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이 질문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함. 언뜻보기엔 정보철학이라는것은 뻔해보임. 왜냐면 우린 정보라는 말도, 철학이라는 말도 대충 알고 있으니까. 정보에 대한 철학이 정보철학이겠지. 생물철학이나 법철학처럼, 정보에 대한 응용철학이지 않겠나. (물론 해당분야 종사자들은 그게 응용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님. 이 책의 저자는 정보철학을 모든 철학에 우선하는 혹은 토대가 되는 제1철학으로서 구상하고 있음.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임.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정보철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장르나 범주를 묻는 질문으로 단순화 되지 않음. 정보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보라는것의 특별한 성질에 대해 이해할때 대답할수 있는것이고, 정보의 성질을 알게 될때 정보철학의 철학적 위치에 대해서도 알수 있게 됨.
정보가 왜 중요한가? 이 책에선 다양한 이유, 즉 사회적 변화부터 순수한 (이를테면 의미론적이거나 논리적인) 철학적 의미까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날 정보와 관련된 변화를 근거로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 이것은 정보철학의 입문서로서는 물론 적절한 안배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 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보통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철학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것만으로는 정보철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전달할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임. 예를들어 구글이 데이터과학자를 얼마나 고용하였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보통사람들에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이야기겠으나, 좀 더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사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경제적 현상' 일 뿐이겠지.
전공이나 직업을 막론하고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철학인이라고 하겠음.
왜 정보철학은 철학인에게도 중요한가? 구글이나 빅테크기업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상관 없이?
왜 정보철학은 철학인에게 특별히 더 중요한가? 그러니까 정보철학의 지지자들이 '정보에 대해 아는것은 칸트나 플라톤을 아는것보다 더 중요하다' 라고 말할때 그것을 미친소리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보자. 이것은 저자의 직접적 주장은 아님. 저자는 단지 정보혁명과 관련된 여러 지식들을 제시해줄뿐임. 그러나 서문과 1장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의도, 그리고 정보철학을 제1철학으로 하는 원대한 구상과 그것의 텍스트화 계획(그 첫단계가 바로 이 '입문'임.)을 보면(해제에 설명돼있음), 저자 역시 분명하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나는 느낌.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상관없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심리철학에서 시작하는것일것임.
다수실현은 무엇인가? 어떤 마음, 혹은 시스템이 서로 다른 물리적 기반에 의해 실현될수 있다는 성질임. 똑같은 컴퓨터 시스템이 진공카드로도, 천공관으로도, 반도체 트랜지스터로도 실현될수 있음. 마음도 마찬가지고. 마음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마음의 이런 성질에 주목함. 물질에 기반하긴 하나, 물질에 의존하진 않는 성질. 물질은 그것이 구현되기 위한 장치이지만, 개별 물질의 물성이 아닌 그것들의 관계로부터 마음이 나타남. 철학자들은 이것을 기능이라 부르기도 하고, 시스템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쨋든 중요한것은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물리적인것들의 성질과는 매우 다른 성질이란것임. 이를테면 물건 a로부터도 물건 b로부터도 같은 시스템 x가 나타난다면,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인과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임. 일반적으로 인과는 하나의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연결되는것을 말하지. a->x에 일대일 대응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인과가 아님. 적어도 물리적 인과는 아닌것이지. 심-신 관계라고 할수 있는 이 철학적 문제는 의식의 주관성과 함께 철학자들을 괴롭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것임. 수많은 철학적 논쟁이 오가고, 결과적으로 학자들은 마음이 몸의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는것에 대체로 동의했음.
이것은 일반인의 직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임. 왜냐면 우리가 생각하거나 느끼는것이 우리를 움직이고, 다시 우리 자신은 환경의 영향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다고 우리는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진리로 인정하고 있는 유물론(심리철학에서는 물리주의라고 부름) 세계에서 마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것이 판명됨. 왜냐면 우리는 외부의 세계(물리적)에 영향을 받고 뇌가 작동하고(물리적) 행동(물리적)하여 다시 외부에 영향을 주기때문임.
환경-뇌-행동-환경만으로 물리적 인과는 완전해지고, 마음이 끼어들 인과적 자리는 존재하지 않음. 오히려 마음이 끼어들면 문제는 복잡해짐. 왜냐면 마음이 뇌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어디에 '존재' 하는지 설명할수 없기때문임. 우리는 환경이 뇌와, 뇌가 신체와, 신체가 환경과 어떻게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 알고있음. 그러나 뇌는 어떻게 마음과 상호작용하는가? 데카르트의 송과선 드립을 포함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문제는 해결된적이 없음.
