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하려면 대충 어떤식으로 반박해야할까
[일반] 카뮈 부조리는 반박불가능인가?
익명(182.226)
2024-03-02 14:16
추천 1
댓글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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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제 인간이 세계를 증명하면 됨 ㅇㅇㅋㅋ
그건 카뮈가 진화를 몰라서. 무목적적이고 무의미한 세계로부터 목적론적으로 보이는것과 당위처럼 보이는것들이 생겨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서임. 이 모든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지극히 조리있는데 부조리가 어디에 있다는거야. 최종적으로 의미란것은 오직 다른 존재와 특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생물 속에서만 만들어짐. 예를들어 어떤 분자만 특이적으로 수용하는 효소와 그 분자의 관계는 고유하고 독특하며,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됨. 이런 주관적 관계가 무수히 반복되면서 형성된것이 생명임.
다윈은 너무나 많은 맞는 말들을 했다고 알려져있지. 비비원숭이를 이해한 사람은 형이상에 대해 로크보다 더 많은것을 이해하고 있다 말했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는말. 부드러운 몸을 가진 생명체에겐 뾰족한 형태를 지닌것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님. 그것이 몸을 뚫을수 있기 때문에. 단지 아무렇게나 존재하고 결합되고 흩어지는 무생물과 달리 생물은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스스로의 경향을 지니고 있음. 그렇기에 그런 존재에게는 다른 존재가 '주관적' 의미를 가지게 됨. 주관성과 의미란것은 생명에서 탄생한것이며, 이런 시스템에서만 나타나는 성질임.
의미는 오직 우리 의식을 통해서만 드러나지. 어떤 분자의 관계도 고유하고 독특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음. 오직 인간의식을 통해서만 가치가 부여됨. 최종적으로 의미는 생물 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해서 지어냄.
조리가 있다 없다 하는 감각 자체가 어디에서 기원했으며 대체 조리, 의미, 주관, 상호작용, 존재가 무엇인지, 부조리란것을 논하는 인식적 토대에대한 성찰이 없으면 언어가 무엇을 지시하는지조차 불분명한 감각에대한 독백에 불과하게 되지. 형이상학은 단지 감각에대한 독백이어서는 안되고 실재에대한 본질적 해명이어야 함. 누군가는 실존주의가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님. 어쨋든 우리는 본질보다 선행하는 실존을 말한단점에서 이 모든것들이 우리에게 무슨의미인지를 말하는것이고, 그렇다면 이 모든것들과 우리 자신이 어떤것인지가 정말로 중요해지지.
결국 단어 싸움이네. 내가 믿는 신이 최고라는 경쟁. 조리라는 신과 부조리라는 신
분자들, 또 원자들의 관계는 고유하고 독특함. 각 원자들의 전기적 성질에 의해 그것들이 결합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그것은 분자의 구조를 결정함. 그리고 분자의 구조는 다시 20여개의 아미노산의 구조를 결정하고, 아미노산은 펩티드를, 펩티드는 단백질의 구조를 결정하지. 결국 모든것들은 그렇게 표면 전기화학 성질에 의한 상호작용 방식을 갖게됨. 물분자에서 수소원자 두개가 산소원자로부터 이루는 각도는 정확히 정해져있으며, 어떤 분자가 어떤 분자와 더 잘 결합하고 결합하지 않는지도 결정하지.
실존주의는 형이상학이기 이전에 현상학이잖아
거기다 진화론 운운하는 게 넌센스임
분자가 결합하는 것을 은유로 삼는 사람은 조리를 믿고 쿼크나 끈이론, 양자역학을 은유로 삼는 사람은 부조리를 믿을꺼라 생각된다.
생물은 20개의 아미노산이 조합된 수십만가지의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분자들은 각자의 고유한 형태에 따라 다른 물질들과 상호작용하는 성질이 달라짐. 결과적으로 60억 인구중 너만을 사랑하는 나와 나만을 사랑하는 너의 특별한 관계처럼, 무수한 단백질들은 어떤것과 결합하고 하지 않을지 고유한 관계가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모든 복잡성이 나타남. 생명은 고유하고 특이적인 결합들로 이루어지며, 거대하게 발달된 개체 역시 그 개체의 고유한 생리적 생태적 특징 속에서 세계의 다른존재들과 고유한 관계를 맺고있음. 전지자의 책에서 모든 존재는 대등하고 공평하겠지만, 각 생명체의 주관성 속에서 모든 존재들은 차등적임. 생체분자와 잘 상호작용 하지 않는 중성미자는 그 존재조차 오랫동안 알수 없었을 정도로 우리게에 의미가
없었으나 햇빛은 우리에게 정말로 큰 의미가 있지. 생명이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에는 주관성과 의미가 생겨났음. 주관성이란것은 한 시스템에 대하여 그 시스템의 기능과 관련된 고유한 관계와 정확히 같은 말임. 우리가 의미라고 느끼는것, 주관적이라 느끼는 그 무언가(대체 그게 뭐란말인가!), 목적, 당위, (철저하게 주관적인)느낌....그런것들은 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인것임. 비유도 은유도 유비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로써. 의미와 주관 그것의 실체는 복잡한 시스템의 특이적 상호작용란것임.
