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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 : 악기의 음을 표준음에 맞추어 고름, 문제를 어떤 대상에 알맞거나 마땅하도록 조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조율사>는 “나”를 중심으로 엮여있는 인생사의 선들을 조율해나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조율의 목적을 계속 유예하며, 연주될 수 없는 미성숙한 음들의 변해감만을 이어간다. 그 지지부진한 조율의 과정에서 때때로 “나”에게 엮인 이중 삼중의 선은 화음과 불협화음을 반복하며 장황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조율사>는 무엇을 위해 그 선들을 조율하고 있는가?
우리네 문학을 읽을 때면 특유의 토속적 향취가 내 육혼에 달라붙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조율사>는 스스로 그런 느낌을 주던 말던 뭐가 중하냐는 듯, 화자가 처한 외부 세계로부터 무언가를 떼어놓으려, 혹은 길어내려 “나”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관념의 리듬만을 이어간다. 마치 세상사에 달관한 척 쏟아내는 “나”의 주절거림은 그 자체가 <조율사>의 매력임과 동시에 내가 한국 문학에 품은 선입견적 불만이기도 하다. 무책임한 방랑 위에서 이어지는 관념들의 조율은 끝없이 이어지다가도 어느새 툭 끊겨 주제를 바꾼다.
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가? 이것이 내가 품은 불만이다. 지훈이 조율사들에게 품은 불만도, 팔기가 “나”에게 품은 불만도, 은경과 영인이 선택을 요구한 이유도 그것에 있을 것이다. “나”는 왜 끝맺음을 유예하는가? “나”는 왜 자신의 십자가로 자신의 관념 세계만을 짊어지는가?
아니 오히려 관념의 세계에서야 말로 문제를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신의 세계는 구체성의 세계이고, 정신의 세계는 모호성의 세계이다. 그 모호성 안에서 시야는 고정된 좌표값을 풀어버린다. 시야가 자유로워진다면, 문제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다. “나”는 시야를 자유로 하기 위해, 정확히는 문제에서 고개를 돌리기 위해 영원한 조율의 과정 속에 틀어박힌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조율 때문에 악기의 현은 그 자체의 떨림, 진동에 의해 끊어져버린다. 그 떨림은 “나”의 육신을 진동시키는 배앓이로 나타나고, 결국 주인공은 하나 남은 선, 자신의 위장병을 고치기 위해 미루고 미루던 단식에 들어간다.
첫 장편으로써 <조율사>가 가지는 의미는, 작가가 회피하던 문제, 영원한 조율의 과정을 끝맺고 음악을 연주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조율을 통해 악기는 제 각각의 현이 가진 자기 고유의 여러 음값들을 횡보하며 올바른 음으로 수렴하고자 한다. 조율은 음의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나”는 스스로의 문제를 회피하려 조율의 세계로 도피하고 있는 반면, <조율사>는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고유의 음값들을 횡보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에게 엮인 선들은 그 조율을 끝끝내 마치지 못하고 끊어지지만, 소설 <조율사>는 스스로 잘 조율된 마지막 한 음을 튕기며 끝을 맺는다.
<조율사>는 조율의 과정 자체를 연주하는 소설이다. 멜로디랄 것은 썩 없지만, “나”에게 엮인 몇가닥 현의 떨림들은 나름의 리듬을 형성하며, 작품 <조율사>를 통해 하나의 음으로 수렴한다. 어쩌면 “나”와 이청준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올바른 음을 연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선과 음을 찾는 게 아니었을까? 조율의 목적은 거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비록 다른 선들이 모두 끊어질지라도.
엔딩의 조율사들 방 장면이 참 진국이었던 소설
ㅇㄱㄹㅇ
조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