언뜻보면 문제는 간단해보임. 우리 신체가 받아들인 감각에 의해 활성된 뇌 상태가 마음이다라는 설명은 일상경험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그럴듯해보임.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음. 분명 우리의 마음은 외부를 반영하는듯 보임. 내가 느끼고 있는 이미지는 눈이 포착한 세계의 가시광선이 뇌에서 적절하게 처리된 것이겠지. 그렇다면 내 마음 안에 담긴 '상' 은 외부에 대응하는것임. 즉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외부에 대응하는듯 보임. 그러나 이것만으로 마음과 뇌는 상호작용한다고 할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상호작용은 '상호성' 을 포함함. 입자 a가 b에 영향을 줄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함. 작용방향의 대칭성이 있는게 물리적 상호작용임. 그렇다면 외부의 영향을 받는 마음은, 역으로 외부에 영향을 끼치는가? 이 역시 직관적으로, 일상경험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음. 왜냐면 실제로 우리가 외부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근원은 뇌기때문임. 우리의 운동을 통제하는것은 뇌지 마음 자체가 아님. 그렇다면 뇌는 마음의 영향을 받아 작동하는것인가? 그렇다면 뇌는 마음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우리가 아는 한 이 세계의 인과적 상호작용은 전부 물리적인것임. 그렇다면 마음의 영향을 받는 뇌는, 마음과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이야기가 됨. 그러나 마음에 물리적인것이 있나? 우리의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물리적인것은 뇌임. 뇌의 신경이 발화하는 방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일의 전부임. 결국 마음은 존재할곳 없게됨. 외부-뇌-외부만으로 모든 행동이 설명되고, 인과사슬은 폐쇄됨. 인과사슬의 폐쇄된다는 의미는, 모든 원인은 뒤따르는 결과를 사슬로 갖는단 뜻임. 그런 사슬들은 무수한 연결의 결과 닫힌 연쇄를 형성함. 모든 원인은 결과가 있으며,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짐. 결과를 갖지 않는 사슬은 존재하지 않음. 우리의 물리세계는 그렇게 인과적으로 닫힌 세계임. 외부의 영향을 받는 마음은 무언가를 원인으로 두지만, 결과를 만들진 않음. 이것은 사슬의 열린부분임. 다음 사슬이 존재하지 않는 사슬이지. 영향받지만 영향주지는 않는 이 기묘한 관계를 철학자들은 수반이라는 말로 미봉할수밖에 없었음. 역사적으로는 더 다양한 이론이 있었음.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라든가. 물질과 마음 둘 다 최초에 신이 계획한대로 흘러가며, 둘은 상호작용하지 않지만 똑같은 계획으로 움직이기에 일치한다는 이론임. 어쨋든 근대인들도 마음을 물리적인것으로 볼수 없다는것을 알수 있었음. 그리고 여전히 이에 대해 철학자들이 제시한 방법은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물리학에서는 관찰되지 않는(애초에 가정하는것 자체가 비물리적인) 수반관계임.
이런 곤란한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법은 차치하고 방향성만을 보자면 크게 세가지 해법이 있을것임.
1. 물리학이 틀렸다. 우린 더 발전된 물리학을 갖게될것이다.
2. 물리학은 맞지만 세상엔 비환원적인 관계란것이 있다.
3. 물리학은 맞고, 마음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을뿐이다. 마음을 더 알게 되면 환원적인 물리학으로 설명할수 있다.
1번은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고 지지하는사람이 별로 없음. 2번은 비환원적 물리주의라 말하고, 기능이나 성질같은것들은 '속성' 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함. 이들에 따르면 마음이나 기능, 빨갛다 같은 주관적 성질등은 속성이며, 물질적인것과 같이 세계의 근본적인 요소임. 둘은 다른것이기에 이원론이라 할수 있음. 예를들어 차머스가 일종의 속성이원론자임. 3번은 대닛같은 사람이 주장하는것이며, 마음이나 의식에 대해 우리가 아직 너무 몰라서 착각하는것이라는 주장.
무엇을 선택하든, 결국 마음에 대한 이해는 물리학에 대한 입장을 포함하는것임. 다시말해서, 마음이란 시스템에 대하여 논한단것은, 물리학이라는 매우 근본적인 논의를 포함한단 것이고, 그렇기에 마음철학은 단순히 세계의 한귀퉁이에 존재하는 특정 대상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토대와 맞닿아있는 중요한 문제라는것임. 그리고, 마음이 바로 정보적인 현상의 대표격이라는것을 생각해 보면, 정보에 대해서 깊이 이해한다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것인지를 알수 있음.
