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전에 자연과학이랑 공학에서 고전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논지의 글을 올렸던 닝겐입니다. 쓴 김에 경제학에서 고전의 의미도 논해 보려고 합니다. 고전 강독이 매우 유익하다는 인식이 널리 인정받는 인문학과, 정형화된 교재로 정형화된 커리큘럼을 공부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경제학은 위치가 모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고전의 중요성은 어느정도인가' 는 심지어 해당 교수들 조차도 말이 다릅니다.
현재는 경제학과는 영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한 때 경제학도로서 경제학을 팠던 제 입장에서도 이 문제는 다소 미스터리였습니다 수업시간에 경제학 전공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고전을 중요시하시는 분이 계시고, 자연과학과 동일한 커리큘럼을 추구하시는 분도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경제학(다른 사회과학 분과는 제가 깊이 파지 않아서 논하기가 어렵습니다)에서 고전의 역할에 대한 제 생각을 풀어 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전형적인 경제학과의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요즘이야 워낙 다른 전공에서도 경제학을 들으러 오시니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어느 대학교를 가도 경제학과 커리큘럼은
1학년 경제학 원론
2학년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경제수학 등등
3학년 화폐금융론, 경제통계학(Econometrics 라고 해서 응용통계학이라기보다는 경제학의 분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 2학년 과목인 경우도 있음), 산업조직론, 공공경제학 등등
4학년 응용 심화 과목들
이런 식으로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교재들은 앞서 설명했던 자연/ 공학 계열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대학 교수가, 대형출판사를 통해 출판한, 정형적인 제목을 가진 걸로 채택됩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현재 대학교에서 경제학 수업은 거의 자연/ 공학 계열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이 진행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전 강독을 단 한번도 하지 않은 채로 경제학사를 달고 졸업하게 됩니다. 오늘날 경제학이 상당부분 체계화되고 경제학자들 절대 다수가 경제학을 '과학' 으로 여기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죠. 간혹 고전 강독을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그 경우는 '경제학사' 과목에서 고전을 읽고 레포트로 제출하라고 하거나, '정치경제학'(오늘날 정치경제학은 게임이론을 기반으로 한 응용미시경제학의 한 분야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통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주교재로서 자본론 등을 강독하는 경우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제와서 경제학에서 고전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느냐, 구체적으로 말해 마르크스 자본론이나 케인즈의 고용, 화폐 이자에 대한 일반이론 그리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는 것은 무의미한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 라는 답변이 나올 것이라 많이들 기대할 겁니다. 실제로 요즘 젊은 교수들은 많이들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 지도교수님이 정년퇴임하시고 새 젊은 교수님이 제 지도교수님으로 오셨는데, 면담을 위해 그 분의 연구실을 찾아가 봤습니다. 그리고 서재를 둘러보니 예전 교수님과는 달리 '고전' 이라고 할만한 교재는 단 한 권도 없었습니다. 요즘 경제학의 경향을 생각해 보면 놀라울 일은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에서 고전의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또 많은 중년 경제학 교수님들과, 경제학사 전공 교수님들의 생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고전보다는, 좀 더 새로운 의미에서 고전을 찾을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앞서 언급한 자본론, 일반이론, 국부론은 여전히 경제학의 고전이지만, 그리고 이러한 서적을 읽음으로서 경제학사 지식을 얻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사실 경제학 지식을 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경제학은 비록 자연과학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정립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전에 정립이 끝나다 싶이한 미시경제학은 물론이고, 고전파와 케인즈학파로 갈라서서 끝없이 논쟁만 할 것 같은 거시경제학도 오늘날에는 경기변동론을 중심으로 상당부분을 포섭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이미 많은 분야가 정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경제학의 이론적 지식을 얻으려면, 고전보다는 교재로 공부를 해야하죠.
