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기에 앞서
1. 안녕, 에리
2. 미셸 푸코
3. 반-플라톤주의
4. 실존의 미학
5. 결론
6. 마치며
4. 실존의 미학
구글에서 찾은 푸코가 웃는 사진과 대표저서 성의역사
푸코의 성의 역사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에서 도덕 규범은 잘 변하지 않았지만, 이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는 자주 바뀌었다.” 도덕 규범은 말 그대로 규칙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규칙이 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태도는 바뀔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윤리적 태도는 ‘진실을 드러내기’와 ‘삶의 양식화’다. 전자는 말 그대로 진실로 여기는 것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후자는 이런 활동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실천이다. 진실은 (마치 종교적 수행처럼)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주체의 구원이다.
진실 드러내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는 자신의 앎에 대한 태도, 즉 진실이라 여기는 것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는 용감하게 드러내며, 불필요한 것을 제거(청빈함)한다. 또한 이런 진실 드러내기로 삶을 양식화(주체를 구성)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진실 드러내기를 통한 주체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이란 폴리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삶의 구원이다.
이런 고대의 윤리적 태도는 근대에 들어와 데카르트에 의해 대체된다. 데카르트가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설정하면서 진리는 단지 이성적 과정에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진리는 더 이상 삶의 구원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따라서 삶의 양식화는 필요 없어졌다. 코기토(이성적 주체)에게 의심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현대예술의 윤리적 태도는 데카르트적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역설적인 윤리적 태도를 취한다. 고전적인(고대의) 진실의 형태를 모더니티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현대예술은 진실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삶(작품)을 구성하여 이를 드러낸다.
좌 소크라테스, 중 데카르트, 우 디오게네스
현대예술이 재현하고자 하는 윤리적 태도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적이면서도 그렇지 않다. 그것은 플라톤이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표현한 디오게네스의 ‘개의 삶’이다. 개의 삶은 소크라테스적 진실 드러내기의 경계에 선다. 디오게네스는 거리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음경을 문질러 성욕을 해결하는 것까지도 드러낸다. 그는 청빈하다고 표현되는 소극적 가난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버리고 타인에게 의지해서 사는 적극적 가난을 택한다. 이런 종류의 드러냄과 가난(청빈함)은 고대 그리스에서 추한 것으로 간주되는 가치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적 진실을 극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것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진실이 드러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연다.
다시 첫 상영회가 끝났을 때로 돌아가자. 병원 폭발신이 끝나고 학생들은 영화를 비웃었다. 그것이 유우타에게는 최고의 영화였더라도 학생들, 선생님에게는 엄마를 놀림거리로 만드는 고인모독에 불과했다. 그런데 영화로 엄마의 모습을 남겨달라고 한 것은 엄마가 아닌가? 병원 폭발 씬 이전에 그 누구도 이 영화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 일상의 모든 모습이 이 진의에 기여한다. 이 진의가 폭발 씬 하나에 날아갈 것이라면 이 영화는 ‘엄마의 부탁’으로써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유우타의 폭발 씬은 현실의 재현일 뿐인 영상기록물을 독자적 실체인 영화로 만드는 요소로 기능한다. 엄마에 대한 사랑, 엄마의 부탁, 그것을 들어주는 아들. 이것에 대한 전형적인 모습의 극단적 표현이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다. 마지막 폭발은 최고였다. 그것이 유우타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2부에 들어오며 유우타는 새로운 주체화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에리는 유우타에게 많은 영화를 보게 하고, 줄거리를 정리하게 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만들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 유우타는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2부는 철저하게 ‘에리의 마지막을 담은 영상기록물’로써 기능한다. 에리와 유우타의 관계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은 관객을 울리겠다는 목적에 부합하며 관철된다. 이는 심지어 (전술했듯이)데드 익스플로전 마더의 진실(실체성) 마저 파괴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주체가 스스로의 붕괴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듯이 2부도 스스로를 부정할 단서가 남아있다(데카르트 설명은 너무 철학적이라 넘김). 2부에서 에리가 설정한 목적은 그 과정 속에서 붕괴의 실마리가 드러난다. 유우타의 아버지가 자기 친구의 말을 인용한다. “창작이란 보는 이, 듣는 이가 안고 있는 문제에 깊이 파고들어서 웃기거나 울리는 일이잖니? 그럼 만드는 이도 상처받아야 공평하지. 안 그러냐?”