존재론을 따져보자. 역사적으로 존재함에 대하여 많은 주장들이 있었지만, 근대 이후로 존재는 물리적인것이거나 감각가능한것으로 간주되었음. 그러나 정보적인것은 물리적인것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음. 공간을 점하지 않고, 기반의존적이지 않음. 어쩌면 그건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나타나는것일지도 모르지.
대체 존재한다는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우리가 확언할수 있는 존재함이란것은, 그것을 어떤식으로든 감각으로 변환할수 있다는 이야기지. 전자의 궤적을 포착한 안개상자의 방식처럼. 그리고 감각으로 변환한단것은 물리적인 성질이 있단것이고,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성질이 존재한다는것이 바로 존재한다는것과 같은것이며, 일반적인, 상식적인 의미에서 존재한다는것은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는 의미임.
그런데 이 물리적 성질은 다시 존재의 범주 자체와 동일시 될수 있음. 왜냐면 사실 존재의 구분은 다른 성질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임. 양성자와 전자가 다른 범주의 존재인 이유는 둘이 다른 전기적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지. 사실 이것조차 거꾸로 된 서술이고, 사실은 어떤 전기적 성질을 가진 무언가가 전자로 정의될뿐임. 우리의 직관은 존재라는것이 마치 칠하지 않은 건물처럼 있고, 그것에 성질이라는 페인트를 입혀서 세상을 이해하고 구별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실제로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음 그뿐이지. 다른 성질 그 자체가 존재의 유일한 구분가능성이고, 이것이 물리학적인 존재인것임.
그런데 정보적인 존재는 이와 다름. 물리적인 존재의 성질은 고유하고 유일함. 다른 행동을 하는(=다른 성질을 가진)존재는다른 존재이기 때문임. 그러나 정보적인 존재는 이런 방식으로 분류할수 없음. 다른 구조를 지닌 같은 기능을 하는 시스템이 가능함. 이것은 너무 크고 따라서 착각할 여지가 많은 예시일까? 그럼 훨씬 더 단순한것을 생각해보자. 정보란 본질적으로 의미론적인 데이터이며,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균일성의 결여(lack of uniformity)로 정의될수 있음. 무언가와 구별될수 있는 무언가, 즉 다름이 있을때 균일하지 않음이 발생하고 거기서 데이터가 발생할수 있음. 다시말해서 데이터 그리고 정보는 존재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단지 다름과 다른것들의 관계로부터 나타난다는것임. 예를들어 우주공간에 단 하나의 입자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입자인지는 그 입자의 고유한 성질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지만, 정보는 그 고유한 성질과 관계 없이 단지 진공과 입자의 다름, 균일성의 결여로부터 발생함. 어떤 입자든 상관 없이 데이터를 만들수 있지.
이런 성질은 정보가 물리적인것이 아니라 더 일반적이고 원초적인 우주의 성질(혹은 요소)중 하나라고 볼 이유가 되는것임.
위 주장은 주로 1~3장(특히 1장)의 내용에서 도출할수 있는것이지만, 이후의 장에서도 정보가 물리적인것과 다른 특별한 성질을 지녔다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함. 노버트 위너나 아치볼드 휠러는 정보가 물질, 에너지와 함께 우주를 이루는 근원 요소거나, 혹은 물질과 에너지보다 원초적인 무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나옴. 또 수학적 정보이론에서 계산할수 있는 정보의 수학적 구조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와 완전히 같은 구조라는 이야기도 나오지.
나는 복잡한 시스템과 구조, 추상적 형식에 많은 흥미가 있음. 그런것들의 구조나 성질뿐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예를들어 예술에서도 나는 회화나 조각보다 건축과 음악을 더 흥미롭게 느낌.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것들이 나에게 직관적으로 주는 만족감이나 영감이 더 많기 때문이지만,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때 회화나 조각보다 더 심오하고 숭고한 성질을 느끼게 됨. 음악은 패턴으로만 존재하지. 실물이란 없고 오리지널리티도 없음. 원본에만 존재하는 아우라도 없지. 그러나 존재하지. 건축은 어떤가? 음악처럼 계획된 추상적 구조이지만, 물리적으로 구현되지. 그러나 어떤 설계도를 구현할때 첫번째로 만들어진 건물이 오리지날일까? 이것이 아우라를 가지나? 이후 같은 설계도로 똑같이 지어진 건물들은 복제인가? 난 이런 생각들에서 건축과 음악이 가진 특별함, 구조, 아름다움, 그리고 존재한다는것의 의미를 깨닫고자 함. 예술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것이 정보적인것과 물리적인것의 결합으로 되어있음.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생명, 사회, 마음, 모든게. 그리고 나는 어쩌면 존재한다는것은 차이가 있다는것이고, 이 우주는 발생한 차이들에 의해 채워져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함. 물질과 에너지는 전체 존재의 일부에 해당하며, 더 근본적인 존재의 원리는 정보를 깊이 이해함으로서 가능할거라는 기대를 함.
