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자가 아니라서 여쭙니다.

1. 윗글에서 '우울함'은 예술가적 기질의 '멜랑콜리'와 유의어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2. "진리는 가상의 형태들에서 언젠가 실로, 가상없이, 구원이 튀어나오리라는 망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어떤 맥락에서 읽어야 할까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일까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 입장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진리를 믿는 입장일까요.

3. <미니마 모랄리아> 143 에서 "예술은 진리라는 거짓으로부터 해방된 마술이다"라는 문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진리는 존재하나 그게 희망적일뿐인(힘이없는) 낙관론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실체를 스스로 가질 수 없다는 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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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에세이에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우울은 철저히 부정적인 것이 다스텔렌 darstellen 된 예술작품의 분위기 Stimmung 입니다. 그 경우 그 예술작품이 우울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이 무슨 지적 생명체도 아닌데 예술작품'이' 표현한다는 말은 이상한 말입니다. 굳이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표현이 예술가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작품의 어떤 합법칙적 형식화 = 작품의 재료들의 어떤 종합으]로 인해 작품에 객관적으로 생기는, 작품 자신의 표정(같이 느껴지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아도르노는 어떤 예술작품들에는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보통 진리는 학문이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예술작품의 가치를 진리와 연결시키는 오랜 예술론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연결은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 지반과 공통적 추구만이 아니라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것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만 정당합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표현이 무엇인가가 진리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 중 하나라고, 예술만이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별로 이해되기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1+1=2나 열역학 법칙들이나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따위보다는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진리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문적 인식도 도움을 주지만 그 삶을 향한 충동은 고통의 표현에 대한 반응으로 가장 잘 일어납니다.

예술은 꾸며낸 형상, 즉 가상입니다. 그 가상은 얼마든지 나쁜 의미의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을 별로 그렇지 않은 현실인것처럼 느껴지게 할 수도 있고 희망이 거의 없는데도 구원이 눈 앞에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술에 반해 아도르노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그 처지의 래디컬한 부정성 (희망이 없다고 느낄 정도의 부정성)을 실감나게 알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그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예술만이 진정하다고, 진리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런 예술도 여전히 가상입니다. 그러나 구원쪽으로, 의미있는 삶쪽으로 한발자국 내딛도록 우리를 부추킨다는 의미에서 순전한 가상은 아닌 가상, 구제된 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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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 주술과 아도르노가 좋아하는 예술은 자율적인 영역을 구성하고 비동일적인 것에 밀착하고자 한다는 (미메시스 충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가운데 전자는 자신이 현실적 효과를 내는 실천적 활동이라고 믿는 반면에 후자는 자신이 가상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차이 또한 있습니다. 달리 말해 태곳적 주술은, 아도르노가 좋아하는 예술과 달리, 사회와 통합되어 있는, 사회를 주어진 형태 그대로 재생산 하기 위한 활동이고 그 활동의 효과성을, 자신의 활동이 진리에 상응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몽이 더 진전된 사회들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 믿음이 미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