으로 압축된 기록물로 만들었음. 미적감각을 가질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의 생존을 도모했던 세대들과, 그들이 남겨놓은 도시의 토대들이 바스라져 가는 가운데 새로운 (여전히 어설픈)양식들이 적용된 건물들이 올라가고있음. 이 도시는 하나의 작품으로 보자면 어떤 패턴도 없고 통일성도 없는 쓰레기임. 하지만 도시는 작품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수백만의 삶의 기록임. 의지와 희망과 투쟁, 삶이 반영된 축적물로서의 도시는 어떤 생김새를 가졌든 아름답기 그지없음.
서울은 일관성이 없는게 아니라, 난잡하다는 일관성을 가진거지....그것은 많은것을 의미함. 이 나라의 급격한 경제발전, 과거와의 단절, 그 속에서 느끼는 개개인의 정체성 아노미, 그리고 압축발전의 부작용들....파리에 예술이란 이미지가 따라붙고, 뉴욕은 근대와 자본주의란 이미지로 대변된다면, 서울은 또다른 이미지를 대표하는 도시일수 있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국가, 사회, 인간이 가질수 있는 형태의 하나로서. 현대인은 무엇인가? 우린 누구인가? 파리를 보아도 어떤 답을 얻을수 있고, 뉴욕을 보고도 어떤 생각을 할수 있지. 그리고 서울은 그런 질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답중 하나일것임.
난 예술로부터 우리 자신에 대한 많은것을 알수 있다고 생각함. 그게 내가 건물보다 도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임. 어떤 위대한 작품은 시대의 상징이지만, 도시는 시대 그 자체니까. 상징은 실재의 재현일 뿐이지. 이 책에서 근대건축의 비판자들은 근대건축이 단지 이상공간을 재현하는데만 급급하다고 말함. 그러나 내 눈에는 그런 비판자들조차 단지 시대를 재현할뿐인 '예술건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임. 재현물이 아닌 실재 자체, 즉 도시와 시대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말이지.
재미있네. 난 건축가도 예술가도 아니지만, 아름다운것을 좋아하고, 점점 더 일반적으로 아름답다 평가되지 않는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음. 때로 길가의 담벼락이나 아파트 옥상의 구식 안테나가 눈길을 사로잡아. 그것을 계속 보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매혹을 느낌. 왜 그것이 특별한 느낌을 주는지, 내 시선을 잡아 끄는지 그자리에서 설명할수 없고 그렇기에 더 관심이 끌림. 난 몇년동안 매일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이 도시를 잘 관찰할수 있었음. 내가 가는곳은 도시의 밝은 부분이 아닌 귀퉁이들이지. 스카이라인으로 대표되는 도시의 정면, 파사드가 아닌 구석들. 그것은 외부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임. 점차 나는 그런 공간들에도 참을수없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느끼게 됨.
밝은 정면과 어두운 귀퉁이를 포함한 도시 전체를 나는 긍정하지만 특히나 어둡고 낡은곳을 더 소중하게 생각함. 왜냐면 그것들은 곧 사라질테니까. 이전 시대의 삶들과 함께 곧 영원히 사라질 양식들이지. 어쩔땐 매우 오래된 아파트의 층고나 내부공간이 엄청나게 낮고 좁다는 사실에 충격을 느낌. 그 공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 그들이 느끼는 공간의 감각은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것과는 완전히 달랐겠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시대와 삶이 곧 끝나려 하고 있음.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채 다음 시대로만 내닫고 있음. 난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싶음. 그리고 그런 사라져가는 것들을 포함한, 내가 느낀 도시 전체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싶음.
사진도 영상도 만들줄 모르지만 몇년이 지나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하게될지도.. 나는 예술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다름. 미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면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미학적 사유의 대상이 됨. 그것이 제도권 비평가들에게 인식조차 되지 않더라도. 사실 사람도 그렇잖아. 수십억명이 살다가 죽지만 남에게 기억되는 사람은 극소수지.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다고 해서 살지 않았던건 아님. 예술도 미적체험도 어디에나 있음. 단지 기억되지 않을뿐.
그런데 도시전공이란건 뭘 말하는거임? 도시공학, 도시설계같은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