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기력이 없어서 이건 초고로 확 쓰고 그냥 말거임.
이건 이건희가 죽음을 앞두고 종교인에게 던진 24가지 질문이야.
느껴지는 건, 그 똑똑한 이건희 치곤, 정말 중2나 할법한 단순한 질문만을 던졌다는 것...
그렇지만, 이런 단순하고 순박한 질문이라고 해도, 대답이 진짜 쉬우냐, 네이버 지식인에서 툭 던져서 끝낼 수 있느냐. 그건 아니라는 거임.
보통 질문과 대답의 형태는 두 가지로 존재하는 거로 보임.
하나는 우문현답.
우둔한 질문이 있고, 이것에 대한 깔끔한 대답이 나오는 형태임.
우둔한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가 되게 만든 인간의 모든 학문은 보통 이 형태인거 같아.
예 : "대체 오늘 왜 이렇게 더운거임?" - "온도가 높아서 그럼. 온도는 분자의 운동속도에 대한 계산임. 이 온도가 높을 경우에는 곡물과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삶에 필요한 효소를 잘 만들 수 없고..."
다른 하나는 현문현답.
어떤 잘 짜여진 질문이 있고, 이에 짝이 맞춰지는 깔끔한 대답이 나오는 형태.
과학과 수학을 포함한 발전된 학문에서 더 발전된 학문으로 나아가는 게 이 형태를 띰.
예 : "왜 n번째 소수는 대략 nlogn인가요?" - "소수 정리에 따라 그렇습니다. 소수 정리는 복소해석학과 해석학적 정수론이란 복잡한 수학 이론을 통해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진 인류사의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말고 또 다른 형태의 질문이 있음을 알게 됨.
바로 현문우답.
정말 날카롭고 현명한 질문임에도 대답이 없어보이거나 우둔한 답변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
예로,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대체 '좋음', '정의로운', '경건함' 등의 의미가 진정 무엇입니까?"
"성경에선 개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데, 개도 정말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등등이 있음.
이런 질문은 정말로 이상해보임.
분명 진짜 필요한 질문인 거 같은데, 도저히 답을 뭐라고 내리기가 힘든 거임.
게다가 이 질문은 진짜로 삶, 그리고 세계, 에 대한 정말 중요한 질문처럼 보임.
그런데도 대답하려면 뭔가 턱 걸리는 게 있음.
어쩌면 (좀 우둔한 사람은) 이런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서 아주 쉬운 대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그 대답에 대해서 또다시 나오는 날카로운 질문들로 가득하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을 거임.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 "당연히 행복이죠. 사람은 행복하려고 삽니다."
- "진짜로요? 행복이 삶의 목적입니까? 생명체 전체의 삶의 의미가 행복만이 목적인가요? 저기 까마귀가 있는데 저 까마귀는 '저는 행복하려고 살아요 ^^' 라 생각해요? 여기 개미가 있는데 '저는 행복하려고 살아요 ^^'라고 해요?"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 "생존입니다.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생존이 삶의 의미입니다."
- "진짜로요? 저는 모태솔로인데 저는 아예 삶의 의미가 없나봐요? 정말 생명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기계라는 게 세상의 이치라면 대체 왜 일부 원숭이와 우리에겐 거울뉴런이라는 쓸데없는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도록 진화되었나요?"
더 좋은 답변이 나와도. 또 질문은 산재할 거임.
이런 제3의 질문과 대답 형태를 포착한 경우는 문학에서 꽤 자주 보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그 예임.
여기서는 우주에서 엄청나게 강력한 기계를 써서 이 질문에 대답하라고 함.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뭐냐?"
기계는 답을 이렇게 말함. "42"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외계인들이 이게 대체 뭐냐고 하니까,
기계는 "너네들이 질문의 형태를 잘못 던졌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좋은 질문을 던져라" 라고 함.
그리고 기계가 설계한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고, 그 기계가 바로 지구였다는, 한 설화를 만들었음.
