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은 응축되어 있는 문장들을 풀어주고 유난히 넓은 행간들을 채워주고 저자들이 의지했지만 명시하지 않은 레퍼런스들을 추가하고 최신 연구 성과들에 비춰 레퍼런스들 및 저자들의 (빅)히스토리적 거대 사실 판단들을 평가하는 자세한 주석서가 필요한 책이다(그 사실들에 대한 저자들의 해석이 얼마나 그럴듯한지까지는 다루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비판적 연구서의 몫이다). 대표적 유럽 대륙어들과 영어와 일본어로는 자세하지 않은 주석서는 이미 나와 있을 것이다. 최근에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라는 한국어 책이 출간되었는데, 반갑기 그지 없는 책이지만 두께로 보아 자세한 주석서는 아니다.

아래는 「계몽의 변증법」의 Zur Neuausgabe 와 Vorrede 를 번역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은 참고만 했다. 국역본이 읽을 만 했다면 애초 번역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 영역본도 구 영역본보다는 낫지만 완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분명히 오역이 있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있었고 있을 것이다. 비판이론에 관심이 많은데 마침 독일어 독해도 입문은 되어 있는 분들이라면 원문을 대조해 읽으시기를 권한다. 원문을 파일로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
-
-
「계몽의 변증법. 철학적 단편」

프리드리히 폴록을 위하여

1
새 판에 붙임

「계몽의 변증법」은 1947년 암스테르담의 퀘리도에서 출판되었다. 점진적으로만 알려진 이 책은 상당 기간 동안 절판 상태에 있었다. 우리가 이 책을 20년 이상 지난 후 재출판할 때, 여러 방면의 재촉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관념들이 오늘날에도 타당하며 우리의 이후의 이론적 노력을 크게 결정했다는 생각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추동했다. 외부인은 우리 둘이 하나 하나의 문장에 어느 정도로 공동책임을 지고 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긴 구절들을 우리는 상의하여 결정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결합된 양 정신적 기질들의 긴장은 그것의 생동적 요소이다.

우리는 그 책에서 말한 모든 것을 변함없이 붙잡고 있지는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역사적 운동에 대립시키는 대신 진리에 시간적 핵심을 부여하는 이론과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국가 사회주의 테러의 종말이 시야에 들어 왔던 시기에 집필되었다. 그럼에도 그 정식화는 적지 않은 지점들에서 오늘날의 현실에 더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그때 관리되는 세계로의 그 이행을 그다지 무해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대치하도록 객관적으로 강요되는 두 거대 진영들로의 정치적 분열의 시대에 공포는 계속되었다. 제3세계 분쟁, 전체주의의 부활은 역사적 막간극에 불과하지 않은데, 그것은,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당시 파시즘이 역사적 막간극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보 앞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비판적 사고는 오늘날 자유의 잔재들에, 진정한 휴머니티를 향하는 조류들에 가담할 것을 요구한다. 비록 그것이 거대한 역사적 경향에 직면해서 무력해 보이더라도 말이다.

이 책에서 인식된 총체적 통합으로의 전개는 중단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독재와 전쟁을 거쳐 실현될 조짐을 보인다. 계몽주의가 총체적 통합과 결합하여 실증주의로, 사실인 것의 신화로, 마침내는 지성과 정신적대성의 일치로 변질되었다는 이 책의 진단은 압도적으로 확증되었다. 우리의 역사 개념은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실증주의적으로 정보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것은 철학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을 집필한 미국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독일로 돌아왔다. 그 당시 50세 생일을 맞아 이 책을 헌정했던 것처럼 다시 오늘 75세 생일을 맞아 이 책을 헌정하는 프리드리히 폴락과 함께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정식화된 개념을 더 발전시키자는 생각으로 사회연구소를 재건했다. 우리의 이론의 발전 및 그 발전과 연관된 공동 경험들에서 그레텔 아도르노는, 이미 초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고의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수십년이 지난 책의 개정판에서 통상적으로 그런것보다 훨씬 수정에 인색했다. 우리는 우리가 썼던 것을 심지어 명백히 부적절한 지점들도 다시 손대고 싶지 않았다; 현재 상황에 맞게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은 새 책을 쓰는 것 못잖은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간접적으로라도 관리되는 세계로의 진행을 촉진하기보다는, 자유를 수호하고, 전파하고, 전개하는 것이 오늘날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 후의 우리 저작들에서 밝혔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오탈자와 그 비슷한 것의 정정에 만족했다. 그러한 절제를 통해 이 책은 증거 문서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동시에 그 이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969년 4월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W. 아도르노
-
-
서문

