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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합리주의자들의 이름은 독갤에서 종종 언급되는 반면 베이컨, 로크, 버클리 등 경험주의자들은 완전 찬밥 취급이다. 왜일까? 독서하는 이들은 세상을 경험하기보다는 사변 속에 머물러있기를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지성만을 사용해서 세상의 일반원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독단론을 자신의 종교로 삼고 있을지 모른다. 그냥 내 생각이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EBS 클래식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읽기 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총서들이 정작 입문자들이 읽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반면, 이 책은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적은 일반 성인 독자나 고등학생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만큼 쉽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유치하진 않음)

베이컨의 생애를 짧게 요약하고(진짜 짧음. 철학자 생애 구구절절 나열하는거 진짜 노잼) 그의 철학을 몇 개의 개념어로 정리한다. 귀납론 중시, 정복론적 자연관, 실용주의적 학문관 등등.

그리고 베이컨의 철학이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계보를 대략 설명한다. 베이컨은 경험주의 계보에 서 있으며 절제보다는 풍요를 중시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로크, 흄, 버클리, 마르크스(물질적 풍요 중시),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등과 함께다. 반면에 데카르트,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연역논리), 플라톤(절제 중시) 등등과 반대다. 포퍼가 반증주의를 꺼내와 베이컨의 귀납주의를 비판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그리고 정복론적 자연관과 인간중심주의의 측면에서 요나스(책임윤리)와 싱어(공리주의 동물윤리)도 언급된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만 가지고서는 근대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어떻게보면 근대에 미친 영향은 경험주의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식을 쌓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물질적인 풍요가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 경험과학의 토대를 쌓았다는 것 등등..

얼핏 들어서 이름만 알고 있던 네가지 우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인간은 지성을 이용해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베이컨이 제시한 귀납론에 근거한 과학주의는 해석학이라든지 구조주의라든지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을 받는 것 같아 보이지만 소박한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설득력을 지닌 것은 아무래도 과학주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책이지만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 교양독자에게 짜임새있는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EBS의 기획이 엿보였다. 세창이나 살림에서 내는 총서는 중구난방에 짜임새도 없고 필력도 엉망인 경우가 많아서 꺼리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다른 책도 읽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