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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렬 독서를 하다보면 이 책과 저 책에서 느낀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의 생각 아래 나열될 때가 있다. 현재 병렬 리스트 중 하나인 <이전 세계의 연대기>는 지질학에 관한 장대한 에세이이다. 정말 이렇게 땅 얘기, 바위 얘기, 산맥과 지질학 얘기 밖에 없을 일인지, 대단한 책이다. 물론 중간 중간 삽입된 휴먼 스토리들도 정말 맛있지만, 책 전반은 결국 이 암석은 어느 시대 때 어떻게 형성됬고, 이 지형은 이 시대에서 저 시대를 거쳐 어떻게 변화를 겪었고, 이 지질학자는 어떤 사연이 있어서 여기에서 이 돌들을 캐고 있으며, 석유 회사들이.. 과거의 학자들이.. 이 곳의 원주민들이.. 모험가.. 여행자.. 강과 산, 곰과 여우가.. 등등. 흥미롭다면 흥미롭지만 문외한에게 썩 재미라고 있기 힘든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감칠맛이 감도는 문장, 교향곡 같은 웅장함과 차분한 리듬은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만든다. 한마디로 잘 읽히는 글이다.
이와 달리 <다빈치 코드>는 아무나 읽어도 꿀잼인 책이다. 이 사람은 누구지? 저건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빨리 다음 장을 읽고 싶다. 문장도 쉽다. 내용이 머리에 쏙쏙 박힌다. 그러나 미묘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문장 자체의 예술적 가치는 느끼기 힘들다. 그럼에도 <다빈치 코드>는 정말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 책이다. 도서관 한 곳에만 같은 책을 40권씩 소장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 없다. 반면, <이전 세계의 연대기>는 퓰리쳐 수상작임에도, 그만큼 널리 읽힌 책은 아닐 것이다. 이러다 보니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느낌이기는 하지만, 술술 읽힌다는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연찮게도, 이 두 권 사이에 완독한 책이 <가면 뒤의 소년, SAM>이다.
이 책은 얼굴에 거대한 혹을 달고 태어난 소년의 이야기로, 2001년 퓰리쳐상을 받았다. 누구라도 눈길을 안 줄 수 없는 소재,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팝적인 리듬. 실제 신문에 연재 될 당시에도 엄청난 이슈였다고 한다. 1998년 퓰리쳐 수상작인 <이전 세계의 연대기>와는 불과 2년 밖에 안되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모든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만약 위 세 권 중에 술술 읽히는 띵작을 골라야 한다면 난 주저없이 <가면 뒤의 소년>을 고를 것이다.
그럼 전세계 베스트셀러지만 페이지터너 취급 받는 책, 아름다운 글을 썻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나는 세상에 나쁜 작품은 없다는 평등한 박애주의자가 되고 싶지도, 어느 하나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전체주의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문득 <괴테와의 대화>에서 읽은 일화가 떠오른다. 괴테는 미감이란 최고의 것에서만 기를 수 있다며 정말로 좋은 것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상의 만족감을 주니 다양한 분야의 최고의 것들을 두루 보기를 권했다. 내가 애초에 시덥잖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글이 잘 읽히고 어떤 책이 잘 팔리니 하는 생각 자체가 너무 좁은 시야가 아니었을까?
로버트 맥키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영화 <설리번의 여행>을 언급한다. 설리번은 헐리우드의 성공한 영화 감독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재밌는 오락 영화를 만들어 유명세를 떨친 주인공이다. 그러나 헐리우드 밖 처참한 세상의 현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사회성”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며 현실 세상으로 뛰어든다. 여러 좌충우돌 끝에 사회성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허울 좋은 다짐은 무참히 깨어지고, 처참한 현실이라고 여겼던 바로 그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고 깔깔 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게 된다. 로버트 맥키는 “사회성은 이미 그들의 삶에 차고 넘쳤다.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즉 재미있고 가벼운 오락거리였다.” 고 지적한다. 이 세상에 수저가 없어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숟가락으로 의자를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숟가락을 만들겠다면 최고의 숟가락을, 의자를 만들겠다면 최고의 의자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출발점>에서 밝혔던 것처럼, 홍수에 양동이로 물을 붓는 행위가 될지라도 이왕이면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을 어쩌지는 못한다.
세상에는 수직적 다양성과 수평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그 중 어떤 작품들은 정말 월등한 성과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가치의 위계는 하나의 완전한 피라미드라기 보다는 삐죽삐죽한 성계들이 엉켜있는 모양이 아닐까? 괴테의 말도 단지 수준의 차이를 논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최고의 것”에 대한 더 큰 시야. 한번에 하나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되려 한번에 하나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관점들이 층계를 형성하고, 때문에 더 큰 시야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그 중에서도 더 큰 시야를 가지는 것. 그게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시나리오..>에서 로버트 맥키는 또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상상력이며 그에 비하면 논리는 애들 장난일 뿐이라고 말한다.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게 살아지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더 큰 시야를 상상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로 느껴진다. <부분과 전체>에서 하이젠베르크가 고뇌했듯이 말이다. 나에게 그만큼 치열하고 수준 높게, 다양한 관점들로 사고할 능력은 없지만, 병렬 독서를 할 때 나타나는 이런 저런 생각들은 자연스레 무언가를 상상하게 한다. 그럼 나는 그 생각과 생각 사이의 빈 연결고리들을 다시 책으로 채워넣어 하나의 관점으로 정리하곤 한다. 책은 언제나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삶의 한 즐거움이지만, 사고의 수단으로 격하될 때조차 빛이 난다.
여러 책을 연관지어 생각하는거야말로 독서의 백미다
최상으로 보편적인 건 보통 수준은 미달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