실존주의를 무엇으로 분류하든, 결국 우리가 발딛고 선 이 대지 위에서의 삶 그 사태에대해 말할수밖에 없는거지. 그런데 우리는 혼자 존재하나? 살고, 죽는다는 사태는 진실로 간주하면서, 우리가 진화했고, 복제되는 분자들로 이루어져있고, 단백질로 통제되고 작동한다는 사태는 과학이라는 범주로 '미심쩍은것' 으로 간주되어야할까? 살다가 죽는다는, 인간이 피할수없는 운명에대해 우리가 알게된 방법과 우리의 물질적 본성에대해 알게됭 방법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으므로 담백하게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생명이고 생명이 바로 의미의 기원이란것을 알수있는것임. 세상은 조리로 가득차있음. 우리가 세상을 부조리하다고 느끼게 만들정도로 아름다운 복잡성을 출현시킬수 있는 그 모든 메커니즘에 조리가 있음.
"대칭"
전지전능지선한 신이 있으면 됨 - dc App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봐보셈
내가 그걸읽고 고민에 빠졌어 진짜로 우리가 하는 모든행동이 정당화되지않는걸까?
의학을 발전시키는건 질병이 있는 사람들을 낫게 해주기위해서인데 거기서 또 왜 질병을 낫게 해야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거기에도 또 이유가필요한거라고? 그 자체로 정당한것아닌가?
ㄴ 우리가 그게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정신의 근원적 의미는, 대부분 믿음에 기인한다고 봄 그걸 객관의 대칭성을 조화롭게 반영하는 가는 둘째치고
그게 뭔말이여 쉽게말해봐
그니까 이게 우리의 본질을 몰라서 나오는 질문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원해서. 이게 끝임. 왜 원하는데? 원하면 해야되는거임? 이런 질문으로 무한퇴행할 이유가 없음. 왜냐면 우주 최초로 우리는 원하는 존재니까. 그게 우리의 본질임. 우주는 어느순간 있는 존재에서, 원하는 존재를 탄생시켰음. 원하는 존재다. 여기에서 모든게 시작됨. 이제 원하는것을 해도 좋은가 아닌가는 실존의 문제나 형상학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윤리의 '쉬운 문제' 가 될수 있지.
태양이 만약 생각할수있다면, 나는 왜 빛을 내며 불타고 있을까요..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면 해결되게 되지. 그냥 그렇게 만들어져있는거야.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냥 그렇게 만들어져있는거임. 거기엔 의미가 없음. 우리가 원한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는거지. 카뮈같은 옛날 사람들이 고민한건 이런 사실을 몰랐기때문임. 그들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몰랐음.
이건 ㄹㅇ 생각해본적이없네 그냥 정당화자체가 필요없다는거지?
사는게 의미 있다 없다 하는데, 그 의미란게 대체 무엇인지를 면밀히 분석을 못했다는것임. 그럴수가 없었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삶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정말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것임. 사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철학 개념 존재와는 구분되는, 실존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써 삶을 다른 존재의 존재함과는 다르다고 말하는데는 성공했지. 근데 그게 왜 다른질 모른거지. 왜 나무는 존재하는데 인간은 실존하는건지를. 그게 바로 우리가 누구도 대체할수 없는 나 자신 자체의 주관적 세계경험이라는 불가사의한 사태라는, 생명의 본질인것인데.
그러므로 이 모든 현상들은 물질이 자기조직화되고 복제되고 경쟁하면서 만들어진 성질에 의해 나타난것며 그러는 과정에서 복잡한 시스템들은 다른 존재와 특이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되었음. 그것이 의미의 원형이며 실체임. 결국 남겨진것은 부조리가 아니라 조리속의 불가사의임. 대체 '주관적으로 경험한다는것' 은 무엇인가 하는. 이것이 오늘날의 철학자들이 의식과 감각직 문제에서 해결하고자 하는것이지.
