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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각자 살던 배경이 달라서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다. 나는 개성들 속에 치이며 어떤 개성을 가져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냉철하고 지적인 이미지도 취해보았고, 뜨겁고 감정적인 이미지도 시도해 보았지만, 내게 딱 맞는 옷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내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 지경이 됐다. 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을 읽으며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던 것이 흔들릴 때의 혼란이 그대로 전해졌다. 치밀하다 못해 집요하다 싶은 심리 묘사는 독자의 뇌리에 퇴를레스의 감정을 정교하게 재현한다. 처음에는 굉장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퇴를레스가 엮인 사건 자체가 비범하고, 퇴를레스만큼 고집을 부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거리가 전개될수록 혼란에 잠기는 퇴를레스를 점차 이해하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공감하기까지 했다. 퇴를레스의 여정은 전형적이지 않지만, 퇴를레스가 겪은 마음의 변화는 어쩌면 전형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퇴를레스는 특성이 없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에 퇴를레스는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만큼이나 특징이 뚜렷하다. 퇴를레스는 기존에 살던 세계, 즉 이성의 세계가 옳다고 확고히 믿는다. 이 옹고집 때문에 불쌍한 공자를 괴롭히기까지 한다. 일탈을 꿈꾸는 일반적인 청소년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퇴를레스가 불가능한 인물상은 아니다. 퇴를레스는 한편으로 다른 세계를 내심 동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과 어울리지 않는 합석을 계속하는데, 퇴를레스가 또래들과 동질화되기를 내심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퇴를레스는 자신이 알던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지만, 내심 그 세계를 무너뜨릴 체험을 원한다. 퇴를레스는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지 혹은 자기가 꾸며낸 것이 자기 자신보다 더 진실된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지점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이네베르크에게 한 말이지만, 작품 전체를 보면 이성의 세계를 믿는 것인지 믿고 싶어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퇴를레스 본인에게도 철저히 해당하는 말이다.


퇴를레스는 소원대로 자신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체험을 계속 겪는다. 퇴를레스는 보체나를 통해 학우들의 비상식적인 언행을 듣는다. 라이팅의 속물근성을 눈앞에서 보고, 바이네베르크의 심취와 우스꽝스러운 실패도 본다. 결정적으로 추한 마조히스트 바지니를 본다. 퇴를레스는 이들을 단호히 떨쳐내지 못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자신이 알던 세계와 극도로 다르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며 퇴를레스는 자신이 옳다고 믿던 것을 의심한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개념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포착하려 노력하지만, 그것들을 규정할 말조차도 찾지 못한다. "그것은 사물들과 사건, 인간을 어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로 느끼는 일종의 광기처럼 퇴를레스를 덮쳐왔다. 어떤 발명가들이 힘을 써 단순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무해한 단어로 결박해놓은 어떤 것으로, 하지만 동시에 매 순간 그 상태에서 금방이라도 벗어날 것 같은 완전히 낯선 어떤 것으로서 말이다."


퇴를레스는 새로운 세계에 끌린다. "어떤 낯선 세계로 향하는 눈. 나는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난 그걸 내 안에 삼켜버리고 싶은데..." 퇴를레스는 자신의 의지가 썩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바지니에게 성적 충동을 느낄 때 퇴를레스는 호기심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추악한 모습이었지만, 분명히 자기 모습이었다. 바지니를 둘러싼 사건들에 침묵하는 것 자체가 추한 일이기도 했다. 퇴를레스의 관심사는 혼란을 겪는 내면이라지만, 혼란을 야기하는 외부의 사건에 침묵해서도 안 된다.


퇴를레스는 결국 스스로를 해방한다. 이전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공존하도록 했다. 퇴를레스가 마지막에 이른 결론은 이 문장에 녹아있다. "그렇다, 죽어 있는 생각과 살아 있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빛나는 표면 위에서 움직이며 언제든지 인과관계의 끈을 따라 다시 검토 가능한 생각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이런 도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생각은, 행군 대열 속의 병사들 중 아무개처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의 머릿속을 지나갔던 것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생각이 아닌것,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은 무엇인가가 그 생각에 합류해, 그 어떤 합리화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 진실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살아나게 된다. 위대한 인식은 절반만 뇌의 밝은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나머지 절반은 깊은 내면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이루어진다."