또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음.
성경의 내용 중 창세기를 설명하는 그리고리에게 어린 스메르쟈코프가 이렇게 말함.
"하느님이 빛을 창조한 건 첫째 날이고 태양과 달은 넷째 날에 창조했다면서요.
그럼, 첫째 날엔 어디서 빛이 비쳤던 거죠?"
그리고는 자신의 선생을 경멸이나 조롱의 눈길로 바라봄.
그리고리는 "바로 여기서다!"라며 어린 스메르쟈코프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김.
그 후부터 스메르쟈코프는 뇌전증을 일으키기 시작함.
이런 "현문우답"을 문학만 뭐라고 했던 건 아님.
그 전에 이걸 아주 많이 논했던 것은 바로 종교에서였음.
기독교도 이것을 많이 던졌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이 현문우답을 아주 체계화시킨 선불교만 논하겠음.
보통 이 말을 알고 있을 거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이 대답이 뭔지 여기서 설명해주겠음.
"어느 날 동서 양당이 고양이로 다투었다. 이를 본 남전은 고양이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말한다면 베지 않겠다." 대중은 말이 없었다. 남전은 고양이를 베어 양단을 냈다."
진짜 존나 유명한 선불교의 어록임. 그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에서도 나오고, 왠만한 선불교에 대한 책이면 무조건 나오는 "남전참묘" 공안이라는 거임.
일단 왜 절에서 둘로 나눠져서 고양이를 가지고 싸웠을까? 고양이가 귀여워서?
모든 주석가들이 이렇게 말함. 고양이가 불성이 있냐 없냐고 싸웠기 때문.
그 당시에 불교는 정말 큰 논쟁 중이었음.
아함경과 같은 초기불교에서는 "남자만이 아라한(성자)이 될 수 있다" 같은 말을 자주 했는데,
이 초기불교를 비판하면서 나온 불교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법화경이라는 또다른 불교의 책이 나타나게 되었음.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함. "남자만이 아니다. 비구니 또한 불성을 가질 수 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불성을 가질 수 있다는 한 형태의 평등 사상이 나오게 된 거지.
그런데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불성을 가질 수 있다면, 모든 생명체가 불성이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여기서 나온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 바로 "고양이가 불성이 있냐?"라는 거임.
여기서 남전, 여기 절 보스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함. 그냥 그 고양이를 반으로 갈라서 죽임.
그 어떤 불교 경전에서도 "짐승을 반갈죽해라" 라고 적혀 있진 않았을텐데?
자, 이 어록, 공안에서는 그 뒤의 사례가 바로 붙어 있음.
"남전이 다시 앞의 이야기를 들어 조주에게 물었다. 조주가 바로 짚신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다. 남전이 말했다. "그대가 있더라면 고양이를 구했을 텐데.""
여기 절 보스인 남전에겐 수제자인 조주가 있었음.
조주는 이 상황을 들으니까 말을 하려고 들지 않고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나갔음.
근데 남전은 이 행동이야말로 저 논쟁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이라고 극찬한 거임.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저 조주는 남전을 이은 다른 절 보스가 됨.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함.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렇게 말함. "없다."
스님은 이렇게 말함. "왜 없습니까?"
조주는 이렇게 말함. "개에겐 업식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 업식성은 지금 말로 분별력 같은 건데, 불교에서는 업식성은 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생명체도 다 가지고 있다고 봤음. 인간까지 포함해서.
그러면 인간도 불성이 없다는 거 아님?
이제 또다른 스님이 와서 조주에게 같은 질문을 또 했음.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렇게 말함. "있다."
그런데 그때 개가 똥막대기를 햝고 있는 거임.
스님은 이렇게 말함. "있으면 저런 바보같은 짓은 왜 합니까?"
조주는 이렇게 말함. "다 알면서도 하는 거다."
