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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 작품이 유발하는 감각 중 가장 대단한 것이 '거대함'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서사가 복잡하다거나 세계관이 넓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그 안에 자기 주장을 녹인 작품이 가장 대단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희곡은 체호프의 「벚꽃 동산」이지만, 지금까지 읽은 희곡 중에 가장 대단한 작품은 「돈 카를로스」이다. 「돈 카를로스」는 감히 요약할 수 없는 작품이다. 작중의 암투가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문장으로 자유를 찬양하며 가슴에 감동을 준다. 비록 중간에 실러의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사실성이나 응집성에는 아쉬운 부분을 남겼지만, 그러고도 후대 사람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돈 카를로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다면, 모든 상황을 유발하는 펠리페가 일차원적인 악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왕은 고독하다. 펠리페는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이 진정 자신을 위해 좋은 사람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카를로스는 "남의 행동을 엿보고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살인자의 손에 든 독약이나 단도보다 악한 일을 세상에 더 많이 했다는 말을 늘 들어왔소."라고 밝히는데, 실상 왕궁의 일은 그 악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 왕의 의심은 아첨꾼들에게 좋은 일감이다. 알바 공작과 도밍고 신부의 밀고를 듣고 펠리페는 이렇게 반응한다. "충성심은 다가오는 범죄를 경고하고, 복수욕은 이루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 이렇게 보면 확실한 꼬투리를 잡을 때까지 왕에게 다가올 위협 하나 말해주지 않는 총신들은 충신들이 아닌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3막에서 펠리페가 자유주의자 포사 후작과 대화하는 부분이 작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포사 후작은 왕의 마음을 정공법으로 사로잡는다. 그는 왕 앞에서 당돌하리만치 솔직하다. "저는 스스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판에, 겨우 도구가 되어야 할까요? (중략) 저는 군주의 하인이 될 줄 모르는 인간입니다." "이 세기는 저의 이상에 알맞게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다가올 세계의 시민으로 살지요. 그림 하나가 마마의 평화를 해칠 수 있을까요? 마마의 숨결이 그것을 지워버릴 겁니다." 그런 모습은 펠리페가 예순의 삶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남을 흉내내는 일은 두뇌를 가진 남자에게 치욕이지."
포사 후작은 더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인다. 포사 후작의 말은 나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인간은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이제 인간은 오랜 잠의 사슬을 부수고 나와 자신의 거룩한 권리를 계속 요구할 것입니다. 인류는 전하의 이름을 네로나 부시리스의 이름과 나란히 세울 것이니 저는 그게 고통스럽습니다. 전하는 좋은 분이니까요. (중략) 부자연스러운 신격화를 그만 포기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파괴합니다. 생각의 자유를 주십시오. (중략) 자유정신은 영원한 법칙은 보지만 창조주를 보지는 못하지요. '신은 무엇하러?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해'라고 말하죠." 비록 작중 시점에서는 펠리페 왕의 압제를 온 나라가 견디고 있지만, 실러가 살던 때에 이미 프랑스 혁명이 자유를 가져왔듯이, 세계인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을 아예 틀어막을 수는 없다. 인간은 국가에 다른 무엇보다 자유를 열망한다. 포사 후작의 말은 펠리페 왕이 자유를 탄압해서 스스로 고독해지고 있음을 일깨우고, 세상과 하나가 되라는 과감한 조언이다. 나는 권위를 내세우다가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불편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는데, 이 사람들이 포사 후작의 말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포사 후작의 사상은 포사 후작이 하는 말만큼 멋지지만, 포사 후작의 행실이 그만큼 멋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카를로스에게 포사 후작은 각별한 존재였지만, 포사 후작에게 카를로스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심적으로 궁지에 있던 카를로스는 포사 후작을 진정한 벗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기대려 한다. 그러나 포사 후작에게 카를로스는 이상을 위해 이용할 '왕자' 장기짝에 불과하다. 포사 후작은 카를로스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를로스를 도와서 자신의 이상을 이루려 했을 뿐이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왕을 직접 공략하는 것으로 계획까지 바꾸었다. 포사 후작의 희생은 작중 인물들에게는 각별하게 느껴지겠지만 모든 것을 아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숭고한 일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포사 후작은 인류애는 있지만 인간애는 없는 것 같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지만, 자신과 남 사이(間)를 돌아볼 여유는 없던 것이다.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사람의 자유를 빼앗았으니, 목적과 수단이 모순된 그의 계략은 어찌 보면 실패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작중에서 은근히 경시되고 있는 사랑들이 더욱 안타깝다. 카를로스와 엘리자베스는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더 큰 그림 속에 갇혀있다가 결국에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나눈 사랑의 대화가 얼마나 진실되던가! 에볼리 공주도 음흉한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에 빛이 바래는 감은 있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카를로스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큰 그림의 검은 부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상에서 자신 말고는 그 어떤 매입자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일한 것이 사랑인데. 사랑은 사랑의 선물이죠. 그것은 내가 선물하거나, 아니면 언제까지나 이용하지 않은 채 파묻어버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다이아몬드죠." 포사 후작은 이를 두고 사랑의 이기심이자 습득한 순수함이라고 매도하지만 나는 이런 평가가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신분의 차이가 있고 왕궁의 암투가 전제된 이상, 이 방식 말고는 택할 방식이 딱히 없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엘리자베스를 향한 카를로스의 마음이 워낙에 단단해서 처음부터 헛된 것이었으니, 이 사실이 자꾸 에볼리 공주를 동정하게 만든다. 