초판을 프리드리히 폴록에게 바치려 하는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의 50세 생일 전까지 전부 끝낼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하지만 과제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점점 이 과제가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실 우리가 기획했던 것은 왜 인류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대신에 일종의 새로운 야만적 상태로 빠져들었는가 하는 인식이었다. 우리가 서술의 어려움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시대의 의식에 대해 아직 너무 많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근대의 과학활동에서 위대한 발견들이 이론적 교양의 점진적 붕괴를 대가로 치른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의 일이 전문과학 학설의 비판이나 추진이라는 틀을 넘지 않는 한 아직 이 작업에 종사해도 무방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적어도 주제상으로는 전통적 분과학, 즉 사회학, 인식론, 인식론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렇게 정리된 여러 단편들은 우리가 그런 신뢰를 버려야 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학문적 전통이 실증주의를 신봉하는 청소부들의 손에 의해 쓸모없는 바닥짐으로 넘겨지는 곳에서는 학문적 전통을 주의 깊게 가꾸고 살피는 것이 인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문명의 붕괴라는 현대의 상황에서는 단순히 학문에 종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학문 자체의 의미가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완강한 파시스트들이 위선적으로 선전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휴머니티 전문가들이 순진하게 밀어붙이는 상황, 즉 계몽의 자기 붕괴에 직면하여 사상은 더 이상 시대정신의 습성과 방향에 기꺼이 따라가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풍조가 거부할 수 없이 사상이 상품이 되고 언어가 그 선전이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러한 타락을 추적하는 시도는 이 과정의 세계사적 귀결에 의해 완전히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 통용되는 언어적, 사상적 요구들을 따르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유일한 장애가 학문의 자기망각적 도구화로부터 발생하는 장애라면, 사회적 물음들에 관한 사유는 최소한 공식적 학문에 대립하는 지향들에 자신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향들 또한 생산의 전체과정에 장악되어 있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겨냥했던 이데올로기 못지않게 변했다. 예로부터 승리한 사상에 일어났던 것이 그것들한테도 일어난다. 승리한 사상이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비판적 요소로부터 벗어나와 순전히 기성체제에 봉사하는 수단이 되면,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옹호했던 긍정적 대의를 하나의 부정적인 것, 파괴적인 것으로 변하도록 추동한다. 18세기에 분서와 화형에 맞서 야비한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철학은 보나파르트 치하에서 이미 야비한 이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호교론적인 콩트 학파가 비타협적인 백과전서파의 후계의 지위를 빼앗고 이들이 저항했던 모든 것과 손잡았다. 긍정으로의 비판의 변질은 또한 이론적 내용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며 그것의 진리는 사라져 버린다. 현재는 물론 자동적으로 운동하는 역사가 그러한 사상적 전개마저 추월하며 또 다른 우려가 있는 공식적 대변자들은 자신들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준 이론을, 그것이 아직 완전히 몸을 팔지는 않은 동안 청산한다.

