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과거를 기억할수 없으면 학습도 할수 없고,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일반경향을 만들어내는것도 불가능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컴퓨터는 그저 미리 짜여진 입출력함수대로 자극에 반응하는 단순기계일 뿐이다.


생물은 일어난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무언가를 학습할수 있고, 그래서 미래에 대비할수 있다. 또 기억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 안의 자신을 발견할수 있다.
생명은 반드시 공간을 점유하지만, 시간속에서도 항상 의미있는 지위를 갖는건 아니다. 최소한의 기억과 학습도 불가능한 매우 단순한 동물들은 과거와 미래 현재의 구분도 없이 그저 공간 안을 부유할뿐이다. 대사를 포함한 모든 활동은 그저 짜여진 절차의 실행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존재들의 삶은 시간속에 있지 않다. 물론 시간을 인식하는 우리가 볼땐 그들 역시 시간의 흐음 속에 있지만, 그들 자신에게 있어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순간의 반복이 영원히, 순서 없이 존재할뿐이다.

나는 사람의 자아같은 강한 자아가 만들어지려면, 반드시 강한 기억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기억은 자아의 필요조건이다. 자아의 핵심엔 '나를 외계외 구분하여 인식하는것', 즉 자기인식이 있는데, 이런 인식은 이해와 예측의 필요성때문에 생겨난다. 동물이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환경에 적응하려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요소들과 나라는 요소를을 분리하여,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나와 다른 존재의 상호작용을 해석히는 능력이 발달하게 되면, 결국 나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영역에 도달하게 될거란 것이다.

다시 기억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경험한것을 기억해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획득한 자기인식능력을 붙들어둘수 없다. 기억하지 않는 자아는 쓸모가 없다. 기억을 통해서 학습을 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 안에서만 메타적 자기인식이 의미를 지닌다.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순간과 순간의 자신이 모두 동일하며, 시간적으로, 또 인과적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질서있는 존재란것을 알게 된다. 기억이 있기때문에 우린 의식의 연속성을 얻을수 있게 된다. 기억이 없다면 1초 전의 나와 1초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둘은 같은 육체에서 구현된 패턴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관계가 없는것이다. 때문에 기억할수 없다면 우린 우리는 모래처럼 갈갈이 찢어진 순간자아만을 갖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적어도 두가지 이유에서 기억은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요소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기억은 또다른 두가지 이유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다.
첫째로 우리의 기억이 우리의 특성을 만든단것이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다른 삶을 산 쌍둥이처럼, 모든 개개인이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기억을 갖기때문에 형성된 성격이나 능력 행동과 사고의 방식도 다르다. 이것들이 우리의 특성이 되고, 남과는 다른 나의 개성이 된다. 어떤 두 무언가가 차이가 없고 동일하다면, 둘을 구분하는것은 무의미하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가령 모든 전자나 소립자들은 똑같은 기본 물리량과 속성을 가졌을테니까, 우리는 이 원자와 저 원자를 구분하는게 불가능하다. 단지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우리와 상호작용할때만 그것을 붙들고 있을수 있을뿐이다. 우리가 원자의 거동을 추적하지 못하게 될때, 그것들은 영영 뒤섞여서 다시는 구분할수 없데 된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니까.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있고, 그래서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이게 우리 삶이 다양하고 풍부한 이유일 것이다. 만약 기억할수 없다면, 특성도 없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특성을 빼면.


두번째로 기억은 우리 자신에게 있어 살아온 세계 그 자체란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남들과 같은 세상에 산다고 확신할수 있는가? 가령 아메바는 우리의 존재를 절대로 인식하지 못할것이다. 아메바에겐 그런 일을 해낼수 있는 능력이 없다. 고로 우리는 아메바가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산다는걸 알지만, 아메바가 사는 세계에 우리는 없다. 말하자면, 세계는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로 나눠진다. 아메바의 주관적 세계에 우리는 없다. 개미의 주관적 세계에 인간은 없다. 베르나르가 개미에서 표현한대로 '공모양의 살구빛 살덩이' 만 있을뿐이다. 우리의 손가락이 개미를 눌러 죽일때만 우리의 일부를 인식할수 있을테다. 그 밖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인간 총체는 개미의 주관적 세계 안에선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의미있는 세계는 주관적 세계고, 주관적 세계를 공유할때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산다고 말할수 있게 된다. 기억을 공유하는것은, 세계를 공유하는것이다.


나는 치매나 지적능력 저하가 두렵다.
왜냐면 기억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건 더이상 나 자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배설을 할수는 있지만, 동물 이상의 무언가라고 느낄만한 인간성을 가질순 없다. 거기 있는건 그 순간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시간속에 갇혀버린 죄수다. 왜 사람들이 치매를 걱정할까? 치매에 걸리게 되면 더이상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되니까. 아닌것이 되는게 아니라, 아예 사라지는것이다. 내가 어렸을때 5년을 넘게 쓴 컴퓨터는, 내가 내려받은 음악과 사진과 게임과 각종 프로그램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접근할수 있는 모든곳에 나의 사용흔적이 남아있었고, 그래서 이 컴퓨터는 다른 컴퓨터와 달리데 내게 익숙했고, 편안했고, 난 이 컴퓨터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어느날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포맷을 하게 되었고, 나는 영영 친구를 잃어버리게 됐다. 기억을 저장하는 매체는 기억때문에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를 지워서 뼈대만 남은 사진첩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난 어렸을때 아주 많은 시간을 게임하는데 사용했다. 이제 난 거의 게임하지 않는다. 게임은 강렬하고 자극적인 경험을 제공하지만, 어떤 의미있는 기억을 제공하진 않는다. 물론 항상 그런것은 아니다. 나 역시 게임과 관련된 추억이 많으니까. 초등학생 시절 바람의나라 하던 추억, 친구들과 겟앰프드 하던 추억, 새로운 게임을 배우는 처음 100시간정도, 스타크래프트, 내게 충격을 준 모던워페어1, 레프트4데드, 카오스...분명 게임은 추억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기억은 의미있다. 왜냐면 우린 바람의나라니 메이플스토리나 던전앤파이터를 한 기억을 공유할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서로 다른 부대에서 복무했음에도 모든 남성들이 군대의 추억을 공유할수 있는것처럼, 우리는 유사한 주관적 경험과 느낌들이 유사한것을 확인하면서 즐거워할수 있다.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와 사건들은 우리의 뇌리에 강렬하게 뿌리박힌다.

그러나 게임은 반복의 특성을 가지고, 수없이 반복하게 되면서 우린 게임에 숙달되게 되는 대신 경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를테면 로그라이크류 게임이 그렇다. 매 게임마다 다르게 생성되는 던전이 만들어주는 기대감. 오직 그것뿐이다. 뭐가 나올지 몰라서 재미있는것, 전형적인 도박의 즐거움.
의미있는 삶을 살고싶다면, 정확히 말하자면 삶의 경험들이 의미있는 기억으로 남길 원한다면, 무의미하게 반복하는것은 그만두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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