이런 내 기대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음. 왜냐면 정보라는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만큼 모르고 있으니까. 철학자를 포함한 누구나 정보란 개념을 수없이 사용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진 못하지. 그리고 틀림없이 정보는 중요한 개념임. 어쩌면 모든 철학의 바탕에 세워질 기초일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사실 이제와서야 정보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기 시작한 철학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놀랍게 느껴짐. 우리는 이미 정보적인것에 너무 익숙하니까. 그리고 사실 세상 전체가 정보적인것으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우리의 관심과 이해는 너무나 부족하지.
덕분에 장바구니에 담음
정보... 너의 글을 읽어보면 나한테는 정보철학이라는 말은 존재론이나 인식론같이 극도로 추상적인 문제에서 약속을 몇개 추가해서 비교적 덜 추상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같은데 맞나 물론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어느정도는 맞음. 근데 나도 아직 직관의 단계라서 이렇다 할 말은 못하겠다. 단지 정보적인것들의 성질이 물리적인것들과 다르고, 이 질적인 다름, 간극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낌. 이 간극을 메우고 두 세계를 통합하고싶음. 그래서 그 통합의 원리로 정보를 생각하는것임. 이런 생각은 내가 예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같은 비전공자가 접할수 있는, 기본적으로 수십년 묵은) 기존 철학에서는 논해지지 않던것임. 그래서 나도 지식이 없음. 그러던차에 이런 책을 발견한거고 최근 학자들이 이런 논의를 하고 있단걸 나도 이제야 알게된거지. 이 이후로 플로리디나 기타 자칭 정보철학자들이 어떤 이론을 전개했는지는 나도 아직 모름. 나도 그저께 다 읽은거라.
현대철학의 강한 상관주의에서는 물리적 특성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하나의 속성 중 하나이고, 모든 개념은 사유의 요소로만 구성된다는 이론도 있는데, 정보 이론이 물리적 대상과 정보의 차이를 드러낸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물리적인 특성이 가진 특수성을 더 부각시켜서 생각하는것같은데 그 이유가 있나???
콤마 이후의 문장을 잘 이해를 못하겠음. 부각켜서 생각하는 주체가 누구임?
구매 마렵게 잘쓰네
근데 살거면 조금 미리 읽어보셈 책내용자체는 정보철학의 입문을 위해 필요한 기반지식 정도임.. 정보란 무엇인가 정도가 책 제목으로는 더 적당했을듯. 드문드문 철학적 사유로 도약할수 있는 문장도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는 철학이나 수학 생물학등에서 연구된 정보와 관련된 지식들임.
무한의 표상은 좋은 거시에오
님 대 푸가 좋아함? 대 푸가는 사랑이야
가장 좋아하는곡임
뭘 좀 아시네!!!
근데 그 곡을 처음 듣고 좋아하기까지 몇년이 걸림. 처음 들었을땐 단순한 소음과 혼란일뿐이었음. 난 꽤나 열려있는, 전위적인 예술도 이해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혼란과 고함이 그렇게나 따뜻하게 느껴진건 한참 후에
베토벤이 인간과 삶을 얼마나 긍정하고 사랑하는지 깨달음. 그렇게 힘든 삶을 산 사람이 그런 긍정을 할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때마다 감정이 북받쳐오름..
푸가라는 형식의 아름다움은 그 주제에 대한 반복과 재정립에 있다 생각하는데, 대 푸가를 들으면 격정적인 변동과 변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의 주제로 돌아오는 그 끈질김이 참 아름다움. 인간이 변화와 시련 속에서도 결국 스스로의 자아를 정립하고 찾아가고 선언하는 과정 같아서.