2부를 통해 깊이 파고드는 문제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에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면 창작자 자신도 깊이 파고들어진다. 그런데 이 파고들어감이 창작자에게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게임이 전혀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면? 에리가 없는 유우타는 이 영상기록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편집을 거듭한다. 그리고 2부는 붕괴한다. 에리와 함께 영화를 보던 폐건물에서 죽지 않는, 이별하지 않는, 잊어버리지 않는 에리를 만남으로써.
현대철학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안녕, 에리]는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 하나의 게임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실화 주장형 픽션 등은 자신이 창작이 아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게 아니란 걸 누구나 알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주장(게임)이 ‘영화라는 실체성’을 드러낸다.
1부에서 연기와 생활을 유의미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객은 이를 고인모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이 가짜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2부에서 연기와 생활을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는 전부 연기거나 전부 연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에리 걔, 원래 안경 썼잖아.” “…그 영화로는 알 수 없게 했던데.” 이 지점에서 관객은 에리와의 첫만남부터 연기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이 영화는 독자적 실체가 아니라 시나리오라는 원본(이데아)의 본제품이 된다. “…그치마 난 앞으로 에리를 그 모습으로 떠올릴 거야. 고마워” 이 장면이 끝나고 짧은 한 컷으로 엄마의 모습이 지나간다. 이 지점에서 유우타는 에리가 게임의 규칙을 바꿨다는 것을 깨닫는다.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의 규칙이 파괴되고 에리의 규칙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3부로 들어오며 유우타는 나레이션 같은 대사를 읊조리며 카메라 앞에 선다. 불만, 사고, 깨달음. 나레이션은 아직 게임의 규칙이 영상기록물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유우타는 영화를 보던 폐건물로 향한다. 그곳에서 몇 번의 백 년을 산, 그러나 길어봐야 십 몇 년 정도의 기억 밖에 없는, 흡혈귀인 에리를 만난다. 게임의 규칙이 다시 파괴되었다. 흡혈귀 에리의 등장으로 영상기록물은 ‘영화’가 되었다. 사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불공정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거의 완벽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어.” “판타지가 한 꼬집 부족하지 않아?” 앞서 현대예술의 역설을 돌이켜보자. 현대예술은 고전적인 진실의 형식을 모더니티 속에서 구현한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균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복고주의가 아니었다. 지금에 그 균형감각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의 진실의 형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를 에리가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서 부활시켜야 한다.
그리하야 게임의 규칙이 다시 유우타의 규칙으로 대체되었다. 유우타는 에리에게, 엄마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게 되었다.
5. 결론
‘판타지 한 꼬집’. 유우타가 드러내는 진실은 일반적인 윤리관을 극단으로 이끈다. 부모의 죽음에 슬퍼한다는 상식, 연인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생각, 가족의 죽음에 따라간다는 극단적이면서도 이해되는 결정.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우리는 죽음을 슬퍼한다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당연함이 가지는 폭력성도 모른체. 푸코는 이렇게 단호하게 주장한다. “정상이란 성공한 쿠데타다.” 앞선 마스크에 대한 논의에서 말했듯 진리는 없고 해석만이 있다. 진리인 정상이 있는 게 아니라 정상이라 불릴 수 있는 여러가지가 있고, 그 중 하나가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푸코의 이론에서 미학과 윤리학, 정치철학은 분리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철학적 논의 엮어보자.
1. 상사: 예술작품은 하나의 실체로써 자신을 진실이라 주장하며 (철학적)권력투쟁(게임)에 스스로를 던진다.
2. 삶의 양식화: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구성한다. 그럼으로써 주체는 구원받는다.
