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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언젠가 열세 걸음에 얽힌 민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참새는 두발을 모으고 점프하듯 쫑쫑 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흡사 병아리가 걷는 것 마냥 한 발로 한 발짝씩 걷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지켜본 사람에게는 큰 복이 올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마디 덧붙였지. 그 행운도 열두 걸음까지. 열세 걸음까지 걷는 것을 지켜본 사람에게는 이전에 얻은 복들의 갑절로 도리어 재앙이 들이닥치게 된다고. 그게 열세 걸음의 의미였어.
너는 그 뒤 한발 한발 걸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직 딴 생각 뿐이었어. 혹시 네가 열세 걸음 째 걷기 전에 열두 걸음까지만 걷는 것을 보고 눈을 돌리면 나는 행운을 몽땅 안고 즐겁게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하며 말이야.
그런 한편으로 인간의 궁금증이란 원초적인 질병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는 것 같이, 돈 잃고도 다음 판을 진행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같이 우리 역시 파국이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열두 걸음에서 멈추지 못하고 열세 걸음째까지 보고야 마는 빌어먹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심리가 결국 모든 행운을 덮으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그리고 모든 것은 네 뜻대로 되었어.
네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는 서사의 웅장함이나 캐릭터의 성격이나 고뇌보다도 작품의 서술방식이나 분위기에 압도당했지. 말 그대로 환상적이기 때문이었어. 작품을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요소는 특히 시점이었는데, ‘나’라는 서술자가 ‘너’에게 말하는 문학작품에선 쉽게 볼 수 없는 2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한 장면 안에 말하는 대상이 휙휙 바뀌기도 하며, 너라는 호칭이 그, 그녀라는 호칭으로 물 흐르듯이 바뀌기 때문에 첫 50페이지까진 적응이 어려워 책을 집어던질까 생각해도 했지만 비싼 리더기였기 때문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어. 아무리 소설가가 사람의 심리를 다룬다 할지라도 책을 집어던지지 않을 거란 나의 이런 심리까지 이용해 먹은 거야? 건방지게.
그래도 꾹 참고 읽다보면 서술자를 지켜보는 ‘우리’(소설 속 ‘나’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존재)가 서술자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고, 믿을 수 없는 서술자의 정체가 탄로되는 순간 우리는 서술자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게도 하지. 도대체 나는 누굴 믿어야 하는가? 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 자체는 과연 내가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깜빡하고 가스밸브 틀어놓고 장기간 여행 간 거 같은 의혹에 불꽃을 피움으로써 이야기의 진실성을 흐리는데 난 이미 네 손에 놀아나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지. 그리고 실제로 그랬어.
더욱이 소재들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하는데 한몫하지. 죽은 자가 생각하고 얘기하며, 명령하기도 하고, 산 자와 대화를 나누며 다시 이승으로 복귀하는 장면을 비롯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진 세계선이라든가 성형으로 모습이 똑같아진 인물들이 서로 뒤바뀐 인생을 살기로 다짐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혼동하는 장면이나, 장면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는 수법 등을 통해 지극히 합리적인 인간의 인과성을 혼동하게 하여 쟤가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을 통해 현실 속 인간들이 아니라 환상 속이기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줘서 독자로 하여금 작품 내 세계의 현실의 파악을 흐리게 했지.
나는 네가 들려주는 환상적 이야기에 눈을 찌푸리고 현실을 모호하게 바라보며 환상이란 경계로 걸어들어갔지만, 환상이란 것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환상은 현실과 가장 먼 것이 아니라 결국 환상은 지극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어. 환상이란 건 결국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기에 빠지게 되고, 환상 속에서 약간의 즐거움을 맛보지만, 언젠간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잖아? 환상은 현실과 통하게 되어 있어.
운명이 뒤바뀐 주인공들의 숙명을 통해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모습이나,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삶을 찾는 모습은 사실 그들이 자신들의 내면의 욕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더 큰 사회적인 욕망의 폭력 아래 터잡은 환상으로 뛰어들게 하지. 마치 불나방처럼.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살아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반대로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것들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의 모호한 외줄에서 우린 환상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조금의 안락과 해방, 조금의 자유 정도 따위의 감정을 맛봤지만 그런 욕망들의 충족되었단 착각에 젖을 수밖에 없던 주인공들은 결국 필연적으로 현실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도망친 곳에 낙원따윈 없었어.
자신들의 정체성이 허위에서 시작된 관계에서는 어떤 진정함을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들 본연의 것들을 찾으려는 음모는 흉계로 돌아가고 그들은 본래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비롯되는 유일한 욕망을 느꼈을 뿐이지.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통해 너는 내게 물었지. 하지만, 나는 네가 제시한 세계가 사실 우리의 현실은 아닐까 하는 불안을 장돌뱅이의 봇짐처럼 가득 떠안았어. 넌 내 혼란을 눈치 챘는지 공세를 멈추지 않더군.
실제로 너는 우리가 현실세계를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불안과 고뇌의 정수를 제시했고, 인간은 결국 욕망과 불안, 그리고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더 큰 사회적인 요구 앞에 파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세계를 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그리고 그것을 거스르려는 한둘의 인간 개체는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니냐고.
두 주인공이 희사하는 진정으로 자기들의 삶을 되찾으려는 마지막 욕망의 파국에서 나는 입술을 옴짝달싹 못하며 아니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렇다는 대답이 더 합리적인 대답이 될 거 같기도 했어. 설령 우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계가 맞다고 하면 맞는 세상이고 우린 그것을 바꿀 힘이 없으니깐.
나는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찝찝한 심경으로 네게서 고개를 돌리곤 다시 <열세 걸음>이란 환상에서 다시 현실로 방향을 틀수밖에 없더군. 세계에 대한 찝찝함을 열세배 안은 채. 너의 승리를 인정할게, 모옌.
읽을수록 뭔가뭔가임. 이해는 잘 안되는데 짱잼이었던 책. 나중에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되겠지
갠적으로 여태 읽어본 소설 중에 난이도 탑일듯? 나도 아주 피상적으로만 이해한거 같고.. 언젠간 재독하고 싶긴함
개구리도 이런 관점에서 찝찝한 소설이긴 하죵 완전한 구원도 죽음도 해방도 없는
작가가 던지는 의문의 울림이 너무 큰거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