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며칠 전에 여성 작가 중에 권여선에 제일 잘 쓴다는 댓글을 달고나서 그녀의 어떤 점이 마음을 사로 잡았건 건가 새삼 궁금해서 좋게 읽었던 단편집을 꺼내 읽었습니다.
권여선을 머리에 각인 시킨 단편은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입니다. 사실 좋아하는 류의 소재는 아닌데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로도 읽힐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초중반에 창궐했던 후일담류의 소설들은 대체로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한 소설을 쓴 사람들의 다음 작품이 허접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처럼 엄살을 부리는 후일담 소설과 그 작품이 시대를 추억하는 방식은 다시한번 힘주어 말해서 역겹습니다.
후일담 소설의 주인공들인 이른바 운동권 세대들은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축복받은 세대입니다.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고 그러한 풍요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성과들도 획득해 냈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세대는 해방이후 근대화 숨돌릴틈 없이 달려온 그들의 아버지 세대이거나 아무런 미래에 희망 없이 떠밀리는 지금의 세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운동권 후일담 소설은 조잡한 낭만성에 기댄 데카당스이거나 유치한 허풍 이상의 울림을 갖기 힙듭니다.
소위 후일담 소설이 일종의 문학적 헤프닝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인이데 2010년에 80년대의 대학가를 소환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위험해 보이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권여선 작가의 선택은 그 이야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시간에 도달할수 없다는 어떤 절박함에서 나온 작가적 결단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자신의 학창시절과 그 시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할말이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경의 군화발과 거리를 가득메운 군중과 최루탄과 선배들의 잇단 구속과 분신과 위장취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마디 '엄혹한 시절'이라고만 짧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를 하기까지 무척 용기가 필요했으리라고 느껴집니다.
이 소설은 그 엄혹한 시대를 뒤로하고 철저하게 사적인 이야기에 천착합니다. 지방에서 갓올라온 대학 신입생 (여)주인공과 일년간의 재수를 통해 딱 그만큼만 세상 물정에 밝아 보이는 또래의 친구 그리고 소위 사회과학 학습을 전담한 학교 선배. 이 짧은 단편은 다소간에 외설적인, 그러니 자신의 사적인 기억으로 담아야 하는 속살과 같은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여주인공은 보험회사에 다니는 대학 동창과 만난 술자리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해 냅니다.친구는 조금 껄렁한 산타라는 선배와 엮여있고 주인공은 선배P와 쌍을 이룹니다.이 단편에서 단연 인상적인 것은 선배 P의 이미지 입니다. 그는 뭔가 삐딱하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고 한쪽 벽이 사선으로 서있는 자취방에서 기거하는 사람입니다. 그 구부정함은 어떤 신체적인 불구에서(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기인하는 것인지 그가 기거하는 공간(사선으로 벽이 서있다) 기인하는지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오가는 화분의 이미지는 대단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멍이 없이도 식물이 자라는 화분의 이미지는 모든 식물을 담을수 있는 용기에서 집의 이미지로 모습을 바꿔나갑니다. 그런데 구멍이 없는 화분은 화분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 화분에 담는 흙에 특성에 따른 것입니다. 옳게 말하면 구멍이 필요없는 화분이 아니라 구멍이 필요없게하는 흙이 담긴 화분입니다. 실은 강조점은 흙에 놓여야 할 것입니다. 화분은 그저 형식적인 구실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식물을 담아내는 형식적인 구실일 뿐인 화분이 중요해 집니다.
주인공에게 그 화분의 이미지는 기울어진 자취방이라는 화분의 이미지에서 그 화분조차 사라진 정원의 이미지로 확장이 됩니다. 그 화분의 메타포가 중요해지는 진짜 이유는 주인공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그 화분이라는 틀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편은 그 화분과 닮은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표면은 후일담 소설의 형식을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담는 진짜 이야기는 어떤 불모성, 불임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소설에서 신입생인 여주인공은 우연히 자취방 인근을 산책하다가 담벼락에서 친구와 산타선배가 섹스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P선배의 집에서 하루 자고 갈것을 결심합니다.P선배는 차갑게 거절하며 '술한병 마시고 돌아가라'고 충고합니다. 그녀는 선배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 방을 빠져 나가고 이것은 그녀의 불쾌하고 피하고 싶은 기억으로 자리합니다.
현재적인 시간과 과거적인 시간. 그 까마득한 떨어져 놓여진 물리적 시간의 거리를 두고 여주인공은 자기가 모르고 있던 일말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작게는 P선배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술을 사러 나갔던 선배가 기쁜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가지고 올라가던 아마도 포며 달콤한 과자가 가득 담겼을 푸짐한 비닐 봉다리 같은 것.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간의 초침은 되돌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주인공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상상적으로 마음 속에 화분을 담아내고 정원을 일구며 기억의 형태로 불가능했던 첫사랑을 소환하고 븕게 열매를 맺을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붉게 알알이 맺혀진 열매는 현재적 시간의 불모성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는 누구나가 그러한 붉은 열매가 맺혀 있은 정원을일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언부언하다보니 내용없이 글만 길었습니다. 언젠가는 일기장에 좀더 잘 된 감상을 올릴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여류 작가들의 수다한 단편중에 단연 눈에 뜨이는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김소진의 '울프강의 세월'과도 짝패를 이룬다는 느낌이 문득 드네요. 섬세하지만 단단한 문장을 좋아한다면 권여선은 상당히 좋은 선택일듯 합니다.
