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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감상이 다르고 해석에 옳고 그름을 엄밀히 나눌 순 없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금각사>의 표면적인 요소에 정신이 빼앗겨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함. 이방인의 '뫼르소'를 보고 "카뮈는 뫼르소처럼 솔직하고 사회 억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구나!" 라고 해석하면 조금 곤란한 부분이 생기는 것처럼...

'살아야지'하면서 마무리되는 금각사의 결말의 인상과 연결지어서, 금각이라는 나를 옥죄고 세상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것을 스스로 불태우고, 미지의 외부 세상으로 나아가고 살아가려는 미조구치의 '성장소설'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음.
나는 <금각사>를 읽고 거기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영화 조커랑 비슷한 맥락으로 금각사를 방화한 후 진정한 악인으로 거듭나는 '반성장소설'에 가깝다고 보았음.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미조구치의 행동을 파악하는 주요한 잣대로는 '금각', '인생', '악(어둠)'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함. 금각은 이데아에 가까운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미의 기준이며, 미조구치의 말더듬고 못생기고 가난하다는 추함을 상기시키고, 인생과 동떨어지게 만들어 나만의 세상에 빠지게 만드는 소재라는 건 명확한 편이지.
인생에 대해서 주인공은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나의 유일한 긍지'라는 말처럼 외부 세계와 나를 분리시켜서 생각함. 하지만 동시에 자기처럼 추하거나 비슷한 존재를 만나면 동질감을 느끼고 거기에 마음이 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음. 세상과 단절된 우이코의 꾹 다문 입, 가시와기, 공습 전 금각사, 출분 후 바다에서 본 황량한 자연,,, 가시와기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절대로 닿지 않는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을 실현하고 미지가 없는 작위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추구했다면, 미조구치는 달랐음. 세상과의 융화를 원했고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걸 원함. 가시와기는 안짱다리는 자신이 타인과 동등한 취급이 되는 걸 혐오했으나, 미조구치는 다른 사람과 동등한 존재로서 세상에 살고자 한 차이가 드러남.
하지만 인생에 대한 인식은 미조구치와 가시와기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부정적인 건지 잘 보여줌.

"제 인생이 가시와기와 같은 것이라면, 부디 지켜주옵소서. 저로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으니까." (금각사에 대고 하는 말)

"가시와기가 암시하며 내 앞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해 보여줬던 인생에서는, 산다는 것과 파멸하는 것이 똑같은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그 인생에서는 자연스러움도 결여되어 있거니와 금각 같은 구조의 아름다움도 결여되어, 말하자면 끔찍한 경련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에 내가 크게 이끌리고 방향을 설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우선 가시로 가득한 삶의 파편으로 손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두려웠다..."

"쓰루카와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래로 삶 그 자체에 접하지 않고 지내던 나는 오랜만에 별개의, 박명하지는 않으나 훨씬 어두운 삶, 그 대신에 살아 있는 동안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삶의 움직임에 접해 고무됐다. 그의 "죽이는 방법이 미숙하지"라는 간결한 말이 되살아나 내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내 가슴에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 후도 산 꼭대기에서 교토 시가지의 엄청난 불빛을 향해 빌었던 기원의 내용, "내 마음의 암흑이, 무수한 불빛을 감싸는 밤의 암흑처럼 되게 하소서"라는 그 기도 문구였다."

"이것이 속세라고 나는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 등불 밑에서 사람들은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수많은 남녀들이 등불 밑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바로 눈앞에 다가온 죽음 같은 행위의 냄새를 맡고 있다. 이 무수한 불빛이 한결같이 사악한 불빛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부디 마음속의 사악이 번식하여 무수하게 불어나 광채를 발하며 이 눈앞의 무수한 불빛과 하나하나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것을 감싸는 내 마음의 암흑이 이 무수한 불빛을 감싸는 밤의 암흑과 동등하게 되도록 해주소서!"