인간은 원하는 최초의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퇴행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인간이 메타인지를 하지 못한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대상화 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음. 나의 생각에 끊임없는 질문이 가능한거임. 그래서 우리는 이유를 물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존재 자체에 물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함.
결국 정말로 심오한 문제는 객관성과 주관성이 대체 무슨 뜻이냐 하는것임.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라는 말을 누구나 너무나 쉽게 사용하지만 이만큼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개념은 없음. 그렇다는걸 인식한 사람도 드물고. 근대철학자들은 너무나 조심성없이 인지 시스템인 자신들을 그대로 본딴 인식주체라는 개념을 만들고 세상을 인식주체와 그것에 인식당하는 객체로 나누어버렸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얼렁뚱땅이고 심지어 대체 주체라는게 어떻게 가능한건지도 설명하지 않음.
그런데 인간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한 이유는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바뀔 수 있음. 만약 우리가 존재에 대한 이유가 너무나 자명해 보임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선이해에 대한 자각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함. 이를테면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런데 이런 선이해에 대하여 하나 둘 씩 알아갈 때 쯤에는
어떠한 진리도 절대불변이 아니라는 것을 느낌. 그래서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함
대체 물질로 이루어진 무언가 안에서(안에서? 어디에? 애초에 공간이 여기에서 등장해야하는건 맞는지?) 어떻게 내면이 만들어지고 외부에서 접근할수 없는 자신만의 경험을 하는지, 이 불가사의는 의식과 감각질이라는 철학의 한 세부분야의 문제지만 본질적으로 주관성이라는 가장 문제적인 개념과 직접적으로 이어짐. 설탕은..어떤 성질을 지니는 화합물이다...라는 객관적 설명이 아니라, '설탕으로서' 존재한다는것은 어떤것이다라는, 설탕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말할수없는 이 말도안되는 문제, 네이글이 던진 '박쥐가 된다는것은 대체 어떤것인가' 하는 그 문제란것임.
물론 인간은 부조리를 느끼지. 근데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설명된다면 거기엔 조리만 존재하는것이겠지. 우리가 삶을 부조리하다고 느끼게 만든 조리. 난 부조리가 더이상 철학의 진지한 문제가 아니며, 우리 실존의 불가해성만이 유일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로서 있는다는것, 그것은 정말로 불가사의한것임. 그 외의 모든것이 조화롭지만 오직 이것만이 불가해함. 차머스는 이것을 어려운 문제라고 선언했음. 세상 전체를 통일하는 조리들 속에서 유일하게 고개를 치켜든 '질적으로 다른 사태' 기 때문임.
그래서 정당화가 가능하단겨 불가능하단겨 필요없단겨
'정당하다' 라는것의 감각과 의미 자체가 행동원리에 당위를 가지고있는 존재에게만 의미있는것이란 이야기지. 헬륨은 정당한가? 태양은 정당한가? 이상한 질문 아니냐. 이건 다 동의한다고. 그건 당위의 범위가 아니에요 라고. 그럼 대체 어디부터인가? 그래도 된다, 그러면 안된다, 그래야만 한다라는것은 우리에게 무슨의미일까?
정당화는 하나의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영원한 과정이라고 생각함.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지프 처럼 계속 미끄러지지만, 그것 자체를 긍정할 수 있어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함
당위성은, 다른 개체와 관계함에 있어 손해보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기제일뿐이지. 다시말해서 이건 우리와 타인의 관계에대한 하나의 행동원리일뿐임. 쉽게말해서 이건 사회적 동물의 규칙이란것. 규칙은 적용될수 있는 범위가 있음. 체스를 할때 내가 이 말을 여기 놓아도 되는지 아닌지는 체스 규칙이 정하지만, 내가 닭고기가 아닌 생선을 먹어도 되는지는 체스규칙이 정하는게 아님. 당위는 존재들의 관계에대해 이야기하는것이지, 존재함 자체에 대한것이 아님. 그것은 월권이고 심각한 착각임.
질문하나할게 내가 살아야할 이유로 '의학을통해 질병을없에겠다.' 라는 이유를 말을했다면 또 '왜 의학을 통해 질병을 모두없에야하는가 꼭 그래야할이유가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정당화가가능한가? 또는필요없는가? 대답을한다면 또 정당화를요구할텐데 과연 그렇게 정당화를요구하는것이 정당한가? 난 이게 궁금한거야
그러나 인간은 너무도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모든것을 당위의 눈으로 보도록 진화했지. (마찬가지로 모든것을 목적론적으로 보도록 진화했기에 천둥이 치는건 신이 노해서고 눈이 있는건 보기 위해서다라는식으로 세계에대해 목적론적 오해를 하고 있지) 결국 진화는 우리 본질에대한 거의 모든것을 설명하고 거의 모든 오해를 분쇄해줌. 대닛이 진화를 '모든것을 녹이는 산' 이라고 한건 이유가 있음.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문제는 해결될수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생물학이 단지 전문가들이나 배워야 할, 나와는 관계없고 실존이나 철학과는 더 관계없는 정보덩어리에 불과하다 생각함.
