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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단이 전후 수십 년간 다양한 작품에서 끊임없이 부딪혀 왔던 그릇된-순수한 거짓이라 칭하기엔 논란이 존재할 수 있기에-명제들의 유형은 우파적 이념을 통해 세워진 단독 정부에 따른 비극에 휘몰리는 개인의 관점을 부각시키는 좌파적 산문이라던가, 전쟁 당시 북측의 근본적인 잔혹함을 빌어 반공, 공동체적 의식을 공연하게 알리는 우파적 산문(주로 정부의 소유였다) 따위의 것이었다. 각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이러니하게도 상술한 두 가지의 산문은 동일한 모순점을 지니고 있는데, 글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가 그 글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공동체(국가)에 대한 부분이 중요시 여겨져야 할 좌익 산문은 오히려 개인에게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잡고, 사상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부분이 중요시 여겨져야 할 우익 산문은 오히려 국가의 전체적인 덩어리를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념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뒤틀린 역사와도 관련되는 부분이긴 하나, 근본적으로 봤을 때 이런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좌파의 근거를 좌파 자체에서 찾는 것이 아닌, 우파의 단점으로, 우파의 근거를 우파 자체에서 찾는 것이 아닌, 좌파의 단점으로 꺼내기 때문이다. 수려한 글을 위해서 그런 부분이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낫지만, 그것으로 이른바 '떡칠'이 되어 있다거나, 글의 모든 부분이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치적인 산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괴이한 한반도의 역사와 흐르는 모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폭력의 장에서, 정녕 소신이란 불타 마땅한 것일까. 어리석은 '갈팡질팡'만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문학이 정치와 이념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시선은 무엇일까.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은 구차한 설명을 붙이지 않고, 우리와 그 자신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몸소 보여준다.
'관부연락선'은 해방 전과 해방 후가 공존하는 40년대에 식자였던 유태림의 행적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 시간 순이 선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해방 전인 40년대 초중반,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부관연락선을 따라 쫓던 피식민지 일본과 식민지 한국의 관계에 대한 유태림의 수기와 해방 후인 40년대 중후반, 생폭도들에 가까운 학생들을 가르치며 남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유태림을 관찰하는 그의 친구 이군(李君)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소설 내에서 유태림 본인과 가장 많은 사연이 얽혀 있는 두 사람, 이 글의 화자 이와 서경애는 비교적 명확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 내지 사상이 드러난다. 이는 사람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거니와 소극적이긴 해도 38도선이 그어진 상황에서 온전히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을 지지하며, 여순 10.19 사건이 일어난 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파르티잔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우파이고, 서경애는 대구에서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좌파이다.
그러나, 정작 유태림의 위치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하거나, 그 어디도 아닌 제3의 영역처럼 보인다. 학생 포화로 인해 대거 임용된 엉터리 교사에 의해 적화되어 수업을 거부하는 좌익 학생들을 계몽시키는 행실을 보이기도 하나, 서경애의 입산이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좌익 활동을 했던 학생들과 어울려 조사를 받기도 한다. 아무리 결정이 쉽지 않다 하더라도 주관을 똑바로 굳히지 않고, 오히려 무관심으로 일관하기 보다는 양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그 모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어 뵌다. 역사의 이방인이 아닌 역사의 주민으로서 '모두가 가담하는' 그곳에 자신만 외떨어져 있는 것은 결코 긍정적으로 비치지 않으리라. 유태림의 그런 활동이 그의 인생에서 큰 걸림돌이 될 때 주변인들은 본인이 어떤 편에 서 있든지 그를 비난하기 바쁘다. 주변에 널린 좌익들은 반대편에 서 있는 듯이 보이는 유태림을 책망하고, 이는 자신과 같은 우익이라고 생각한 유태림의 생각과 행보에 실망해 그와 설전을 벌인다.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가진 모임에서 또 다시 그런 비판을 들은 유태림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방관자'가 맞다고 표현하며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원래 외눈박이 마을에 간 정상의 사람은 치료가 시급해 보이기 마련이다. 특정 정치 집단을 구성하거나 소속되어 제 본분을 잊고 날뛰는 제자들을 선도하고, 또 어떤 때는 그런 분란으로부터 물러나 함께 어울리며 C고교 내의 교육을 유연하게 만드는 그의 모습은 정치적인 부분을 떠나 참교육자가 아니라 할 수 없고,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과 서경애의 입산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정부 수립 이후 더욱 더 심화될 남북 간의 갈등에 이어 일어날 전쟁과 그녀가 파르티잔이 되었을 경우 발생시킬 참혹한 살상, 즉 이념에 의해 탄생하는 폭력을 경계한 자세였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편에 뿌리를 묻고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방관의 자세는 한 곳에 참여하는 하지 않을지언정 이념과 얽혔을 때 일어나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두 편 모두를 멀리서 바라보고 막아서는 관망의 자세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앞서 말했던 어느 한 편에 치중된 산문이 가지는 모순과 떨어지는 완성도는 당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적 견해를 한 편에 몸 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득하기 때문이다. 내용 면에서도 건강하고, 형식적으로 봤을 때도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 이야기를 작가인 이병주는 아마 유례가 없을 무시무시한 필력으로 써내려 간다. 줄리언 반스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에게 '모두가 토끼를 사냥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은 홀로 거대한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했던 말처럼 정말 형식적으로 불필요한 부분들은 일체 덧붙이지 않고 선굵은 문장으로 과감히 책장을 두드린다.
제목인 '관부연락선'은 종장인 유태림의 수기 끝자락에서 그의 친구였던 최종률이 부관연락선이었던 곤론마루가 침몰하면서 함께 사망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의미가 드러난다. 식민지와 피식민지를 연결해주는 그 현해탄의 뱃길을 오갔던, 이념으로 내국인들끼리의 갈등이 벌어지지 않았던 그 시대의 청년 운동가들의 마음가짐, 사상 따위의 거적때기가 아니라 운명과도 같은 아득한 힘만이 목숨을 걸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1947년, 서울 한복판에서 암살당한 몽양 여운형의 비보에 대한 유태림의 한마디.
"맞아 죽지 않았어? 정치가가 일 도중에 죽었으면 그로써 낙제한 게지, 딴 이유가 뭣 필요해."
이것은 몽양이라는 그 인물과 함께 정치의 의미와 위치에 대한 소설의 주제를 그대로 관통하는 문장이자, 이토록 포괄적인 그것을 다시금 일깨우려 우리의 머리에게 가하는 오함마다.
이병주 작가 소설이 좋다는 소리가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고야요, 이러면 볼 수밖에
관부연락선 절판 아닌가? 몇 년 전 알라딘 중고서점 뒤져서 사 읽었는데 뭘 모르고 봐도 그냥 재밌음.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느껴지는 유태림 캐릭터 자체도 굉장히 매력적이었음.
절판은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