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든가 말든가)
목차
0. 들어가기에 앞서
1. 안녕, 에리
2. 미셸 푸코
3. 반-플라톤주의
4. 실존의 미학
5. 결론
6. 마치며
1. 안녕, 에리
폭발, 흡혈귀, 판타지 한 꼬집, 영화. 표지로 보이는 에리는 화면 너머의 촬영된 모습이다. 독자는 '영화'를 통해서만 에리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어느정도 유우타의 관점이 반영된 에리, 엄마, 유우타의 모습을 보게된다.
[안녕, 에리]에서의 컷배분
[안녕, 에리]는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는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 2부는 에리와 함께 만든 영화, 3부는 이후 에리와의 재회까지. 한 페이지를 가로로 긴 직사각형으로 4등분해 영화의 화면비를 따라하고, 하이라이트에서는 마치 더 긴 시간을 보여주는 듯 1~2 페이지를 통으로 할당한다. 마치 이건 영화라고 주장하는 듯이. 이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안녕, 에리]속 모든 등장인물은 연기를 하고 있다.
한가지 질문을 해보자.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은 가면을 쓰는 것인가? 흔히 사회적 가면이라는 의미로 페르소나라는 말을 쓴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도입한 이 개념은 그리스어 마스카(μάσκα, máska)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런데 이 가면으로 번역되는 마스크는 얼굴에 덫 씌우는 가(짜)면(假面)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가 마스크를 쓰면 그는 마스크의 인물이 되어 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면 실재로 그 사람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한 페르소나를 드러낼 때 가면을 쓴다고 하면 그에 대비되는 진짜 면이 숨어있다고 전제된다. 진짜 면이란 뭔가?
좌 니체, 우 칸트
여기에 물자체(있는 그대로의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의 비판과 오직
해석만이 존재한다는 니체의 비판을 첨가하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한다. ‘인간은 여러 개의 페르소나(관점)를 가지며 그 사이에 진짜, 가짜의
우열은 없다.’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건 인간은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해석만이 존재한다는 건 관점들 간에 우위가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대하는 나와 친구를 대하는 나, 선생님을 대하는 내가 다르다고 하여도 나의 본모습이 아닌 게 어디 있는가?
다시 표지로 돌아가자. 우리는 유우타가 찍은 화면 너머의 에리만을 볼 수 있다. 특정한 관점에 의해 해석된 에리만을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에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화면 속의 에리를 가짜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내 눈(관점)을 통해 본 에리만을 진짜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리를, 영화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한가지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 현대에 와서 예술작품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독자적 실체라는 것을.
2.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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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다. 푸코의 연구영역은 지식, 권력, 윤리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순서대로 커지는 포함관계에 있다. 예술작품에 있어서는 지식과 윤리가 중요하다. 푸코는 철학자답게 개념부터 새롭게 정의한다. 예술작품에 대하여는 지식과 윤리가 중요한다.
지식이란 인식의 가능조건이다. 인간이 특정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무의식적 규칙을 지식이라고 정의했다. 이 규칙은 시간에 따른 특정한 분절(사건)을 통해 바뀌는 불연속적인 것이다. 예술작품은 지식에 속한다. 예술은 표현이고, 인간은 인식된 것 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어 인식의 규칙이 바뀌면 미학의 규칙도 바뀌어 예술작품도 바뀐다.
권력은 관계속에서 나타나는 효과다. 따라서 푸코는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실체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윤리란 자기자신과 맺는 관계다. 쉽게 말해 어떤 태도를 가질것인가에 관한 게 윤리다. 푸코는 앞에 지식,권력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를 다루지만 윤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고대그리스에서 시작한다. 근대 전까지 보이는 윤리적 모습을 현대예술가들에게서 볼 수 있다.
좌부터 보슈(Bosch), 벨라스케스(velazquez), 고야(goya), 마그리트(magritte)
그가 제시하는 시대별 예술가로는 1650 이전의 보슈, 1650~1800의 벨라스케스, 1800~1950의 고야, 1950이후 동시대의 마그리트가 있다. 이 시대는 푸코가 (앞에서부터)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동시대로 명명한 시대이다. 이들은 각자 자기 시대의 인식의 규칙을 보여준다. 푸코는 1950년 즘을 기점으로 유럽에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 주장했으며 그 시대에 따른 인식과 미학의 규칙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화가로 르네 마그리트를 지목했다.
그래서 동시대의 미학적 규칙이 무엇이냐? 형식적인 면에서 반-플라톤주의이고, 예술가에 있어서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이다.
또한 실존의
미학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3. 반-플라톤주의
먼저 짚고 넘어갈 결론이 있다. 현대예술이란 현대철학을 예술의 영역에서 실천한 게 아니라 철학적 실천 그 자체라는 것을, 또한 현대철학이란 자신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권력투쟁이라는 것을. 그렇다, 철학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하다.
좌 플라톤, 우 이데아에 대한 동굴의 비유
플라톤주의란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이데아’다. 알기 쉽게 정리해보자.
1)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본질)일 뿐이며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2) 이성의 활동을 통해 이데아에 인식할 수 있다.
3) 이데아를 추구하는 활동이 선한행위(목적)이다.
플라톤은 예술가의
추방을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이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모방하여 대중이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예술이란 (이데아의 모방인)현실의 모방일 뿐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도
깊게 뿌리박혀있다. 기술적으로 잘 그린 그림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것은 고전주의시대까지나 통하는 예술이다.