따라서 그 자신의 죄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사유는 학문적 및 일상적 개념어의 찬동적 사용뿐만 아니라 저 반대파적인 개념어의 찬동적 사용 또한 박탈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지배적 사상방향들과의 조화를 지향하지 않는 어떤 표현도 더는 생기지 않으며 케케묵은 언어가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기구들에 의해 확실하게 보완된다. 지출 증가에 대한 우려에서 영화산업이 자발적으로 고용한 검열관들에 모든 구역의 유사한 검열관들이 상응한다. 교정자의 자동적인 예비검사에서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원고 심사원, 편집인, 개작자, 출판사 안팎의 대필자 등 일군의 직원들에 의해 하나의 문학 텍스트에 처분되는 심사는 그 철저함에서 그 어떤 검열도 능가한다. 그들의 기능을 전적으로 불필요하게 하는 것은 모든 유익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교육제도의 야심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확인과 확률계산에 일을 엄격하게 한정하지 않으면 인식하는 정신은 너무나 쉽게 터무니 없는 주장과 미신에 넘어간다는 견해에서 터무니 없는 주장과 미신이 탐욕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척박한 토양이 마련된다. 예로부터 금주령이 오히려 더 유독한 생산물의 입장을 허락했듯이 이론적 상상력의 차단은 정치적 광기의 밑거름이 된다. 사람들이 아직 그것에 빠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은 외부에 있는 검열 메커니즘 및 자신들의 내부에 심어진 검열 메커니즘에 의해 그것에 저항할 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우리의 작업에서 당면한 아포리가 우리가 연구해야 할 제1의 대상임이 증명된다: 계몽의 자기 붕괴. 우리는 사회에서의 자유가 계몽적 사상과 불가분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데, 거기에 우리의 결론 선취 오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들, 그것이 편입된 사회의 제도들 못지 않게 이 사상의 개념 자체가 이미 오늘날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행의 싹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똑같이 분명하게 인식했다고 믿는다. 계몽이 이 퇴행적 계기에 대한 반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계몽은 그 자신의 운명을 봉인할 것이다. 진보의 파괴적 측면에 대한 숙고가 진보의 적대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는 한, 그 맹목적으로 실용주의화된 사상은 모순을 지양하는 성격을 상실하고, 그 때문에 진리에 대한 관계도 상실할 것이다. 기술주의적으로 교육받은 대중이 어떤 전제주의의 마력에 기꺼이 빠져들었다는 수수께끼 속에서, 민족주의적 편집증에 대한 대중의 자기 파괴적인 동조 속에서, 그리고 모든 불가해한 부조리 속에서, 현재의 이론적 이해력의 허약함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단편들에서 계몽이 신화로 역행한 원인은 특별히 역행을 목적으로 고안된 국가주의적, 이교도적 등의 근대적 신화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 앞에서의 두려움에 경직된 계몽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이해에 기여했다고 믿는다. 이 경우 계몽과 진리라는 두 개념은 단순히 정신사적 개념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계몽이 전체로서의 부르주아 사회의 현실적인 운동을 개인들 및 제도들에 구현된 그것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표현하는 것이라면, 진리란 이성적 의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성적 의식이 현실 속에서 드러난 형태를 일컫는다. 지각될 때 사실들은 이미 학문과 상거래와 정치의 관행에 의해 상투적으로 정돈되는데, 그 사실들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근대 문명의 적자의 불안은 사회적 일탈에 대한 불안과 직접적으로 동일하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 철학에 대해 언어와 사고의 명료함이 요구되고 있지만, 이 개념조차도 그 관행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명료함의 개념이 소위 사실이나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고방식을 뚜렷하지 않은 장황함, 특히 이방인적인 것으로 금기시한다면, 정신은 점점 더 깊은 맹목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케케묵은 말로 혁신을 권하는 지극히 성실한 개혁자조차도 진부한 범주적 기구들과 그것들 배후에 숨어 있는 악한 철학을 차용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것은 구제 불능 상태이다. 거짓된 명료함은 신화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신화는 항상 어두운 동시에 밝았다. 예로부터 신화의 특징은 친숙성 그리고 개념화의 노고의 면제이다.

오늘날 인간들이 자연으로 떨어지게 된것은 사회적 진보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경제적 생산성의 향상은 한편으로는 더 공정한 세상을 위한 조건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 기구와 그것을 조종하는 사회적 집단들에 인구의 나머지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우월성을 부여한다. 개인은 경제적 세력들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다. 그 때 경제적 세력들은 자연에 대한 사회의 강제력을 상상할 수 없는 높이까지 밀어 올린다. 개인은 자신이 섬기는 기구 앞에서 사라지는 반면, 이전보다 더 잘 이 기구에 의해 부양받게 된다. 불공정한 상태에서 대중의 무력감과 순종심은 그들에게 분배되는 물자의 양에 따라 커진다. 하층 계급의 생활수준의 물질적으로는 눈부시고 사회적으로는 형편없는 상승은 정신의 허울뿐인 확산에 반영된다. 정신의 진정한 관심은 물화의 부정이다. 정신이 문화재로 응고되어 소비 목적으로 반출되는 곳에서 정신은 녹아 없어질 수밖에 없다. 세밀한 정보와 번쩍거리는 오락의 범람은 인간을 똑똑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백치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헉슬리, 야스퍼스,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다른 문명비평가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같은 가치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인류가 완전히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계몽이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과거의 희망의 수복이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는 과거의 파괴로서 지속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존경할만한 교양이 교양 없는 사람들의 늘어나는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들인 특권이었다면, 20세기에는 모든 문화적인 것들을 거대한 도가니 속에서 녹여내어 위생적인 공장지대를 사들인다. 그것은 아마 문화의 저 옹호자들이 믿는 만큼 그렇게 가격이 높았던것조차 아닐 것이다. 문화의 바겐세일이 경제적 성과를 그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반전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현재의 관계들 아래서는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할 재화 자체가 불행의 요소가 된다. 과거 시대에는 사회적 주체가 결여되어 있는 가운데 그러한 재화의 양이 국내 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이른바 과잉생산으로 작용했다면, 오늘날 그것은 권력집단이 사회적 주체로 등극한 덕분에 파시즘의 국제적 위협을 낳는다: 진보는 퇴보로 역전된다. 위생적인 공장지대와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 폭스바겐과 스포츠 궁전이 둔감하게 형이상학을 청산하는 것은 아직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르나 그것들이 사회 전체 속에서 그 자체로 형이상학이 된다는 것, 현실의 해악이 그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장막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우리의 단편들은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논문은 뒤에 이어지는 논문들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합리성과 사회적 현실의 얽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연과 자연지배의 얽힘을 더 자세히 이해하려고 한다. 이때 계몽에 가해지는 비판은 맹목적 지배에 휘말려 있던 상태에서 계몽을 해방시키는, 계몽에 대한 어떤 적극적 개념을 준비해야 한다.