사실 난..푸가라고 이름 붙었지만 푸가라고 느끼진 못했음. 주제 자체도 듣기 좋은 멜로디가 아니고 난해한데, 진행마저 혼잡하니까 이게 어떤 규칙을 갖고 되풀이 되는것인지 아니면 단지 모티프의 파편들이 흩뿌려진 혼란에 불과한것인지 알수가 없었음. 하지만 대푸가에선 결국 모든게 되풀이되지. 정말 놀라운 방식으로... 그 아름다운 마지막 선율이, 맨 처음에 들었던 그 불길한 선율의 해결이라는게 놀라울 따름임. 사실 난 아직도 이걸 푸가라고 불러도 좋은지 모르겠다. 음악 형식에 대해 잘 아는건 아니지만, 이건 내가 알던 푸가랑은 다름..
오히려 내생각에 베토벤은 일부러 이 곡을 푸가로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것같음. 반복구조가 잘 느껴지지 않도록, 멜로디의 명쾌성이 낮고 진행도 변덕스럽게 썼다고. 그렇잖아? 이 곡을 처음 들을때, 처음 제시된 멜로디가 주제라는걸 깨닫는것도 힘들다고. 사실 그걸 멜로디라고 여기는것도 힘들지. 그건 단지 음표의 조합에 의한 소음일뿐. 그리고 곡 내내 이런 불길하고 불분명한 멜로디들은 해결되지 않은채 다른 마디로 이어짐. 이 곡에선 음악적 긴장이 해결되지 않음. 어쩌다 제법 아름다운 선율로 진행하며 긴장이 해결되려는것 같다가 갑자기 거품이 사라지듯 흐지부지되거나, 혹은 다른 주제로 튕겨나가 버리거나...그렇게 이 곡은 끊임없이 명쾌한 아름다움과 기쁨도 아니고, 분명한 비통함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불분명하고
흐지부지되는것들을 늘어놓고 던지고 치우길 반복하지. 그러는 동안 청자는 점점 지쳐감. 도대체 이것은 다 뭘까? 의미를 발견하려다가도 알수 없게 되어버림. 또 다른 마디는 또 그런식의 반복. 아름다워지려다가 말고,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는것 같다가 말고. 그러다가 갑자기 처음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등장하지.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울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그 마지막 멜로디는 그렇게나 불길하던 첫번째 주제와 두번째 주제의 변형이고, 또한 각각이 윗성부와 아랫성부에서 동시에 조화롭게 진행되며 곡 전체에 걸친 모든 긴장을 해소하며 마무리함. 난 이렇게 말하고싶음. 대푸가에서 진정한 해결은 단 한번 반복된다. 베토벤은 왜 이런 곡을 썼을까? 왜 아름답지 않은 주제로 아름답지 않은 곡을 쓴걸까. 15분 내내 긴장과 맥빠지는 해결과 불온함과 혼란을 경험케 하는 음악은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그게 바로 삶 아닐까? 베토벤이 말하고싶었던. 명쾌한 형식을 갖고, 분명한 이치에 따르는 고전음악은 마치 신화속 영웅담처럼 깔끔란 기승전결을 갖고, 그 안에서 모든것들은 논리에 맞고 조화로움.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잖아. 우리는 삶을 사는 그 순간엔 그 순간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좋은 일이 생기다가도 나쁜 일이 생기고, 세상이 끝날것 같다가도 갑자기 모든게 괜찮아지기도 하지. 운명이 있는가 싶다가도 모든게 아무 의미도 없는것같고. 우리의 삶은 그렇게 불분명하고 우리는 신화속 영웅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이 모든게 다 무슨의민지 혼란스러워 함.
나는 대푸가가, 그런 인간의 삶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함. 푸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 곡은 푸가라고 느끼기 힘듬. 이치와 규칙을 느끼기 어려우니까. 그래서 대푸가인것임. 우린 타인의 삶을(특히 이야기 속 인물의 삶을) 쉽게 '삶' 이라 말하고 거기에서 간단하게 이치와 의미를 찾아내지만, 실제 그 삶을 산 당사자는 무수한 혼란과 불분명한 느낌, 좌절과 고통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매 순간을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입장에서 겪어내었음. 우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이치를 통해 예상하지만 실제 삶은 그럴수 있는것이 아님.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 매 순간을 맞이하지. 그렇기에 우리는 이 모든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흐름 위에 있는지 알수 없음. 마치 대해에 표류하는
ㅇㅇ 동의해요 사실 대 푸가가 그 모호함과 복잡함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해석이 있긴 한데, 그 중심엔 흩어짐과 응집의 대비가 있다 생각함
나무조각처럼. 전체를 볼수 없으니까. 우리 주변엔 오르고 내리는 파도의 노이즈 뿐이지. 그러나 베토벤은 이 모든 혼란 속에도 하나의 그래프를 찾을수 있다고 말하는듯함.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던 주제가 실은 가장 아름다운 선율로 발전할수 있었던 것처럼. 곡을 끝까지 듣기 전에는 그 선율의 진정한 형태가 무엇인지 알수 없음. 마지막에서 베토벤은 그 모든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함. 우리의 삶은 그렇게 혼란과 소음 속에서 나아가며 불분명한것들을 분명하게 느끼고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 과정이며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답다고 긍정하는것이 베토벤이 대푸가를 통해 말하려 한 참된 의미라 생각함. 그렇기에 이 곡의 제목은 푸가처럼 느껴지지 않음에도 푸가였다고 생각함. 모든것을 다 듣고 돌아봤을때야 비로소 그게 푸가란걸 알게되지.