권여선을 머리에 각인 시킨 단편은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입니다. 사실 좋아하는 류의 소재는 아닌데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로도 읽힐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초중반에 창궐했던 후일담류의 소설들은 대체로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한 소설을 쓴 사람들의 다음 작품이 허접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처럼 엄살을 부리는 후일담 소설과 그 작품이 시대를 추억하는 방식은 다시한번 힘주어 말해서 역겹습니다.
후일담 소설의 주인공들인 이른바 운동권 세대들은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축복받은 세대입니다.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고 그러한 풍요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성과들도 획득해 냈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세대는 해방이후 근대화 숨돌릴틈 없이 달려온 그들의 아버지 세대이거나 아무런 미래에 희망 없이 떠밀리는 지금의 세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운동권 후일담 소설은 조잡한 낭만성에 기댄 데카당스이거나 유치한 허풍 이상의 울림을 갖기 힙듭니다.
소위 후일담 소설이 일종의 문학적 헤프닝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인이데 2010년에 80년대의 대학가를 소환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위험해 보이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권여선 작가의 선택은 그 이야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시간에 도달할수 없다는 어떤 절박함에서 나온 작가적 결단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자신의 학창시절과 그 시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할말이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경의 군화발과 거리를 가득메운 군중과 최루탄과 선배들의 잇단 구속과 분신과 위장취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마디 '엄혹한 시절'이라고만 짧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를 하기까지 무척 용기가 필요했으리라고 느껴집니다.
이 소설은 그 엄혹한 시대를 뒤로하고 철저하게 사적인 이야기에 천착합니다. 지방에서 갓올라온 대학 신입생 (여)주인공과 일년간의 재수를 통해 딱 그만큼만 세상 물정에 밝아 보이는 또래의 친구 그리고 소위 사회과학 학습을 전담한 학교 선배. 이 짧은 단편은 다소간에 외설적인, 그러니 자신의 사적인 기억으로 담아야 하는 속살과 같은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여주인공은 보험회사에 다니는 대학 동창과 만난 술자리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해 냅니다.친구는 조금 껄렁한 산타라는 선배와 엮여있고 주인공은 선배P와 쌍을 이룹니다.이 단편에서 단연 인상적인 것은 선배 P의 이미지 입니다. 그는 뭔가 삐딱하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고 한쪽 벽이 사선으로 서있는 자취방에서 기거하는 사람입니다. 그 구부정함은 어떤 신체적인 불구에서(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기인하는 것인지 그가 기거하는 공간(사선으로 벽이 서있다) 기인하는지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오가는 화분의 이미지는 대단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멍이 없이도 식물이 자라는 화분의 이미지는 모든 식물을 담을수 있는 용기에서 집의 이미지로 모습을 바꿔나갑니다. 그런데 구멍이 없는 화분은 화분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 화분에 담는 흙에 특성에 따른 것입니다. 옳게 말하면 구멍이 필요없는 화분이 아니라 구멍이 필요없게하는 흙이 담긴 화분입니다. 실은 강조점은 흙에 놓여야 할 것입니다. 화분은 그저 형식적인 구실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식물을 담아내는 형식적인 구실일 뿐인 화분이 중요해 집니다.
주인공에게 그 화분의 이미지는 기울어진 자취방이라는 화분의 이미지에서 그 화분조차 사라진 정원의 이미지로 확장이 됩니다. 그 화분의 메타포가 중요해지는 진짜 이유는 주인공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그 화분이라는 틀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편은 그 화분과 닮은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표면은 후일담 소설의 형식을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담는 진짜 이야기는 어떤 불모성, 불임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소설에서 신입생인 여주인공은 우연히 자취방 인근을 산책하다가 담벼락에서 친구와 산타선배가 섹스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P선배의 집에서 하루 자고 갈것을 결심합니다.P선배는 차갑게 거절하며 '술한병 마시고 돌아가라'고 충고합니다. 그녀는 선배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 방을 빠져 나가고 이것은 그녀의 불쾌하고 피하고 싶은 기억으로 자리합니다.
현재적인 시간과 과거적인 시간. 그 까마득한 떨어져 놓여진 물리적 시간의 거리를 두고 여주인공은 자기가 모르고 있던 일말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작게는 P선배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술을 사러 나갔던 선배가 기쁜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가지고 올라가던 아마도 포며 달콤한 과자가 가득 담겼을 푸짐한 비닐 봉다리 같은 것.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간의 초침은 되돌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주인공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상상적으로 마음 속에 화분을 담아내고 정원을 일구며 기억의 형태로 불가능했던 첫사랑을 소환하고 븕게 열매를 맺을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붉게 알알이 맺혀진 열매는 현재적 시간의 불모성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는 누구나가 그러한 붉은 열매가 맺혀 있은 정원을일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언부언하다보니 내용없이 글만 길었습니다. 언젠가는 일기장에 좀더 잘 된 감상을 올릴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여류 작가들의 수다한 단편중에 단연 눈에 뜨이는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김소진의 '울프강의 세월'과도 짝패를 이룬다는 느낌이 문득 드네요. 섬세하지만 단단한 문장을 좋아한다면 권여선은 상당히 좋은 선택일듯 합니다.
리뷰 잘 읽었어 권여선 좋아 근데 젊은 작가는 아니지 않나? ㅋㅋㅋ
이 댓글은 게시물 작성자가 삭제하였습니다.
ㅇㅇ 그러네. 근데 작품보면 젊은 작가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 가봄.
댓글 단 원글에 여성작가 계보가 있었어서, 글고 좋아하는 여성작가가 최윤 오정희 등이라 상대적으로 권여선을 젊은 작가라고 한 거 같음. 본문 수정할께.
추천 누르고 갑니당. 개인적으로도 권여선 책 중엔 '내 정원'이 제일이었음.
조만간 권여선 읽을 생각이었는데 ㄱㅅ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