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동 세계전집에서 나온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읽고 든 생각
인스타에 조금 긁적여본 내용이라 걍 그대로 긁어와봄 (혹시 지인있으면 당근을 흔들어주세요)
1. 불행이란 제각기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톨스토이가 말했다. 거기에 덧붙임을 허락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불행함이야말로 이해의 시발이라고 생각한다.
2.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쏙 빼놓고 행복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착각한다. 그러나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두 개의 단계를 밟을 것이다. 우선 타인의 불행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은 유아적인 단계로 고통이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단계이다. 다음으로 그것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은 주의적인 단계이다. 고통이라는 부조리에 대해 그것이 부조리인지, 만약 부조리가 아니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부조리가 맞다면 그것에 무엇으로써 대항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다소 전략적인 단계이다.
3. <미국의 목가>의 '스위드'를 바라보는 '나'가 꼭 그러하다. '나'는 신화 속의 영웅처럼 추앙되고 선망받는 스위드를 바라보며 그에게는 꼭 불행이 없을 것처럼만 생각한다. 그러나 스위드에게 누구 못지 않은,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가정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소설의 제목 <미국의 목가>는 실은 목가적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 스위드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산산조각이 나 다시 붙일 수도 없는 인생을 사는 미국인의 가치관에 대한 비아냥인 것이다.
4. '나'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나'는 노련한 소설가이다. 그런 '나'에게 스위드의 삶은 잘 차려진 한 상의 식사와도 같다. 그걸 번안하여 한 편의 소설로 만들지 말지는 차치하고 그 자체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번민하고 고뇌한다. 스위드에게 슬픔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인간이 불행을 겪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으며,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그 무엇과 닮지 않겠는가. 그 누구와 닮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위드의 삶에 대한 관찰을 다음과 같이 끝마친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모든 목소리가 그들의 삶을 비난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5. 엿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예의를 잘 갖춘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좆같은 경험을 삶에 한 번 이상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세상이 이해와 화합으로 가득찰 것이다. 고통에 대한 사람의 배움은 언어로 전수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역사가 깊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