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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상적, 혹은 망상적 아나키즘



브이 포 벤데타, 나는 이걸 영화로 먼저 봤다.

목소리 존나 쎅시한 가면남이 영차영차 하면서 칼질만으로 무쌍을 찍는 21세기 브리티쉬 사무라이 느낌이 나서 참 재밌더라.

재밌게 본 영화인지라 인터넷에서 다른 정보를 찾다가 원작이 소설이란 것도 알게 됐다. 근데 어라? 원작자는 이 영화를 싫어한다고 한다.


"내 소설을 미국식 민주주의 투사 이야기로 바꿔놔서 좆같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던가?

내가 보기엔 썩 괜찮은 영화였는데, 대체 뭐가 다르길래 원작자가 이렇게 땍땍거리는 걸까 궁금하더라고.

근데 또 엄청 궁금한 건 아니라서 기억 한켠에 묻어둔 채로 10년도 더 지난 올해에,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렀다가 발견한 게 이거. 브이 포 벤데타 만화가 되겠다.


대체적인 내용은 비슷하다.

영국은 파시즘의 물결에 뒤덮이고, 거기서 독재정권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인체실험을 당해서 흥칫뿡한 주인공이 복수를 하다가, 나만 좆된게 아니라 세상이 좆됐으니 세상에 빅엿을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깽판을 치는 내용이다.


읽고 난 다음 느낀 게, "작가가 왜 영화판을 보고 화를 냈는지 알겠다"싶을 정도로 민주주의랑 거리가 멀고 무정부주의 색이 강하고,

"작가가 왜 영화판을 보고 화를 냈는지 어이가 없다"싶을 정도로 만화판의 퀄리티가 애매하다. 영화판의 퀄리티가 높은 것도 있고.




예를 들어서 이 만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주인공 V는 이런 대사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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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 주의는 파괴자랑 창조자가 있거든? 파괴자는 나같은 테러리스트임 ㅋ"

"내가 하는 일은 꼭 필요해! 대신 나쁜 일이니까 나중에 사라져줄게 ㅠㅠ"

"지금 세상이 좆같은 거 알지? 내가 깔끔하게 처리해줄테니까 니들은 새하얀 캔버스에 이쁜 그림을 그리렴"


이러고 만족해하면서 죽음. 이건 생각할수록 멍청하고 역겨움.

좋게 말하면 몽상적. 이상적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할 정도의 몽상적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망상적인 아나키즘임.


현재 상태가 잘못됐다는 인식은 맞다고 치자. 그걸 치워버리는 것 역시 맞다고 치고. 그 방식 역시 맞다고 쳐. 필수적인 일이라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새하얀 도화지에 그려질 그림은 아름다울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건 망상임.


실제로 파시스트의 대가리가 분노한 군중에 의해 총을 맞고 죽은 이후로는 어떻게 됐지? 2인자 싸움을 하는 둘이 권력을 나눠가졌을 뿐임.

V가 정부의 병신같음을 비판할 기회를 준 다음에는 어떻지? 캔버스가 예쁘게 수놓아 지나? 아님. 그럴거라 믿는 건 망상에 불과함.


그래놓고 "테러는 나쁜 일인데 암튼 필요한 일이야! 그래서 개쩌는 내가 테러를 한 후에 사라져줄게!" 라고 하는 건 뭐지?

이건 자신의 테러가 가지는 최소한 정당성조차 없애는 짓임. [잘 풀리면 내 덕. 안 풀리면 몰루?] 라는 태도임.




흔히들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데, 보다 정확히는 무권위주의임.

아나키즘이 많은 분파로 나뉘어져있긴 해도,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건 무권위임. 오죽하면 극렬분파중에서는 두 명 이상이 모이면 위아래가 나뉜다면서 집단을 이루이 않으려는 녀석들도 있을 정도.


근데 이놈의 V는 아나키스트치고는 굉장히 귀족적임. 브이 포 벤데타는 귀족의 고결한 희생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임.


브이가 이비를 납치해서 감옥에 가둬둔 다음, 머리카락을 깎고 물고문을 하고 두들겨패고 총살시킨다고 계속 협박한 다음에

"오! 나에게 고마워하시라! 넌 지금껏 보이지 않은 창살에 갖혀져있었으나 내 교육 덕분에 자유로워졌도다!"

(이브: 오 존나 고마워요! 자유로워진 느낌이예요! 흐하핳핳!!)


"오! 테러는 나쁜 짓이지.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이 한 몸 불살라 세상을 깨끗하게 하리라!"

(이브: 오, 내 사랑! 당신이 한 크나큰 봉사를 아무도 알지 못하겠죠!)



내가 보기에 영화판에서 유쾌상쾌 요절복통 민주주의 투사 이야기로 각색한 건 이것 때문인 거 같음. 앞뒤가 안 맞잖아.

아나키즘 냄새는 밑에만 깔아두고, 모두에게 가면을 돌려서 민주주의를 그럴싸하게 표현한 게 훨씬 연출적으로 뛰어났음.

솔직히 앨런 무어쉑은 화낼 권리가 없는 듯. 







2. 이야기의 미묘한 흐름



다 읽고난 다음 작가후기?를 보니까 이건 처음부터 완성작으로 낸 게 아니라 잡지에 조금씩 연재했다더라.

그걸 보고 나니까 책을 읽을 때 받았던 묘한 느낌이 이해가 가더라고.