그렇지만 한편으로 경제학은 응용의 여지가 크고, 또 교재가 아닌 서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게임이론을 처음 공부할 때는 유명한 이준구 교수나 Varian 교수의 미시경제학으로 배우든지, 아니면 시중의 게임이론 교재로 공부하는 게 바람직 합니다. 하지만 게임이론 그 자체만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교재 내용으로 충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엘리너 오스트롬의 '공유의 비극을 넘어' 같은 서적이 게임이론이 어떻게 쓰이는 지 살펴보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경제성장론이나 분배론 교재는 시중에 널리 있지만,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 를 통해 좀 더 통합적인 논의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성장론과 분배론을 바탕으로 좀 더 정치적인 논의로 확장해 보고 싶다면 애스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등을 읽어 볼 수 있겠죠.
제가 윗 문단에서 언급한 책들을 보면 흔히 말하는 '고전' 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책들은 저자들이 이미 노벨상을 타거나 이에 준하는 권위가 있는 인물들로서, 해당분야 교수님들이 '명저' 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책들입니다. 자연과학의 경우 해당분야의 교수님들과 지식인들이 '명저' 로 인정하는 도서가 거의 없습니다. 기실 해당분야 박사학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분야의 고전은 단 한번도 읽지도 않는데다가 (전 글에서 말했듯이,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이죠.) '본문 + 연습문제' 식으로 구성된 교재나, 전문적인 논문 이외에는 해당 분야 권위자들이 공통적으로 읽는 서적은 사실상 없습니다.
경제학은 이에 반해 권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규범적인 성격이 있는데다가, 특정 모형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 적용할 여지가 많고, 기존의 모형이나 이론이 포착하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할 여지도 많습니다. 따라서 권위자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고전들(자본론 등등)은 그닥 주제거리가 안 되지만, 소위 '명저' 나, '오늘날의 고전' 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여전히 권위자들 사이에서도 통하는 주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사에 그닥 매료되지 않은 전공생이나 교양인들이더라도, 이들 책은 한번쯤 강독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경제학은 인문학적인 측면(즉, 규범적인 측면)과 자연과학적인 측면(사실로서의 측면)이 모두 있기 때문에 고전에 대한 접근도, 상극인 두 분야(인문학, 자연과학)의 중간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즉, 전형적인 교재 이외의 서적을 읽는 것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데에 유익한 활동이지만, 만약 독서의 범위가 '전통적인 고전' 으로 한정된다면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할 겁니다.
잡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맨큐꺼 경제원론으로 수업 잘듣고, 별생각없이 준구센세 미시경제학 듣다가 기절할뻔한게 생각나네요
좋은 글입니다.
나름 맞는 말임. 근데 나는 고전, 정확히 말해 원글에서 말한 명저들을 읽을 이유는, 대학원 이상에서라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이론을 받아먹고 이해하는 입장인 학부생과 달리, 기존 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잘 살펴보고 틈을 발견해내고 지적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진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론의 전개를 샅샅이 보면서 생각하는 방법 자체를 공부하는 게 필수불가결이기 때문.
경제학은 개인적으로 문이과 통틀어 날로 주워먹기 가장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해. 수리적 이해가 없이 문돌이들이 감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고, 사회적 이해가 없이 이과 출신이 컨텍스트를 이해하기 어렵거든. 그래서 학부생은 그야말로 이해 자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함. 진짜 총력을 기울여도 이해만 하는 데에도 너무 힘이 들지. 내내 소화불량 상태로 학교를 다녀야 함. 이런 사람들이 고전(내지는 명저)을 읽으면서 잘난 학자들의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건 건방진 짓이야. 당장 연습문제만 잘 풀어내도 감사할 상황이니까.
하지만 어찌됐든 학자로서 살고자 한다면 경제학 고전을 들이파는 건 어쩔 수 없는 길이 아닐까 싶다. 결국 사회과학은 아이디어에서 나오니까. '과학'이 원래 있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문의 실제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건 각잡고 텀페이퍼만 써봐도 알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