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산 정상에서 시작된 폭포가 첩첩이 떨어지면 산허리를 돌아 돌다리 아래를 빠져나가서는, 사도 산(産) 붉은 돌 그늘의 용소(龍沼)로 떨어져 못과 섞이고 때가 되면 아름답게 꽃 피우는 창포의 뿌리를 적셨다. 못에서는 잉어도 낚이고 붕어도 낚였다. 후작은 매해 두 번 소학교 학생들이 이곳으로 소풍 오는 것을 허락했다."
<봄눈>



"그녀 이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던가? 그래, 당연히 있었다. 사실 내가 어느 여름날 첫번째 여자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 아, 언제? 그해 여름 내 나이는 그때로부터 롤리타가 태어나기까지의 햇수와 엇비슷했다. 살인자는 으레 이렇게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쓰는 법이다."
<롤리타>



"마을 안의 정적, 그 진한 정적이 모든 소리와 호흡을 끊어버렸다. 딩씨 마을(丁莊)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조용하기 때문에, 가을의 끝이기 때문에, 황혼이기 때문에, 마을이 위축되고 사람들도 시들었다. 위축된 상태에서 세월도 따라서 말라버렸다. 마치 땅속에 묻힌 시신 같았다."
<딩씨 마을의 꿈>



"알랭이 여성의 매력의 여러 근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것과 거의 같은 순간에, 라몽은 뤽상부르 공원 바로 옆, 한 달 전부터 샤갈의 그림들이 전시된 미술관 근처에 있었다. 그림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도저히 자신이 저 끝없는 줄, 매표소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줄에 선뜻 들어가 그 일부가 된다는 건 엄두도 못 내리라는 것을 벌써 알았다."
<무의미의 축제>



"염영숙 여사가 가방 안에 파우치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기차는 평택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문제는 어디서 그걸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우치를 잃었다는 현실보다 감퇴되는 기억력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식은 땀을 흘리며 그녀는 자신의 지난 행적을 필사적으로 떠올려보았다."
<불편한 편의점>



"집에서 편의점까지 500미터 남짓 거리를 걷는데도 숨이 가빴다. 한여름 열기에 마스크로 호흡까지 힘들어지니 살집이 있는 선숙으로선 밖에 나오는 일 자체가 불편했다. 선숙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는 예삐와 까미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밤까지 일해야 해서 녀석들 산책이나 시킬 수 있을는지 걱정이 들었다."
<불편한 편의점 2>




장편 소설 극초반부를 가져왔는데 전자 4개랑
후자 2개는 밀도 차이가 확실히 느껴질거임...
밀도가 높은 원단이 옷에서 비싼 원단인 것처럼
밀도가 높은 문장과 소설이 고급지다는 느낌이
확실히 드는 것 같음
차이를 확연히 비교하기 위해서 김호연 씨에게는
가혹한 비교를 하긴 했지만...
거장의 소설은 한문장 한문장 거기에 담긴 사유와
고민의 깊이가 남다르고 거기서 밀도의 차이가
나오는 것 같음.
좋은 소설은 같은 페이지를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는 게 다른듯 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