@beethoven 캬
마음은 무언가를 원인으로 두지만, 결과를 만들진 않는다고?>> 두뇌의 활동에 의한결과들: 시신경에 의한 전기자극으로 뇌세포의 활동증가= 에너지소비로 인한 발열 즉 외부엔트로피 증가, 반복된 외부자극은 특정 뇌회로를 강화시킴>특정행동의 원인이됨 뇌가 컴퓨터처럼 인풋이 아웃풋을 내는 수많은 경우들
마음과 두뇌는 다른것임. 니가 나열한 사건들은 두뇌, 즉 신경의 집합, 즉 물리적인것의 활동에 의한것이고, 본문내용에 설명되어있어. 그것만으로 인간이나 동물같은 시스템의 모든것이 설명됨. 영혼같은걸 가정할 필요가 없지. 마음도 마찬가지고.
컴퓨터가 마음을 가정하지 않고도 작동하고, 사실 그래야만 인과적으로 말이 되듯이...
ㄴ어.. 머노..두뇌가 없는 우주에서 마음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거냐
그건 아님. 마음은 두뇌나 컴퓨터같은 복잡한 구조에서 탄생함. 그러나 두뇌가 곧 마음이라고 볼수는 없어. 심신동일론 혹은 심신문제로 검색해보면 될거야.
그러면 마음은 두뇌의 활동으로 나타나는거라는거 인정한다면 두뇌가 결과를 만드는것 없이는 마음이 활동하지 않기때문에 마음도 결과를 만드는것임
마음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를들어 행동을 유발한다면, 결국 그 행동이란건 뇌에서 운동신경에 명령을 내림으로써 가능한건데, 그렇다면 결국 행동이란 결과의 원인은 뇌라는 물리적인것 아닌가? 그렇다면 마음이 뇌의 원인이 되는건가? 마음->뇌->근육 순으로 인과가 진행되나? 그러면 그 마음은 무엇을 원인으로 갖지?
물리적 인과 과정은 마음을 상정하지 않아도 진행됨. 그리고 마음이 물리적인것(이를테면 신경) 과 어떻게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할수 없음. 그렇기에 마음은 물리적인것이 아니고 단지 현상적인것임. 바이메탈의 기능을 생각해봐. 분명 바이메탈은 '특정 온도에서 장치를 정지시키는' 기능을 갖고, '특정온도에대한 지향성' 을 가짐. 그러나 그런 지향성과 기능은 물리적인것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물리적인것에 의해 '나타나는' 것일뿐임. 왜냐면 바이메탈의 물리적 작용은 단지 열팽창률이 다른 두 금속판의 겹침구조에 의해서 나타날뿐이니까.
물질과 마음의 관계는 일방성이란 측면에선 물체와 그림자의 관계와 비슷함. 그림자는 물체와 닮으니 상관관계가 있지만 사실은 일방적 인과관계만 있음. 빛이 물체에 가려져 만들어지는 어둠이 그림자지. 그림자는 물체에 원인이 되어줄수 없음. 물론 그림자와 달리 마음은 물리적인것조차 아님.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도 물리적 결과를 만들수 없음. 물리적 결과를 만드는것은 물리적 원인뿐임. 그렇기에 물리계 안에서 마음의 위치는 특별하고 수수께끼임.
