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경우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소개나 목차는 별로 의미가 없는거같아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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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내용을 제쳐두고 보더라도 흥미로운 책임. 먼저 깔끔하면서도 유려한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면서도 재미가 있음. 또한 구성면에서도 분류학의 역사를 무차별적으로 나열하는것이 아니라 움벨트와 과학적 방법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통해서 풀어내며 당대의 핵심적 인물들(린네나 다윈 등)의 행적과 흥미로운 개인사까지 곁들여서 풀어내고 있으므로 정말로 책이 술술 읽힘. 드문드문 다른 분야와의 연결이나 지적 도약을 유발할만한 놀라운 정보(예를들면 인간에게 생명 인식만을 처리하는 모듈이 따로 있다는것, 그 과학적 증거)들도 있고, 전체적으로 풍부한 정보, 재미. 한마디로 베스트셀러가 될 자격이 있음.
그러나 그렇기만 한 책이라면 읽지 않았을것임. 이 책은 누구나 읽을수 있을만큼 쉽지만, 다루는 주제는 전혀 가볍지 않음.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전통적으로 철학과 과학의 심오한 개념중 하나이며, 앞으로 더욱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음.
책의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쉬움. 저자는 움벨트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분류학의 역사를 서술하며, 이를 통해서 자연을 보는 우리의 방식,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함.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한 학문분야의 역사에대한 '전문적'인 (다른말로는 '보편적'인 지식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라고 할수는 없음. 물론 오늘날의 일상세계나 지성계에서 분류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그다지 대단한것이 못 됨. 린네로 대표되는 박물학 시절의 유산(누런 액체에 담긴 표본과 삽화들), 그리고 최신 분기학의 영향을 받은 '새는 공룡이다' 같은, 흥미를 끄는 그러나 그다지 대단한(예를들면 양자역학처럼) 내용은 아닌듯한 파편적 정보들로 요약되는것이 분류학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이미지일것임. 따라서 이런 별로 중요한것같지 않은 분야의에 대해서 무려 역사까지나 알아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음.
그러나 분류학은 그렇게 무시해도 좋을만한 주변적 분야가 아님.
나는 이전부터 종 문제(species problem)를 알고 있었음. 언젠가 읽은 과학철학 입문서에서 대표적인 생물철학의 문제로 소개되었기 때문임. 나는 그 개념을 안 즉시 그것이 단순히 생물철학이라는 응용 과학철학의 한가지 문제가 아니라, 철학 전체, 나아가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해 자체와 관련있는 문제라는걸 직감함. 그 이후로도 몇번인가 나는 종 문제를 접할 기회가 있었음. 무언가를 반복해서 만날수 있는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때문이지. 저자가 입문서에 종문제를 소개한것도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일테고. 이 책의 존재를 알자마자 읽겠다고 결정한 이유도 그때문임. 자연에 이름붙이기라는 제목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는 대담하고 오만한 제목이라고 느낄수도 있음. (사실 대중서보다는 이 분야에 40년을 몸담은 어떤 원로철학자의 필생의 역작의 제목이어야 할 값어치임.)
자연에 이름을 붙인다는것은 단순한 일이 아님. 그것은 자연을 분절하고, 범주화하고, 하나의 독립적 존재와 범주, 그리고 그것이 아닌 다른것들로 선언한다는것임. 다시말해서 자연에 이름붙이는 행위에는 '자연은 불연속이다' 라든가 '자연종은 실재한다', '보편자는 존재한다' 같은, 과학적으로 검증할수 없는 수많은 형이상학적 전제들이 함의되어 있고, 인간이 자연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은 자연과 세계 자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식과 관련있는것임. 설령 자신이 이런 철학적 전제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자연에 이름붙이는 행위는 자연을 보는 시각에 이미 그런 전제를 포함하고 있음.