이제는 왜 있다고 말함? 개가 진짜 불성 있는거임 없는거임?
이 어록을 두고, 다른 스님이 와서 이렇게 해설했음.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이것은 그 모든 질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질문이다.
예 라고 하든 아니 라고 하든,
너는 자기 자신의 불성을 잃을지니."
한번 기독교로 가져와서 생각해보자. 과연 신부와 목사님이 이 "개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예수가 진짜 이 "개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생각하긴 했을까?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기독교를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자는 또 어떻고?
이 질문을 던지는 게 정말 예수가 바라는 거였나? 그냥 이웃 사람을 사랑하라 가 그의 목표 아니었나?
선불교는 이런 아주 중요한 질문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대답을 기대하지 않게 하는 태도를 취함.
그 질문자에 있어서, 스스로 그 질문을 내려놓게 만들게끔 함.
심지어 같은 질문에 있어서 아예 다른 답변을 내놓기도 함.
[
조주가 시중에서 말했다.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피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말이 붙으면 이것이 간택이고 명백이다. 노승은 명백 속에 있지 않다. 그런데 오히려 그대들은 지키고 아끼는가?" 이때 어떤 승이 물었다. "이미 명백 속에 있지 않은데 무엇을 지키고 아낀다는 말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나도 역시 모른다." 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 속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까?" 조주가 말했다. "물어서 알았으면, 절하고 물러가라."
어느 승이 조주에게 물었다.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승이 말했다. "그것 역시 간택입니다." 조주가 말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구먼, 어디가 간택인가?" 승은 아무 말이 없었다.
승이 조주에게 물었다.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요즈음 사람의 둥지가 된 것은 아닐까요?" 조주가 말했다.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는데, 5년이 지났어도 그것에 대해 해명할 수가 없네."
어느 승이 조주에게 물었다.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언구를 붙인다면 이것 역시 간택이 됩니다. 화상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어째서 이 말을 전부 인용하지 않는가?" 승이 말했다. "저는 다만 여기까지만 생각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다만 이것이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려야 한다'이네."
]
완전 같은 말에 대한 이 뒤범벅이 된 말을 봐봐.
이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가 있는데, 일단 이게 뭔 말인지 설명해야 할 거 같음.
달마대사 그림을 보면 진짜 신기하게 생긴 거는 알 거야.
달마가 누구냐면, 원래 인도에 있었던 불교를 처음으로 중국에 전파한 사람임.
그니까, 원래 인도 사람임. 그 사람은 인도 사람이라 그림이 그런 거였음.
그니까 이 질문은 "달마가 왜 중국에 불교를 전파했는가?" 인 거임.
기독교로 치면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을 한 이유는?" 수준으로 엄청나게 큰 질문임.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급.
선불교의 어록에서는 이렇게 대답함.
"오래 앉았더니 피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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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전체는 이런 현문우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음.
분명 엄청나게 날카로운 질문들. 삶의 엄청나게 큰 질문들. 세상의 모든 정의와 이성 간의 아이러니에 대한 질문들.
이것에 대해서 답변을 정말 우둔하게 말하는 거임.
그리고 그 우둔한 답변에 우둔하거나 현명한 질문이 나오고, 또 우둔하게 답하는.
그런 것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끝까지 발전된 것이 아닐까. 이게 문학이라는 거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정확히 그 말할 수 없는 것 쪽에서 질문해야만 하는 것임. 우리들의 진짜 질문은 언제나 그 말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임. 이걸 어떻게 참아야 하나. 비트겐슈타인도 동의한 부분 같고.
이제 이런 문학적 현문우답의 예로, 페소아를 직접 들어보자.
내 생각에는 불안의 책 251이 훨씬 더 현문우답의 형태를 잘 보여주지만, 이 1도 꽤 도움될 거 같음.
종교적 사람들은 현문우답에 있어, 그 질문을 내려놓게 만들게끔 자기 자신을 맞출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종교인이 아니고, 페소아급 INTP 찐따일 뿐이야.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든 질문의 바다에서 삶을 낚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음.