만화를 볼 때 계속 느꼈던 게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기 - 승 - 전 - 승 - 전 - 승 - 전 - 결 이라는 느낌으로 이어졌음.


하나의 사건이 끝나고 복선이 조금 펼쳐진 후,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복선이 조금 펼쳐지고, 그 복선들을 회수해서 또 사건이 일어나고 복선을 또 뿌리는 주간연재 or 월간연재에 자주 보이는 그 패턴으로 이야기가 이어짐. 드래곤볼로 치면 프리저편이 시작하고 끝난 다음 셀편이 시작하고 끝나는 느낌 알잖아. 무작정 그게 나쁘단 건 아닌데,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를 기대하고 산 책이었는데 기대랑 달라서 뭔가 팍 식긴 했음. 


또 아쉬운 건 여지껏 뭉친 복선을 모아서 한 번에 터뜨리는 부분도 없음. 이야기를 가장 끌어올려야 할 기승[전]결의 []에서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물쩡 넘어가서 결말까지 감. 결말 후에는 오줌싸다가 끊은 것 처럼 불연소된 감정이 남아있는데, 그 후에 아주 미묘한 에필로그를 추가해서 같은 감정을 또 느끼게 함. 



영화의 초반에 주인공인 V는 왜 이비를 자기 거점으로 데려갔나?

영화에서는 자기를 도운 그녀를 지키기 위해 데려갔지만, 만화에서는 그런 이유가 딱히 안 나옴. 

(V가 이비의 아버지라는 가능성은 0이 아니긴 하지만 유력하진 않으니 제외)


자기 거점에서 이비를 내쫓은 이유는 뭐임?

영화에서는 자연스레 넘어갔지만, 원작에서는 걍 이유도 없이 쫓아냄. ㄹㅇ 이유가 없음. 흐름이 뚝 끊김. 그리고 이비는 밖에서 다른 남자랑 섹스하고 잘 지내다가, 그 남자가 칼에 맞고 죽은 다음에 브이한테 납치당해서 고문받고 자유로워짐. 읽다가 눈을 의심했음.


브이는 왜 형사가 자신을 쫓아올 걸 기다리고 있었음?

지하철에 폭탄을 가득 싣고 총알 한 방이면 시밤쾅돼서 자기랑 이비 같이 죽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형사를 기다린 다음 총 한 방 맞고 어엌 너무 쎄게 맞았엌ㅋ 하면서 총 맞고 뒤짐. 유언은 "바이킹식으로 장례를 치뤄다오". 폭탄 든 지하철에 브이 시체를 넣는데 폭발 장면은 나오지 않음. 불연소된 느낌이 장난 아님.


2대 V가 된 이비는 대체 왜 다른 남자를 납치함?

브이가 자신을 납치한 것 처럼 다른 남자를 납치해서 그럴싸한 말을 함. 아마 3대 V를 만들거나, 자신과 같은 자유로워진 사람을 더 만드는 게 목적같은데,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가 안 나옴. 1대 V가 한 일이 아무 의미없는 병신짓이란 걸 암시하는 건가? 자신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거란 걸 암시하는 거신가? 그래놓고 왜 3대 V 후보는 한 페이지로 떼우고 더는 안 나오는 거신가?


어쩌면 앨런 무어가 너무너무 뛰어난 놈이라서 내 지능으로는 못 쫓아가는 고품격 만화를 그려서라는 이유일수도 있고

아니면 걍 정기연재로 그리다가 아이디어 나오는대로 그려서 앞뒷내용이 뚝뚝 끊기고 설정붕괴가 나왔다는 게 이유일수도 있는데,

내가 각 잡고 곰곰히 생각해봐도 후자인 거 같음. 






3. 맺음


난 기본적으로 글을 이렇게 나눔.


목적: (재미 / 정보전달 / 둘 다) 를 위해서

대상: (나 / 남 / 둘 다) 를 위해서


일기는 (나 / 정보전달) 을 위해서 쓰는 글이고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은 (남 / 재미) 를 위해서 쓰는 글이다 라는 식으로 나누고 있음.


근데 브이 포 벤데타는 충분히 재미있냐면 그것도 애매하고 아나키즘에 대해서 정보전달을 효과적으로 하고있냐면 그것도 애매함.

기승전결이 나뉘어져있지 않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닌데, 소설에서 팡! 하고 터뜨리는 부분이 없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문제임. 그 이전에 이야기의 흐름이 계속 뚝 뚝 끊어지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함. 

아나키즘에 대해 잘 알리고 있나? 그것도 애매한 거 같음. 일반적인, 대부분의 아나키즘은 저런 교조적인 태도를 지양하는 편임. 반-권위주의가 사상의 기저에 깔려있는게 아나키즘인데, 이건 '내가 옳다. 니들이 힘들다고? 참고 견뎌라. 이게 진짜 자유다' 이딴 식으로 말하니 원.


그래서 내 기준에서는 이 만화가 잘 쳐줘봤자 평작인 느낌임. 재미도 없어, 정보전달은 미묘해. 

작가 본인은 재밌었겠지? ( 나 / 재미 )를 위해서 쓴 글인가?


설국열차도 영화보고 흥미가 생겨서 만화판(원작)으로 봤다가 팍 실망했었는데, 브이 포 벤데타도 그거랑 비슷할 정도의 실망감을 느낌.

안 본 사람 있다면, 앨런 무어 팬이라면 읽고 아니라면 꼭 볼 필요는 없을 거 같음. 왓치멘은 진짜 재밌었는데 아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