바이메탈의 '기능'이 장치를 정지시킨 결과를 만든것이 아니야. 바이메탈이란 금속판이 구부러지며 특정 물체와 닿거나 떨어짐으로써 물리적인 변화를 만들어서 정치가 정지된거지. 즉 장치의 정지라는 물리적 결과는 금속판의 구부러짐이란 물리적 원인에 의해 나타난것임. 기능이란것은 단지 이 모든 현상의 총체에 대한 추상적 층위의 무언가일뿐임.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언어나 개념이라고, 심적인 무언가에 불과하다고 말할수는 없어. 왜냐면 바이메탈은 어떤 구조로도 가능하고, 그런 기능 자체를 물질과 분리하여 볼수 있기때문임.
그런 추상화, 찾아진 패턴 등 이 물질세계의 본질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들 - 총칭해서 이데아- 은 물질세계의 패턴과 질서를 강박적으로 발견하도록 진화된 인간뇌의 생리작용으로서만 물질세계에 존재함. 두뇌의 물질적 결과가 마음의 결과임.
빅뱅후 우주에 어떤 생명체의 두뇌도 따라서 어떤 마음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불가사의한 물질의 그림자인 마음이라는게 우주에 생겨난게 아님. 단지 어느순간부터 두뇌를 가진 생명체가 외부세계를 질서체계로서 두뇌속에서 모델링하기 시작했을뿐
넌 마음을 '수' 같은걸로 이해하나본데...완전히 틀렸어. 소프트웨어는 존재함. 마음이나 기능, 시스템등 추상적 층위의 것들은 '수' 나 '언어' 처럼 인간 정신이 자연을 자의적으로 분별하며 만든 심상인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 실재하는것임. 이데아도 아님. 왜 이데아라고 이해한건지 모르겠지만 정보적인것은 계산할수 있어. 본문에도 수학적 커뮤니케이션이론에대해 말하고있고. 그리고 오늘날의 의식이론중엔 iit, 통합정보이론이라 해서 의식을 고도로 통합된 정보흐름으로 보고 측정가능한 대상으로 다루는 시도도 있음.
내가보기에 넌 물질만이 존재하는것이라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맞나? 그 외의 모든것은 두뇌가 발견하는 패턴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그런 생각이야말로 인간 두뇌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임. 결국 물질이란것의 존재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은 두뇌가 진화해 온 역사동안 경험한 감각세계에 대한 믿음에 기반할뿐임. 너는 소위말하는 실재론자, 특히 소박한 실재론과 유물론을 동시에 믿는 사람이겠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물들, 이것만이 실제로 존재하는것다라고. 그리고 그 근거로는 그것들이 우리와 상호작용할수 있다는것.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봐. 너는 전자의 존재를 직접 감각한적이 없음. 그러나 그런 존재를 받아들임. 그 이유가 뭘까? 과학을 믿기때문임. 과학에서 전자는 측정되고 양화되어 다룰수 있는 존재로서 감각되었고 그 확장된 감각으로서의 과학을 너는 믿는것임. 그 누구도 중성자를 직접 감각할수는 없으나 물리적인과와 논리적인과가 결합된 인과의 연쇄를 통해서 자신의 감각을 믿을만하게 확장하여 중성자과 관련된 물리적 인과와 나의 감각이 마침내 연결된다 생각하는거지. 그렇다면 같은 방식으로 정보적인것들을 양화하고 측정하고 그것들의 인과를 파악한다면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할수 없는 이유가 뭐겠음?
예를들어 ToM 처럼, 한 마음 시스템이 다른 마음 시스템의 상태를 파악하는 능력을 생각해보자고. 이건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거야.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다른 마음시스템의 상태를 파악해야한다면, 그 무수한 신경의 발화와 연결을 파악해야 한단건데 그게 가능하겠어? 불가능함. 실제로 우리는 다른 존재의 의도를 어느정도 파악할수 있는데 그건 그 존재의 물리적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가능한게 아니라 심적상태를 파악함으로써 가능한것임. 극도로 복잡하고 많은 정보량을 지닌 물리적 상태와 달리 마음상태는 그 물리적인것들의 전체적 경향성으로 압축되며 적운 정보량을 지님. 그 물리시스템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한지와는 상관 없이, 물리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 총합은 결국 단순하게 요약가능한 하나의 행동 혹은 경향을 형성함.