그리고 분류학은 바로 그 자연에 이름붙이는 행위임. 과학적 분류학이든, 민속분류학(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 존재들을 유형화 하고 명명한 체계, 자연언어에 있는 바로 그 자연에대한 이름들과 분류) 이든, 그것은 자연에 대한 특정한 시각으로 자연을 분절하고 범주화 한 체계이며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임. 따라서 분류학의 역사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의 역사와도 같음.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때문에 실수했고, 무엇에 얽매여 있었고, 어디로 나아갈수 있는지를 알수 있다고 생각함.
(가장 최신의 분류학, 분기학은 폐어가 다른 물고기들보다 소에 더 가깝다는것을 밝혔음. 분류군들이 공유하는 새로운 진화적 특징을 통해서 분류군의 분기와 그에 따른 근연도, 생명의 나무를 파악할수 있음. 이로서 형태에 의존하던 분류학은 완전히 감각의 주관성과 결별했으며, 과학적으로는 큰 진보였지만, 동시에 민속분류학, 인간의 움벨트와도 결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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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갖는 강력한 태생적 직관과 감각, 그것으로서 만들어진 세계 이해라는 개념의 움벨트를 소개하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분류학이 발전하는 과정을 풀어나감. 대체로 분류학은 인간이 자신의 움벨트를 활용하여 자연세계의 질서를 찾아내려는 주관적 분류학과, 이런 분류학의 주관성에 반발하여 객관성과 반복가능성같은 과학적 방법론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분류학의 대립구도로 발전해 왔다고 요약할수 있음. 그리고 그렇게 분류학이 발전하면서 최종적으로 분기학이 성립되어 마침내 모든 주관적 감각을 거부하고 진화의 눈으로만 생명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인간의 태생적 직관인 움벨트와 단절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진단함.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가진 생명세계에대한 강력한 감각과 직관, 그 냄새와 소리와 중량감과 속도와 힘과 영리함과 폭력성과...그 모든 날것들에대한 생생한 감각을 상실해 버리고 인공물의 세계에 둘러쌓이게 되었다고 말함. 인간은 자연을 잊고 생명과 단절되었으며, 그결과 오늘날 일어나는 그 어느때보다 빠른속도로 진행되는 멸종과 생물다양성 감소에 대해서 어떤 피부감각도 느끼지 못한채 먼나라 일로 여기고 있다는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런 사태를 만든데는 인간으로부터 민속분류학과 움벨트를 앗아가고 생명에대한 관심을 제거해버린 현대 생물학에 그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림.
분명 인간이 생물에 대해 갖는 흥미와 사랑은 특별한듯함. 우리는 그것을 먹이로서든, 쓰다듬을 대상으로서든, 아니면 그저 관찰하는 대상으로서든, 생명에 대해 엄청난 관심과 호기심, 애호를 갖고 있으며 이런 일은 모든 연령 모든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남. 자연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수백개가 넘는 생물종을 구분하고 그것들의 특성을 말할수 있음. 아기들은 걷기도 전에 생명의 움직임과 기계의 움직임을 구할수 있음. 아기들이 태어나서 처음 말하는 50단어중 60% 이상이 생명과 관련된것임. 심지어 우린 무의식적으로 아기들에게 '핸드폰 인형' 이 아니라 동물 인형을 주고 있지. 생각해보고 둘러보면 어디에나 인간의 생명 애호에 대한 증거가 넘쳐남. 우리는 생명에 엄청나게 이끌리도록, 그것들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 분류하고 쫓고 먹고 사랑하도록 진화했음.