3. 해석만이 있고, 모든 것이 실체이며,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구성한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할까? 정답은 ‘모든 삶의 방식’이다. 모든 형태, 가능성을 긍정하는 중심 없는 사유. 아나키즘적 민주주의는 푸코의 미학, 윤리학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안녕, 에리]는 그 가능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삶의 양식화를 특히 잘 드러내는 게 [룩 백]이다. 평행세계의 삶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기 세계의 모습도 부정하지 않으며,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나아가는 삶. 삶의 다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선택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삶이 [룩 백]이 보여주는 삶의 양식화다.
[안녕, 에리]는 정상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윤리적 시도다. 유우타는 병원이 폭발하는 와중에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에리의 말대로 엄마의 마지막을 찍는 게 잔혹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잔혹한 것은 엄마의 죽음에 ‘정상적으로’ 슬퍼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압력(폭력성)이 아닐까? 유우타는 그걸 날려버리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도대체 피고인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했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본인은,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합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민음사) 117~118p에서 발최-
토끼인가, 오리인가?
요즘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이 창작물에 대한 흔한 칭찬이 되었다. 오늘날에 하나의 진실된 해석만이 있다는 주장은 전혀 의미없는 말이 되었다. 어떤 명제가 객관적 사실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게 객관적 사실인 게 아니라 그걸 객관적 사실이게 하려는 주장이다. 이 논리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권력적 정당화의 궁극 형식은 자신이 해석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슨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안녕, 에리]는 철저하게 자신이 객관적 사실이 아님을 내보인다. 자신이 삶의 ‘하나의’ 가능성으로써 진실임을 드러낸다. 우리가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예술작품을 삶으로 만들지 않을 이유는 어디 있겠는가? “이전의 에리라면 분명 절망했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나한태는 이 영화가 있으니까.” 영화. 이것은 유우타의 구원이자 후지모토 타츠키가 내보이는 실존의 미학이다.
6. 마치며
미셸 푸코는 볼테르와 사르트르를 잇는 프랑스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린다. 그는 당시 프랑스 공산당과 교류도 활발했고, 혁명당시 이란에서 취재활동도 했으며, 당시 중요한 수많은 성명서에 서명했고, 감옥정보그룹(GIP)의 활동으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의 철학으로 자신의 삶을 양식화했으며 그럼으로써 삶을 예술작품으로 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실컷 떠든대로 후지모토 타츠키도 삶으로서의 예술로 ‘만화’를 제시한다. 유우타의 영화가 타츠키의 만화의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떠한가? 이 글은 [안녕, 에리]에 대한 진실된 해석일까, 아니면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까?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이 있다. 현대예술이 독립적 실체이며 해석의 다양성이 작품에 대한 칭찬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처음보는 (현대)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나는 간단히 한 명의 사람을 만나듯이 대할 것을 주문한다. 처음보는 사람을 무턱대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관계형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와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인상을 갖고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한다. 예술작품을 보고 이해가 안 된다는 게 보통 관객의 생각일 것이다. 그건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보고 ‘너가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잘 보고, 오래 보는 과정을 가짐으로써 이해가 아니라 인식을 학장시키는 게 경계에서 사고하는 디오게네스가, 현대예술이 하고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떠한가? 이 글을 쓰면서 [안녕, 에리]를 10번도 더 읽은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마냥 재밌었고 처음 분석을 시도했을 때는 알아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잘 모르겠다. 한 평생 같이 산 가족들을 잘 살펴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안녕, 에리]는 내가 본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물론 나는 이 의문을 신경 쓰지 않는다. 현대예술에서 작품은 독립적 존재이면서 그렇지 않다. 작품은 오로지 관객과의 상호작용(해석)을 통해서만 작품으로써 존재한다. 나는 [안녕, 에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한 게 아니다. 독자적 실체로서의 ‘안녕, 에리 – 실존의 미학’을 창조했다. 그러니 ‘이 글’의 독자도 그랬으면 한다. ‘이 글’을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
맥시멈 더 호르몬 들으면서 읽으니까 좋네
뭐어 푸코? 그게 누군데? 그게 노짱보다 맞짱 잘 깜?
존나 잘 깜... 진짜 존나 잘 깜...
이거 읽으려고 안녕에리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