카를로스는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아는 법인데."라며 에볼리 공주를 물리치려 하지만, 이 말이 실은 자신뿐만 아니라 에볼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결국 작중 모든 악의 근원은 왕궁이다. 알바 공작은 카를로스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군주 하나를 더 만들기가 군주국들을 늘리는 일보다 얼마나 비할 바 없이 쉬운 일인지 주군께선 아시겠지요. 세상에 왕 하나를 마련해주는 일이 왕에게 세상을 마련해주는 것보다 얼마나 더 빠르고 가능한 일인지 말입죠. 겨우 두 방울의 피로 만들어진 저하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백성의 피를 흘려야 하는지도 말입니다. 겨우 유모나 물리칠 줄 아는 섬세한 요람 출신 저하, 딱하기도 하시오! 우리 승리의 부드러운 베개 위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잠드시는지! 왕관에는 진주들만 빛날 뿐, 그 진주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생긴 상처는 없소." 국가는 커다란 공동체이다. 그런데 그 운명을 단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며, 모든 것이 그 한 사람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왕이 매사에 공정하고 정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왕은 불완전한 존재여서 감정에 치우치기도 하고 권위를 잃는 것을 극심히 두려워한다. 결국 왕은 시한폭탄이기 때문에 신하들은 정당한 방법만으로 처세할 수 없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왕 자신에게도 괴롭고 인격을 말살하는 환경이다. "눈물이란 언제나 인간의 확인이건만, 그의 눈은 말랐구나." (사족으로 이렇게 눈물이 말랐던 왕이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기 직전이던 포사 후작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래서 포사 후작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납득이 간다. 포사 후작이 부르려는 자유는 여러 사람의 밥그릇을 뺏는 행위이다. 물론 이것들은 혁명을 지연시키는 탐욕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도 많은 것이 걸려있다. 포사 후작은 카를로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더 높은 이성이 낳고 인류의 고통이 촉구하는 계책이라면, 만 번이나 좌절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맞는 말이고, 따르고 싶은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인류의 고통이 촉구하는 그 계책에서 역으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이미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은 매몰 비용을 찾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어지기 더욱 힘든 법이다. "위대한 왕의 총애는 의심해볼만한 일입죠. 이 황금의 낚싯줄에 걸려 수많은 강한 미덕이 피를 흘렸으니까요." 이미 흘린 피를 몸속에 넣을 수는 없다지만, 왕을 위해 흘린 피를 아까워하지 않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들이 아깝다고 해서 혁명을 무한히 막아서도 안 된다. 포사 후작이 검은 수단을 썼다고 해도 결국 더 추한 쪽은 보수파들이다. 이는 대심문관과 펠리페의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펠리페는 대심문관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자식의 처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믿음의 토대를 놓아주실 수 있습니까?" 대심문관은 이렇게 답한다. "영원한 정의를 위해 하느님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소. 신앙 앞에서 인륜의 목소리는 타당성이 없소." 예수가 무엇 하러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기 위함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강조했다. 예수는 용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대심문관은 "자유보다는 차라리 절멸을 위해."라고 말한다. 이 자의 신앙이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토대로 하는 것인가? 「돈 카를로스」에서 신앙은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잃었다.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지경이 됐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신앙이 사람을 탄압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이고 있으니, 이런 체제는 이미 근본이 썩었으며 카를로스의 계획을 저지한다고 해서 변화의 물결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음이 암시돼있다.
그러므로 「돈 카를로스」는 시대극이지만 시대를 초월한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때로는 자유를 막으려는 쪽이 더 교활한 수단을 쓰기도 하고, 자유를 이루려는 쪽이 서투른 수단을 쓰다가 정당성을 잃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할 것이고, 자유를 억누르는 쪽은 결국 그 자신들부터 모순에 빠져 영원히 길을 잃을 운명이다. 포사 후작과 카를로스의 계획이 실패했더라도 모든 내막을 아는 사람은 결국 자유의 편에 설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지금 세계는 진정한 자유를 이뤘는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적어도 종교 재판이 공식적으로 열리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권력자가 민중을 짓밟는 일은 아직도 빈번하다. 국가급 권력이 아니더라도, 다수가 소수를 무시하고 탄압까지 하는 사례를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할 모습이다. 포사 후작이 부르짖었듯이 결국 생각의 자유가 도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외침만 반복할 것이다. 나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지식에 특권을 부여하고 남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가? 나의 옳음을 강요하지는 않았던가? 그렇게 해서 나는 공연히 적을 만들고 외로워지지는 않았던가? 「돈 카를로스」를 읽고 내가 가지게 된 소망은, 포사 후작처럼 세상을 뒤흔들지는 못하더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내면의 자유를 얻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 나를 구속하는 욕심을 제거해 진정한 자유를 이룩해가야 할 것이다.
이상이 「돈 카를로스」를 읽고 느낀 점들이다. 숭고한 작품으로 귀한 체험을 하게 해준 실러에게 무한한 찬사를 바치고 싶다. 더불어 수월한 독서를 위해 여러 자료들을 인용하고 상세히 해설한 역자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돈 카를로스」를 읽고 싶은 분들은 문학동네 판본으로 읽기를, 특히 「돈 카를로스」를 한 번 읽고 뒤의 부록을 통해 실러의 창작 과정을 본 뒤 다시 「돈 카를로스」를 읽기를 권장한다. 포사 후작의 모든 부분을 공정하게 돌아보기 한결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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