그러나 오늘날의 멸종의 파괴적인 속도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 놀랄만큼 적은것이 현대 생물학의 책임인지는 의문스럽다. 현대과학이 그들로부터 움벨트를 앗아가기 훨씬 이전부터 그들은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었음. 분기학이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정타를 가한것이 80~90년대인데, 이미 선진국의 대중은 한참 전부터 자연과는 단절되었기 때문임. 따라서 자연에대한 무관심의 원인을 분기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분류학이나 50년대부터 시작된 분자생물학에서 찾는것은 인과관계가 잘못된것이라 생각함. 그보다는 산업, 주거나 교육문화의 변화, 도시화, 즉 사회적인 변화들이 훨씬 더 중요했을것임.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 역시 맘에 들지 않음. 그리고 한편으론 저자가 직관과 과학의 대립구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과학(정확히는 현대 분류학)의 역할을 잘못 규정했다고 생각함. 저자는 과학이 제시하는 생명의 질서와는 별개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문화에서 직접 느끼는 생명의 질서를 통해서 각자의 움벨트를 유지하고 각자의 분류학을 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함. 그렇게 함으로서 생명과 더 가까이 있으며 그들을 느끼고 연결될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실제로 우리가 어떤 분류학을 하는지는 생명을 구하는 일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고 생각됨. 게다가 각자의 분류학을 한다는것도 이상한 이야기임. 왜냐면 생명의 질서는 분류로만 느낄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임. 분류학이 생명 진화의 역사라는 질서를 밝힌다면, 각 생명이 특정 시점에서 실제로 살아 숨쉬며 만드는 자연 속의 질서는 생태학과 동물행동학으로 파악할수 있는것임. 생명은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 온 길만이 질서인것은 아님. 그들이 살고 있는 방식 역시 질서지. 우리는 생명의 역사에 관해서 최신 분류학을 받아들인채로, 즉 물고기라는 강(class,분류군의 하나)은 없다는걸 인정한채로, 다시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그들의 위치와 다른존재와의 상호작용을 이해할수 있음. 그 안에서 다시 물고기들은 물고기가 되고 폐어는 소보다 다른 물고기와 가까워짐. 왜냐면 그들은 소가 사는 세계가 아니라 그들이 사는 세계, 바다에서 살아가니까. 소와 상호작용하는 생물과는 다른, 바다생물들과 상호작용 하니까.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할수 있음. 그것이 진정한 생명에 대한 이해라고 난 생각함.
상업적인 노림수든, 아니면 자신의 이론에 너무 심취해서든, 직관과 과학의 대립구도를 저자는 너무 과대평가 했다고 생각함. 움벨트의 힘도.
예를들어 에른스트 마이어로 대표되는 20세기 진화분류학자들이 끝까지 분자생물학적 분류학과 분기학을 거부한건, 저자의 생각처럼 정말로 움벨트가 그정도로 거부하기 힘든 강력한 직관이기 때문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함. 일단 나부터도 생물을 사랑하지만 그런 거부할수 없는 움벨트를 갖고 있지 않음. 폐어가 소에 더 가깝다는 사실도 바로 받아들일수 있고 그건 내 직관이 보는 세계에 전혀 균열을 일으키지 않음. 모든것은 계속 조화로울수 있음. 만약 움벨트가 그토록 저항하기 힘든 힘이었다면 왜 움벨트를 자발적으로 거부한 수리분리학, 분자분기학, 분지학이 등장한걸까? 그들은 움벨트에 저항할수 없었던게 아니라, 자신이 삶을 바쳐온 방법론과 그것으로 얻은 전문성을 포기할수 없었던것일테지. 이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되풀이되는 일임. 게다가 상업적인 노림수라고 봐줄수 없는 부분도 있음. 형태를 무시한 분자분류학과 달리, 분지학은 형태로 회귀하였음. 분류군들이 공유하는 새로운 진화적 특성이란것은 결국 표현형이기 때문임. (더해서 사실 분자분류학이 분류의 기준으로 삼는 생물분자도 표현형이고 따라서 감각가능한 형태이지만 단지 주관성이 배제될수 있을뿐임) 그러나 책에서 이 부분은 어쩐지 얼버무리듯 지나간다는 느낌이 있고, 형태-감각-주관-움벨트 진영과, 측정가능한 특성-자료-객관성-과학 진영의 깔끔한 대립구도를 이어감. 이를 통해서 일종의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분지학과 분자분류학이 완벽히 우측 진영의 특성만 가진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킨 것이라면 이것은 일종의 기만임.
룰루비데만 안 묻었어도 좋았을텐데 - dc App
재밌네, 함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