대략적으로, 첫 번째 논문의 비판적 부분은 다음 두 테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미 신화가 계몽이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퇴화한다. 이 테제들은 두 개의 보론에서 각각 특수한 주제에 맞게 개진된다. 제1 보론은 부르주아적 서구 문명의 초기 대표적 증언 중 하나인 오디세이아에 입각하여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을 추적한다. 중심에 서 있는 것은 희생과 체념의 개념인데, 그것들을 단서로 해서 신화적 자연과 계몽된 자연지배의 차이와 통일성이 증명된다. 제2 보론은 계몽의 무자비한 완성자인 칸트, 사드, 니체를 다룬다. 그것은 모든 자연적인 것을 자기 지배적 주체 아래 굴복시키는 것이 어떻게 결국 맹목적인 객체적인 것, 자연적인 것에 의한 지배에서 정점에 이르는지 보여 준다. 이 경향은 부르주아적 사상의 모든 대립들, 특히 도덕적 엄격함과 완전한 무도덕성의 대립을 없앤다.

'문화산업' 장은 계몽이 이데올로기로 퇴행했음을 보여주는데, 영화와 라디오에서 그 퇴행의 전형적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의 계몽은 무엇보다도 효과의 계산과 제조 및 보급의 테크닉에 있다; 그것의 고유한 내용에 따라 그 이데올로기는 기존질서와 테크닉을 조종하는 권력의 우상화로만 채워져 있다. 이 모순을 처리함에 있어서 우리는 문화산업이라는 것을, 그것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자신의 상업적 성격 제기, 경감된 진리에 대한 신조가 오랫동안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이 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의 분석은 객관적으로 생산물들에 내재하는 요구, 미적 형성물이고 그럼으로써 형상화된 진리여야 한다는 요구를 고수한다. 그것은 그 요구의 무효성에 즉해서 사회적 괴물을 증명한다. 문화산업에 관한 장은 다른 어떤 장보다 더 단편적이다.

테제들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반유대주의의 요소들'의 논구는 계몽된 문명이 현실적으로 야만으로 회귀하는 것을 다룬다. 자멸로 향하는 이념적 경향만이 아니라 실천적 경향 또한 합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단계에가 아니라 처음부터 합리성에 속해 있었다. 이 의미에서 반유대주의의 철학적 원사가 기획된다. 그것의 '비합리주의'는 지배적 이성 자체의 본질과 그것의 표상에 상응하는 세계로부터 도출된다. '반유대주의의 요소들'은 사회조사연구소의 경험적 조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연구소는 펠릭스 바이엘에 의해 창립되고 유지 운영되고 있는 재단 조직으로,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연구뿐만 아니라 히틀러에 굴하지 않고 계속된 독일 망명자들의 이론적 작업의 상당 부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처음 세 테제를 우리는 처음 프랑크푸르트 시절부터 수많은 학문적 문제들에 대해 함께 작업해온 레오 레벤탈과 공동으로 집필했다.

마지막 장에서는 스케치들과 구상들이 공개되어 있다. 그 중 일부는 앞 장들의 사상권 내에 속해 있으면서도 거기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이며, 일부는 앞으로의 작업에 속하는 문제들의 윤곽을 잠정적으로 그려본 것들이다. 그것들 대다수는 변증법적 인간학과 관련되어 있다.

1944년 5월 캘리포니아, 로스 앤젤레스

이 책은 전쟁 중에 완성된 형태 그대로, 텍스트에 본질적인 변화가 전혀 없다. 나중에 추가된 것은 단 하나, '반유대주의의 요소들'의 마지막 테제뿐이다.

1947년 6월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W. 아도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