언젠가 논리적으로 의미의 필연성과 성질을 역설할 수야 있겠지만 지금 인류가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 이룬 이해는 이런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되진 않았다고 봄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의미는 자의적인 것이고, 자의성의 근원엔 믿음이 존재함 이 믿음은 그저 의식하고 기억함으로서 자라나기 때문에, 이해되고 분석될 수는 있더라도 정당화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함 가치의 근원에 대한 가치판단은 뭔가 좀 모순적이니까?
거기서 한번 더 정당화 할수 있지. 우리가 그걸 원한다고.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정당화의 영역을 벗어남. 우리가 원한다는 사실 자체는 단지 그저 그렇게 정해진것이며 정당화의 영역을 벗어난것임. 우린 단지 우리가 원하는걸 긍정하고 정당화하고, 그에대한 도덕적 사유를 하면 됨.
한마디로 '내가 원한다' 로 모든 정당화가 끝난다는거지?
정당화라는 행위를 정적인 하나의 결과로 판단한다면, 불가능함. 그러나 정당화를 하나의 과정으로 가정한다면, 탈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누빔점과 같은 임시적인 정당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함.
원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될수 있는가? 는 바른 질문이 아님. 왜냐면 당위는 존재나 사태에 내재된것이 아니라, 두개 이상의 존재의 관계에서 발생하는것이기 때문. 따라서 우리는 다시 그래도 좋은가? 라는, 타인을 생각하는 건설적이고 현실적인 윤리학으로 되돌아 와 실제적인 문제를 논할수 있음. 당위가 정지하는 지점을 인식함으로써.
님 솔직히 여기 셋 다 다른 이야기 하고 있어서 통합적으로 뭔갈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은 아닌 듯 해요... 그냥 이런 견해가 있구나 식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 하지만 제 입장을 정리하자면 논리적인 타당성, 객관적인 정확성, 이런 것들은 모두 기존의 믿음을 강화하거나 약화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정당화가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정당성 자체가 의식이라는 생성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애초에 의식이라는 주관에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위계가 안 맞다고 보면 될 듯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개념은 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습니다. 다음은 세 가지 주요 비판입니다: 1. **허무주의 대 실존주의**: 일부 비평가들은 카뮈의 부조리 개념, 특히 그의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에 요약된 부조리 개념이 허무주의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고 주장합니다. 카뮈는 삶에 내재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비평가들은 그가 만족스러운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카뮈가 인간 존재에 내재된 자유와 책임을 완전히 수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2. **개인 대 집단 행동**: 비평가들은 또한 카뮈가 부조리에 맞서는 개인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집단 행동과 사회 변화의 중요성을 소홀히 했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인 반항을 통해 삶의 무의미함에 맞서는 부조리한 영웅에 대한 카뮈의 강조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모호함과 불일치**: 카뮈의 부조리 개념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모호성과 비일관성입니다. 일부에서는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해석의 여지가 있어 다양한 맥락에 일관되게 적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비평가들은 카뮈 자신의 행동과 저술이 때때로 그의 철학적 입장과 모순되어 그의 사상의 일관성과 무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합니다.
예아!
내가 비판하려는 글 써보려고... 푸코의 말과 사물을 요약해서
푸코하고 관련이있음?
푸코는 많은 사람들이 구조주의라고 했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말과 사물까지의 저작이 구조주의적이라고 함. 그리고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적 조류로 통함.
푸코의 말과 사물은 어느정도 사르트르, 그리고 카뮈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음. 사르트르는 이 실존주의를 말하면서 "인간" 개념을 불변하는 개념으로 고정하려고 했고, "주체"라는 개념을 강조했지만,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과학사 혹은 인간과학의 역사의 변화를 써냄으로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그 당시 겨우 150여년밖에 안 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했고 이에 따라 사르트르는 주체를 오히려 축소하고 있다고 말함
토마스 네이글의 저작 또한 딱 이 푸코의 비판에 속해 있음
푸코가 허무주의나 실존주의에대해 비판한거에대해 좀더 말해줄수있나?
흠ㅋㅋ 오늘 안에는 못함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