"당시에는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행위, 여자를 밟았다는 그 행위가 기억 속에서 점차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자가 유산했다는 결과를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사금처럼 기억에 침전되어 언제까지고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악의 광채. 그렇다. 설령 사소한 악이라 하더라도 악을 범했다는 명료한 의식은 어느 틈엔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었다. 훈장처럼 그것은 내 가슴 안쪽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미조구치의 생각들을 보자면, 삶 그 자체로 고통이자 악을 행하는 것이며, 내면의 악을 발현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모든 사람이 내면의 악이 발현되어 평등해지는 삶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음. 금각은 미조구치를 세상과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미/윤리/법/도덕/규약같은 절대적 가치의 상징으로 볼 수 있고, 금각을 무너뜨림으로서 악으로서 혼란스러워지는 미지의 세상을 꿈꿨다고 봄. 초반부터 끝까지 직접적으로 미조구치는 '악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묻고 답을 해온 것이 드러남.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결말에 있는 '살아야지'라는 말이 상식적인 선에서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음.

그건 창부의 배를 밟고, 엄마의 기대를 배반하고, 노사에게 도발하고 화를 자극하면서 조그만한 악을 하나하나 시험해본다는 걸 볼 수 있는데, 후반부에 가서 노사(악한 존재)가 "알고 있으니 어쩌자는 건가? ... 아무 소용없어. 도움 될 게 없다구"라는 노사의 말을 듣고 악이 가능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뇌피셜이긴한데...) 출분을 결심함. 여기서 고향의 바다를 보러가는 출분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자살을 은유한다고 생각함. 퉁소와 사전을 팔아치우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가장 불운한 방향의 고향의 어두운 바다로 가는건, 거의 확실한 자살 징후임. 긴 거리를 곧장 걸어서 어두운 바다에 도착했으나 자살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주변에 보이는 황량한 자연과 시든 풀과 유약한 잡초들이 마음을 끌었기 때문임. 가시와기는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것'을 보여 인간은 잔악해진다고 보았는데, 인생이라는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연극 혹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도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음. 반면 미조구치는 자기와 동질감을 느끼는 '황량한 자연'을 보고 금각을 불태워야겠다는 악의 상념을 획득하고 살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꿈.

오히려 금각사가 성장소설이라면 바다 속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이 더 성장에 가까운 그림이라는 걸 쓰루카와를 통해 보여줌. 미조구치:쓰루카와 = 음:양 의 관계에 있지만, 쓰루카와는 미조구치의 생각을 맑게 번역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동전의 양면이지만 결국은 한 동전이라는 것. 쓰루카와의 자살은 가장 밝은 양의 방향이었고, 미조구치가 자살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음의 방향이고 성장소설이 아니라고 보이는 이유임. 편지의 마지막 내용이 미조구치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진심이고, 금각사를 불태우면서 주인공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걸 쓰루카와를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줌. "지금 생각하면 이 불행한 연애도 나의 불행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날 때부터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내 마음은, 환하게 밝은 세계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노사라는 한낱 인간에게 저지르는 악은 무의미하고 부질없고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걸 미조구치는 깨달았고, 금각이라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만이 소멸될 수 있다는 악의 행위를 되찾음. 모든 게 부질없고 절대적인 건 없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깨닫고 삶의 행복과 일상을 되찾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던데, 미조구치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절을 불태우는 악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모든 걸 파괴하는 불이 일시적인 절을 없애는 게 세상의 이치이자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음.

금각사를 보고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라는 교훈을 얻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듦.

추가적으로 많은 다른 작품에서는 예술과 범죄가 엮여서 하나로 승화되는 경우가 많은데(ex.쥐스킨트의 향수, lol 진), 금각사는 다르게도 예술작품을 불태우는 범죄를 해석함에 있어서 예술을 범죄와 서로 다른 차원에 놓고 철학을 전개하는데, 동시에 그런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가 자신의 추함을 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이중성을 획득하고 있는 구조는 정말 현대철학적이기도 하고 불교적이기도 하고 정말 입체적이고 대단한 통찰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세줄 요약
1. 미조구치는 삶 자체를 악의 행위로 봄
2. 금각사는 그걸 옥죄었지만, 불태우고 "살아야지"함
3. 그래서 금각사는 반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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