반-플라톤주의는 말 그대로 플라톤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에서 존재란 (이데아의)복제품이다. 이 복제품들은 원본(이데아, 본질)과의 유사도에 따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우열이 정해져있다. 유사도가 높은 예술이 좋은 예술이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를 비롯한 흔히 포스트어쩌구하는 호칭이 붙는 철학자들은 이런 플라톤주의를 거부한다. 푸코에게 존재란 유사성(이데아, 본질)을 기준으로한 복제품이 아니라 오직 차이만이 존재하는 ‘상사’다. 상사는 말 그대로 차이만이 존재하며 서로가 원본의 지위(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다. 따라서 복제품이 아닌 상사로서의 예술작품은 독자적 실체, 마치 한 명의 사람처럼 독립적인 존재이다. 신분이라는 본질을 타고난 인간이 없듯이 존재는 서로 다른 등급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색깔이 있는 것이다. 황제의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있다.
여기서 [안녕, 에리]로 돌어가자. 유우타가 촬영을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안녕, 에리]는 영화임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이게 단순한 영상기록물이 아니라는 건 병원폭발신에서 드러난다. 폭발은 유우타가 영상에 (관점을)첨가하는 판타지 한 꼬집이다. 판타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동영상을 영상기록물이 아닌 영화다. 현실의 모방이 아닌 독자적 실체로서의 영화다.
1부 후반부에서 유우타는 관객에 의해 자신의 관점을 철저히 부정당하고 병원 옥상에서 자신을 긍정해주는 에리를 만난다. 2장는 판타지의 삽입과 현실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듯하다. 시퀀스를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감정을 이끌어낼 것인지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유우타는 영화가 만족스럽지 않은 지 편집을 계속한다. 무엇이 불만일까?
푸코는(들뢰즈였나?) 이런 표현을 했다.
“플라톤주의는 어리석지 않기 위해 범주화를 하였고 이로 인해 실수한다.” 풀어말하면 세상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대상을 정의(본질에 따라 범주화, define)했고, 이런 정의는 세상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다(실수한다). 에리와 함께 만든 영화는 현실과 영화의 구분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영화
속 대사로, 에리의 마지막으로. 그 영화속에서 흡혈귀라는
판타지는 판타지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그것은 영상기록물을 영화로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에리의 친구는 영화를 ‘에리의 좋은 모습을 담은 영상’ 정도로 여겼다. 심지어 이 영화는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1부의 영화) 마저 망쳐버렸다. 유우타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실과 독자적 실체를 갖던 영화는 단순한 유우타의 도망으로 치부되었다. 유우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게 아니었다.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라는 새로운 독자적 실체를 창조한 것이었다. 그러니 2부는
유우타에게 구원이었음과 동시에 불행이었다. 에리는 유우타를 범주화 했고 유우타의 영화는 실수하게
되었고 어리석음을 마주하지 못하게 되었다.
3부에서 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구원받는다. 흡혈귀인 에리는 기억이 없지만 영화가 있었고, 그 영화를 기억으로 삼았다. ‘흡혈귀인 에리’는 1부의 폭발장면과 같은 기능을 한다. 이제 에리의 존재 자체가 판타지 한 꼬집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제목이 붙지 않은 3부의 영화가 탄생했다. 나이든 유우타와의 대화에서 에리는 2부의 영화에 대해 판타지 한 꼬집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자신이 흡혈귀인 건 사실이기 때문에 판타지가 아니라고 덫 붙인다.
에리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유우타를 만난다고 표현했다. 이 말은 조금 이상하다. 이
영화는 유우타가 에리를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3부의 에리는 있을 리 없는 흡혈귀로서 어리석음을
마주한다. 에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만들며 2부의 실수를
지적한다.
“유우타 넌 사람을 어떤식으로 떠올릴지를, 스스로 정하는 능력이 있어.” 유우타의 아버지가 한 이 말은 2부를 요약한다. 실재로 일어난 사실이 존재하고, 유우타는 거기에 하나의 해석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1부에서 유우타가 하고자 한 것은 정 반대였다. 유우타는 어쩌면 현실과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 있는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를 창조하고자 했다. 3부를 끝 내며 유우타는 이를 이뤄냈다. 기억이 리셋되는 흡혈귀 따위는 있을리 없고, 그런 멋진 폭발은 말도 안 된다.
이제 플라톤주의에
대한 유우타의 마지막 펀치를 살펴보자. 플라톤주의는 목적론이다. 전술한
플라톤주의의 도식을 따르면 이데아를 추구하는 게 인간의 목적이다. 2분에서 에리는 시작과 끝에서 영화의
목적을 말한다. “이번에야 말로 모두를 펑펑 울리지 않을래?” “모두를
펑펑 울려줘.” 에리는 유우타를 범주화 시켰을 뿐 아니라 목적마저 부여했다. 이 순간부터 유우타의 영화는 사람을 울리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의 상영회가 끝난 후 유우타는 도저히
그런걸 바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영화에 대한 유우타의 평가는 “…최고였잖아요?”다. 3부에 2부처럼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후술할 내용에
따라)삶을 재구성, 양식화함으로서 주체를 구원한다.
-후편에서 계속-
시발 디시야 글자수 제한 있으면 어디 표시해주면 안되냐. 다쓰고 귀찮게 복붙해야 되잖아.
하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