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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방식 자체가 되게 신선했다.

시를 읽고, 그 행의 주석을 읽고, 주석에 언급된 주석을 또 읽고.

킨보트 박사가 출판한 결과물을 직접 읽는 것 같아 세계관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근히 롤리타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킨보트가 이웃집 시인의 동선을 쫓는 모습이 험버트에 뒤지지 않게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셰이드는 명성 있는 시인이고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묘사된다.

달과 6펜스처럼 그 위대한 작품이 미술이었다면 간접적으로 텍스트를 통해 독자가 상상하게끔 만들면 되지만,

창백한 불꽃처럼 독자가 “직접” 그것을 접해야 할 때는 창작자가 상당히 애를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독자가 납득할 수 없다면 아무리 나머지 부분을 잘 만들었어도 가치가 떨어질 수 있으니.


서술자가 킨보트 박사이므로 당연히 처음에는 그의 시각에 맞춰서 읽을 수 밖에 없는데, 갈수록 의문이 하나 둘씩 피어났다.

처음에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시를 지키는 영웅처럼 나온다.

당연히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까이 있었던 친구로서 독자들이 모르는 셰이드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주석도 상당히 흥미로웠지만, 

자꾸만 묻지도 않았고 관련도 없는 젬블라와 카를 왕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화자가 카를이고 그라두스가 날아오는 이유는 화자를 죽이기 위해서인게 아닌지?’ 라는 의문이 들었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 사실이 명백해졌다.


2편에서 헤이즐의 죽음이 드러날 때 즈음부터 킨보트 박사가 이기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셰이드와 생판 남인 독자가 봤을 때도 가슴이 아프기 마련인데,

자꾸 관계없는 자신의 젬블라 이야기를 해대질 않나

과연 셰이드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맞는 건지, 단순한 스토커의 집착인 게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셰이드가 사랑한 존재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주석을 작성하기를 피한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사실 초고에는 이런 행이 덧붙여져 있었다’며 젬블라와 관련된 구절을 보여줬다가도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든가,

자신과 젬블라 이야기는 4편의 면도 부분에서 '어느 이웃' 정도로 지나가듯 언급되다 말 때 실망하는 킨보트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내 이야기를 주제로 써 줬으면 좋겠다! 라는 어린애 같은 바람이 꽤나 무례하다고 느껴졌는데,

그렇다면 ‘아무하고나 쉽게 친구하지 않는’ 셰이드가 어떤 점에서 그를 친구로 두었는지 조금 궁금했다.

어쩌면 그 아무하고나 쉽게 친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상낙원처럼 표현된 젬블라도 그의 망상이었던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면서

과연 출판권이 그에게 간 것이 잘 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와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내용은 은근히 미스테리하기도 하고,

각 행을 읽어내릴 때마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하는 기대감으로 종이뭉치를 넘기며 왔다갔다하는 재미가 있었다.

시는 친숙하지 않은데, 글자들을 천천히 읽어내리며 곱씹어보는 맛이 있었다.

나보코프의 작품은 원서를 읽을 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매번 든다. (사실 귀찮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