바로 이런 방법에서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 대체 무슨 텍스트인지 알게 되는 것 아닐까.
페소아는 소크라테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이어졌던 논리라는 것을 이렇게 냉소했음.
하지만 페소아도 또한 그 논리라는 역설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희생자고.
이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해.
불안의 책 296, 297.
"부조리와 역설에 집착하는 것은 슬픔에 빠진 자들이 의지하는 동물적인 행복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활력과 생기를 표현하느라 엉뚱한 농담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등을 두드리기도 하는 것처럼, 기쁨과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지성으로 재주넘기를 하고 자기 방식으로 삶을 표현한다."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다."
책으로는 "한 권으로 읽는 벽암록" 을 추천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2319515
어렵다면, "한 권으로 읽는 무문관"을 더 추천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811114
알고보니까. 이 역해자... 여성이었음. 비구니더라...
철스퍼거들이 다 이렇게만 쓰면 철스퍼거라고 부를일이 없을텐데
굉장히 잘 읽었음
ㄹㅇ
무슨 의미를 찾으려면 그 대상을 직접 보지 않고 오히려 반대를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게 있지 항상 하는 생각이야
삶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기하학 밖에 없다고 단언하며 옆구리에 율리시스를 끼고다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생각나는 저녁이구나..
글 내용과 상관은 없지만 저 질문은 이병철이 쓴 걸로 알고 있음. - dc App
감사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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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냥 찐따라 그래
오... 이런게 철학이구나 재밌다
오랜만에 왔다가 너무 좋은 글 읽고 감. 평상시 다양한 매체들 속에서 은연중에 가졌던 생각이였는데 이 글 읽고 조금 더 구체화가 된 계기됨.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라 실베추 누르고 감.
멈춰~
선불교는 저 우답이 주는 머리띵함이 참 좋은듯
개추박고 간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중에 글삭하지 마라. 그리고 너는 아무래도 책한권 써야 할듯 내가 사서 읽어주마
나도
너에게 노짱콘을 주마...
스님들이 불공 드리는 이유 중 하나가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네. 삶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고행이란 걸 아니까, 사람은 세상에 태어남으로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하니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지. 기력 회복되면 또 써주라...
가까이서 보면 혼란이지만 멀리서 보면 정신의 진전이다
그냥 정치신학 하나면 다 끝나는 논쟁
밀란 쿤데라가 키치를 혐오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
형이 신이니 삶이니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봐야 인생은 별것 없을 거라고 조언했잖아
이야 재밌다
지린다
늦었지만 잘 읽고 감~
그 질문은 전혀 "불교뾰이"하지 않아요...!
행복한 사람.. 즉 뇌에서 도파민이 정상적으로 분비 되는 사람이면 삶의 의미 따위는 찾으려고 하지 않음.. 우울증 씨게 걸리고 느낀거임.. 나도 삶이 행복했을때는 하루하루에 충실했을 뿐 이따위 우울한 질문은 생각조차 안했었음.. 지금은 매일매일 무엇을 하며, 어떻게 남은 삶을 보내야 의미 있고 가치 있는지 생각중인데 글쓴이 말대로 대답되어질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고장난 뇌가 계속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한다.. 개추 누르고 감 ..
ㄹㅇ
이건희가 아니고 이병철 - dc App
고양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고통받네...
님 글 몇 개 읽었는데 너무 똑똑해서 우울한 사람의 표본같음 고지능의 향기가 진동한다
결국 어떤 고찰과 분석같은 것들도 그저 욕망에 이끌림에 의한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철학을 할 수 있음? 철학을 생각할 의지가 생길 수 있느냐는거임.
나는 결국 철학 같은 것들을 하는 건 어떤 강박 때문이라고 생각함. 뭔가를 그냥 모르는 채로 둘 수 없는 강박.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