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째로 읽게 된 밀란 쿤데라의 책 <정체성>이다. 불멸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건지 이후의 저작들은 대체로 얇은 편인데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로 200페이지 보다 적은 페이지 수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분량이 적어짐에 따라 소설을 오래 즐길 수 없어 아쉽지만 짧아진 만큼 글이 주는 순간적인 충격 또한 강해져 나름 만족하는 편이다.
이번 저작이 이전 작들에서 구별되는 차이점이라면 소설의 간소화라 할 수 있겠다. 쿤데라의 소설 스타일은 5번째 소설인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한 번 변한 적이 있는데 이전까지는 다수의 등장인물들을 서로 엮으면서 전개하는 형식을 보여줬다면 <웃음과 망각의 책>부터는 ‘나’, 즉 작가 자신이 소설에 개입하고 서술을 복잡화하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바로 전작인 <느림>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데, 한 학회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자기 스스로 전지전능한 자의 입장을 취한 채 소설을 서술한다. 그러나 <정체성>에서는 다시 초기작으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개입은 줄고(아예 없지는 않다.) 등장인물들에 집중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수 역시 줄어든 모습을 보여준다. 쿤데라의 이전 작들은 전부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구조를 보여준다.(예외적으로 <삶은 다른 곳에>는 주인공과 그의 어머니 두 인물에 이야기가 집중된다.) 그러나 <정체성>의 서술은 철저히 한 커플에 집중되어있다.
소설의 내용은 인간이 자신이 있을 곳을 찾는 내용이라 하겠다. 주인공인 커플은 각자 자신들의 자아를 이루는 배경이 있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그 배경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행동을 실행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있는 그 기반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현실로 다가오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 그들은 진정으로 도망쳐 있을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의 현실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그 위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번 작은 전작 <느림>에 비해 소설 구성의 긴장감이 떨어진 느낌이다. 아마 서술 방식의 변화와 등장인물들의 간소화가 발목을 잡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여전히 괜찮은 저작이었다. 이제 쿤데라의 책들은 거의 다 읽어 가는데 남은 작품들도 전부 좋은 작품들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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