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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이 실려 있던 것을 기억한다. 자연을 마음대로 매매할 수 없다는 논조의 연설문이었다. 나는 환경보호론자가 아니었지만 그 연설문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포크너의 「곰」을 읽으니, 그때 들었던 기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책의 주인공이 올드벤과 사투를 벌이는 인간들이라 생각했다. 책장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달랐다. 이 책의 주인공은 쇠락이다. 인간에 의해 벌어지는 자연의 쇠락, 그리고 자연을 쇠락시키며 그 안에서 스스로 벌이는 인간의 쇠락.
「곰」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다. 「곰」에는 세 종족이 나온다. 남북 전쟁의 결과로 자유를 얻었지만 쓰는 방법을 몰라 백인들 곁에서 여전히 종노릇을 하는 흑인들. 전쟁에서 패배하여 명예를 잃고 과거의 영광에 도취돼있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욕심에 미친 사람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이 부당한 것이 되자, 이제 사람들은 눈을 돌려 숲을 착취한다. 곰 올드벤은 숲의 인격이다. 숲의 인격은 결국 욕심에 미친 종족에 속하는 분 호겐백에게 살해당하고, 자연이 해체되는 불길한 조짐을 보여주며 소설이 끝난다.
「곰」의 4장에서 아이작은 남부가 저주받은 땅이라고 선언한다. 모두가 평등하던 땅에 인간들이 들어와서, 자연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사업의 배경이 됐다. 어떤 추장은 자연은 매매의 대상이 아니라는 연설문을 남겼고, 이케모튜베는 자연을 팔았다. 그 땅 위에서 아이작의 집안은 흑인들을 매매하고 차별하며 세력을 길러갔고, 그 잔인한 연대기가 맞춤법조차 맞지 않은 장부에 장황하게 남아있다. 남북 전쟁의 결과로 명목상의 자유가 생겼지만, 작중의 표현대로 '인간에게는 자유를 오용하는 습성'이 있어서 무엇도 나아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황폐화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것도 만지지 마! 다 내 거야!"라고 미친 듯 외치는 분 호갠벡을 보며 나는 올드벤이 개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은 위대한 존재이다. 오랜 시간 생명들을 품어온 터전이자,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장소이다. 아이작이 숲 안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자연을 존경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거기에 곰 올드벤이 있다. 올드벤은 단순한 곰이 아니다. 강력한 힘은 물론이고, 사람들을 지켜보는 노련함도 갖췄다. 올드벤의 행적은 마치 숲과 동료 곰들을 지키며 사람들이 자연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는 듯하다. 올드벤을 만나기 위해 아이작이 나침반과 시계까지 벗어던져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은 올드벤을 통해 순수한 사람만을 만나주기로 결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올드벤이 쓰러졌다는 것은, 땅이 자연의 것이 아니라 탐욕의 것으로 정복당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시간이 지난 뒤 아이작은 숲에서 커다란 뱀을 만난다. 올드벤이 죽고 위대한 곰이 아닌 무서운 뱀이 나타난다. 어쩌면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자연이 사람들에게 보낸 저주의 전령이 아니었을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벌였는지 아이작은 알고 있다. 아이작은 인간을 이렇게 평가한다. "혼돈 속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어떤 고결한 일도, 어떤 저열한 일도 할 수 있는 존재." 아이작은 하느님이 자신과 대등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비옥한 남부에서 아름다운 세계를 꾸려나갈 것으로 기대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가 알듯 전혀 그 반대로 일이 이루어졌고, 아이작은 하느님이 이렇게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은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피로써 분명히 보여주지 않으면 기억을 못하는구나." 그래서 남부는 저주받은 것처럼 남북 전쟁에서 패하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자연의 끝 무렵에서 아이작은 올드벤을 마주하며 자연의 두려움을 느끼며 겸손을 배웠고, 그 안에서 매일매일을 개척해나가는 긍지를 배웠다. 곰을 잡은 것도 용기가 해낸 일이었고, 황폐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도 용기가 해낼 일이다. 지금 탐욕에 의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작중에서 적어도 아이작은 그 용기를 갖추었다. 「곰」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그 용기를 갖추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어떤 저열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듯이 고결한 일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매캐슬린은 과거에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하나야. 변하지 않지. 진실은 마음에 와 닿는 모든 것을 아우른단다. 명예, 긍지, 연민, 정의, 용기, 사랑, 이 모든 것을. 이제 알겠니? 용기와 명예와 긍지와 연민. 그리고 정의와 자율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움직인단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된단다." 욕심은 우리를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뜨린다. 사람과 자연을 갈라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질을 얻기 위해 물질을 내놓는 관계에서 벗어나, 자연 만물에 존경심을 품고 대하는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 아이작은 상속을 포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남은 일생 동안 제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해 저는 이 일을 해야만 해요. 그래서 제가 오직 원하는 건 그 일을 평화롭게 해내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탐욕에 희생당한 올드벤에게 발을 돌려주고, 물질에 묶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마지막으로 자연의 의지를 거슬러 벌을 받던 자신에게 긍지를 돌려주는 것이다.
「곰」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미 많은 자연이 파괴됐고 산업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번성한 지금, 「곰」을 들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하기는 어렵게 됐다. 하지만 우리 종족을 낳은 자연을 기억하고, 나를 지배하는 탐욕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적어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인간은 불합리한 과오를 반복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원죄일지도 모른다. 「곰」은 원죄를 씻는 방법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제시하는 듯하다. 이제부터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훠훠 포크너의 위력을 이제 아쉬겠슙뉘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