이 한 층 위의 패턴은 시스템의 부분부분, 즉 모든것의 정보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시스템의 정보를 담고있음. 그리고 복잡한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이런 부분을 능가하는 전체로서의 창발성이 더 많이 나타나지. 돌은 어느 특정 부분을 보고 안 사실을 전체에 적용해도 되고 전체는 부분보다 특별히 흥미를 끄는 점이 없지. 반면 생명은 부분부분은 작은 일을 수행하나 그 일들이 모여서 기묘한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전체를 갖추게 됨. 결국 시스템 전체가 외부와는 다른 자신만의 규칙과 경향성을 가지고서 무언가를 해내는 능력을 갖는것은 부정할수 없음. 그건 존재하는것임. 복잡한 시스템은 (물리세계의 법칙에 따라서) 바텀투탑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만 마치 탑투바텀방식으로 만들어진듯 행동하고 가능함. 이런 성질을 무시하고는 자연을
이해할수 없음. 왜냐면 그런 복잡한 시스템들은 그런 기능, 그런 경향성을 띠는 방향으로 발전해가기 때문임. 그렇게 충분히 발전한 시스템은 기능을 말하지 않고는 이해할수 없는 것이 됨. 기능이야말로 그 시스템 전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성질이기 때문에. 자연에대한 진정한 이해는, 물리적 구성요소의 가장 작은 부분의 작동까지 이해하고, 기능적 차원의 행동을 이해한다음, 이 두 극단을 통합하는것임.
@beethoven 글잘쓴다 개추
어렵다 - dc App
좋은 리뷰 감사. 이런 정성스런 리뷰가 서지정보에 있어야 하는데....
먼가 러셀이랑 같은 꼴 날 거 같다 - dc App
이과라 그런가 이해가 안되는데 마음이라는건 그냥 뇌의 생존 활동에서 나온 부산물과 같은거 아님?
그 부산물이라 이해된 무언가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한 문제임. 여태까지 우린 그걸 기능이라든가 그런 표현으로 다뤄왔음. 그러나 그렇게 애매모호하고 잘 정의되지 않은 말로 떼울만큼 그게 별볼일없지 않기때문에 정보에대한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것. 이를테면 컴퓨터는 뭘까? 컴퓨터의 작동은 부산물적인 무엇일까? 아니면 컴퓨터란 존재의 핵심이자 본질일까?
이 문제는 문과냐 이과냐 하는것과는 딱히 상관이 없음. 둘 다 직관적인 오답을 고르니까. 전형적인 문과라도 오늘날엔 영혼같은 비물리적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진 않음. 어느쪽이든 사람들은 뇌가 마음 아니야? 라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림. 마음이나 정보적인것의 특별한 성질에 대해 숙고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
예를들어 뇌를 좀 규모를 키워서 생각을 해 보자고. 신경 대신에 우주공간의 항성들을 노드로 하고, 전파나 레이저같은 방법을 통해서 그 항성들끼리 신호하게 만들면 컴퓨터나 뇌와 같은 구조를 만들수 있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항성들의 집합을 마치 물건처럼 하나의 물질로 볼수 있을까? 탁구공이나 책 한권같은? 그럴수 없겠지. 물질들의 집합으로는 볼수 있어도. 다시말해서 마음이 태어나는 물질적인것은 응집물질이 아닐수도 있다는것. 그말은 특정 공간을 점하는 물질의 물성이 아니라, 단지 그 물질들의 상호관계, 특히 추상적인 관계에 의해서 마음이 나타난다는것임.
결국 항성뇌에서 중요한건 항성들이 아니라 항성들간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임.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적인 현상이지. 신호는 전파를 통해서도, 레이저를 통해서도 전달 가능함. 이또한 물질을 필요로 하지만 일대일 대응을 갖지는 않는 정보적 특성이지. 뇌도 같아. 물론 신경에는 갖가지 수용체등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특수하게 발달한 시스템이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하는것은 커뮤니케이션임. 그 커뮤니케이션이 우리의 마음이고, 마음은 물질 자체도 아니고, 물질의 전기적 상태 혹은 작동도 아님. 전기가 아니라 화학, 레이저, 전파, 중력파, 정보를 전달할수 있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것이 중요함.
현대인인 우리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네트워크라는 말을 쓰지만 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적은 거의 없음.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네트워크를 존재로 볼때, 존재에 대한 기존까지와는 다른 생각이 필요하게됨. 사실 이것은 새로운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 세계의 모든것이 정도만 다르지 네트워크로 되어있으니까. 그것들중 물성을 초월하는 시스템 층위의 기능이 강한것들이 특별히 정보적인것으로 인식되었을뿐임. 생명, 사회, 조직, 어디에나 네트워크와 정보적인것이 있음. 최근엔 이런 '연결 자체' 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도 늘어나고 있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정보철학은 가장 깊숙히에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이 모든것을 이룬다고 추측하는것임.
물리학도로서 이책 꼭읽어봐야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