퇴를레스가 신봉하던 이성의 세계는 모든 것이 도덕률 아래에 연결된다. 설명 불가능한 것은 없다. 그러나 퇴를레스가 성장하며 접하는 세계는 계속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퇴를레스 본인 안에서도 그런 것을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을 부정하기 위해 이성을 굴릴수록, 처음부터 포착할 수 없는 것을 잡기 위해 이성은 헛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별개의 영역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두 영역 중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믿는 바가 무조건 옳으니 무조건 실현되리라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결단대로 하되, 자신의 결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 놀라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혼란을 해독할 수 있다.


작중에서 좋은 비유로 허수 이야기가 나온다. 음수의 제곱근 i는 눈앞에 구현된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수학자들은 이 숫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책의 표현을 빌면, 마치 첫 교각과 끝 교각만 있는데도 다리가 거기 있기라도 한 듯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건너가는 그런 다리 같다. 퇴를레스는 허수의 존재에 당황한다. 수학 선생은 이런 퇴를레스에게 명료한 처방을 내린다. "그렇게 이해되지 않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런 필연성에 따라 행동하는 걸세." 세계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삶에 뛰어든다. 그러나 세상은 번번이 반례를 가져온다. 실패 앞에서 사람은 무력해지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지 못해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을 막는 방법은 단 하나,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세계를 확장하는 일을 포기하고 여러 세계를 갖는 것이다. "아마도 전 그것들을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볼 것입니다. 때로는 오성의 눈으로, 때로는 다른 눈으로...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그것을 서로 비교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일을 포기해도 좋다는 뜻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퇴를레스는 결국 바지니를 설득해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실현했다. 일이 잘 풀리되 퇴를레스가 애당초에 설계한 방향으로 풀리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것이 핵심이다. 세상은 끝까지 퇴를레스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퇴를레스는 대상이 애초에 자신 바깥에 있다는 점을 직시하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퇴를레스가 겪던 문제는 한 세계 내에서 충돌하는 관념들에서 유래했다.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니 오히려 퇴를레스는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했다. 퇴를레스는 태도를 바꾸어서 이성의 세계에서 비이성적인 세계에 한 방 날렸다.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두 세계를 분리하는 순간 자신이 할 일이 분명해졌다. 문제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돌리고, 안으로만 향해있던 눈을 밖으로 돌리니, 퇴를레스는 지적으로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사람은 생각만으로 살 수 없다. 직접 삶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일일이 억지로 내면에 구겨 넣다가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은 삶에 직접 다가오는 문제들을 사변적으로만 보지 말고 실천적으로도 바라봐보라고 요구한다. "체험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에 이처럼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한 사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 총체적인 것으로 의심 없이 체험되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항상 갖고 있을 수 있도록 생각의 사슬로 묶어두려는 순간,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럽게 되어버리는 일이 언제나 벌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가 멀리서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는 동안에는 위대하고 인간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의 행동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단순해지고, 불안하게 하던 요소는 사라져버린다."


다시 내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자. 나는 그때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것을 잡아먹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아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남았고, 그 사실이 나를 굉장히 우울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옳다고 믿던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퇴를레스와 달리 나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따라가는 것을 택했다. 내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를 유일한 세계로 채택하여 안에서 길을 잃는 우를 범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삶과 생각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고 나는 내 삶을 살면 되는 쉬운 문제였는데 말이다. 물론 이 답도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을 읽지 않았더라면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을 살며 성장하는 과정을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는 과정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재고할 시간이 온 듯하다. 나의 진리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다른 세계의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나는 나의 진리를 계속 좇으면 되지 않을까. 하나의 세계, 정반합의 세계가 혼란스럽다면, 차라리 이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삶은 계속 나의 생각을 흔드는 재료를 공급할 것이다. "삶은 마법의 바퀴처럼 돌면서 항상 새로운 것,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쏟아낸다." 나는 그 재료를 다 쓰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다 못 쓰기 때문에, 그리고 남의 요리에 넣어야 마땅한 재료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은 이렇게 퇴를레스의 혼란을 통해 내 혼란을 해독했다. 이제 내 세계로 포착할 수 없는 비이성의 세계를 기꺼이 체험해 보고 싶다. 로베르트 무질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줄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