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역사를 논하는 데 있어 아마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 중 하나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것이다. 하지만 E.H. 카를 마치 역사 이론 및 역사 철학 분야의 도달점으로 여기는 한국의 풍조와는 다르게, 그것이 실제 학계의 역사 이론 및 역사 철학 담론에 있어 지니는 지위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국내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역사 이론 서적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학술 논문에서조차 E.H. 카의 견해가 무지성으로 인용되는 한국과 다르게, 해외에서 E.H. 카의 입지는 전혀 절대적이지 못하다. 심하게 말하면, 역사 철학 분야에서 카의 영향력은 영국 내에만 국한된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역사 이론 전공자인 고려대 최호근 교수의 말대로, 한국에서 《역사란 무엇인가》가 독점적인 지위를 지니게 된 것은 이 책이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쉽지도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1980년대 한국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 중인 한국의 괴멸적인 인문학적 토양 역시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역사 이론적, 역사 철학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학자 E.H. 카가 학술계에서 지니는 위치를 한번 되짚어 보자. 대중적으로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가장 유명하겠지만, 학자로서 E.H. 카의 대표작은 《20년의 위기》와 《소련사》이며, 그의 본업은 이와 관련된 국제 정치학 분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카 당시에는 정치학과 역사학의 전문화가 지금보다 불명확하기도 했고, 카가 소련사 서술 분야에 남긴 업적은 지금까지도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역사 이론 분야에서는 어떨까?
우선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카는 자신을 마치 랑케의 ‘객관주의’와 크로체, 콜링우드의 ‘주관주의’ 간의 절충자인 것과 같은 논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 해석에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카의 입장은 결국 크로체와 콜링우드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허승일이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것과 같이, 카의 주장은 교묘한 수사학적 기법으로 자신을 부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서, 역사학의 이론적 기반에 대한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면 E.H. 카의 위치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역사학의 방법론이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결국 ‘철학’이며, 이는 크게 나누면 대륙 전통의 해석학과 영미식의 분석 철학, 그리고 전통적인 논의에 대한 도전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세 조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해석학은 랑케에서 드로이젠, 딜타이로 이어지는 역사학의 전통적인 방법론으로, 독일에서 근대 역사학이 성립된 이래로 전 세계로 (그 이론적 성찰이 완전히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확산되었다. 이는 현재에도 가다머와 리쾨르, 코젤렉과 뤼젠 등으로 이어지며, 역사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한 조류인 분석 철학은 라일과 오스틴 등 옥스퍼드학파의 영향을 받아 언어 분석, 담론 분석을 강조하는 유형으로, 포콕과 스키너의 케임브리지학파가 그 대표라 할 수 있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이든 화이트가 대표적으로, 역사 서술의 과학성, 객관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조류이다.
E.H. 카는 이 세 가지 조류 중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은 사실 영국 내에서 랑케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사변적, 이론적 논의를 배격하고 사료 비판에 집중하는 루이스 네이미어, 제프리 엘튼류의 ‘실증주의’ 에 대한 비판에 있는데, 이는 역사 이론 논의에 있어 주변부에 위치한 영국학계 내부의 논의에 불과했다. 이는 애초에 랑케의 역사관을 ‘사료 비판을 바탕으로 한 과거의 복원’ 및 ‘실증주의’로 보는 견해 자체가, 독일 본토에서 보았을 때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결국 이론적 성찰이 결여된 에세이에 불과하기에, 사학사 및 사상사에 있어서도 E.H. 카의 위치는 극히 제한적이다. 단적으로,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를 비롯하여 《Companion to Western Historical Thought》, 《Oxford History of Historical Writing》과 같은 저작들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독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조차도, 《역사란 무엇인가》를 중요하게 다루는 역사가, 역사 이론가는 그리 많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에세이를 기준으로 보아도,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같은 훨씬 더 중요한 역사가들의 대체재가 많은 시점에서 E.H. 카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풍조는 이제는 작별할 때가 된 것 같다. 《진리와 방법》이나 《지나간 미래》가 너무 어려워서 못 읽는다 쳐도 말이다.
그러니 다들 진리와 방법 읽자
요약 : 한국에서 빨던데 흠.. 그정둔가?
이거 한국에서 많이 읽히게 된 계기가 80-90년대 운동권의 이른바 <의식화 교육> 커리큘럼의 스타터 킷에 포함된 보조 교재였기 때문이라고 봄 이 책하고 <해방 전후사의 인식>으로 슬슬 시동걸었다고 한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언급 안했는데 이게 핵심이긴함
소위 대학생 교양 서적이라 불리는 책들 대다수가 까고보면 운동권에서 열렬히 밀던 책인 거 보면 짜치게 식더라. 책의 수준이랑 별개로 사상 운동 한다고 뒷작업 하던 당시 적나라한 풍경을 목격하는 기분임.
막스 베버조차도 불온서적이어서 eh카를 읽을래도 뒷작업을 해야 했던 당시 시대상에 짜치게 식는게 먼저 아닐런지...ㅇㅇ
이게 뭐가 문제인거임
카 책이 최근 학풍이랑 거리가 있긴 함 그리고 그거와는 별개로 교양 서적 1도 안읽는 놈들은 운동권 책이라도 읽고 말하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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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이론서, 사학사 등에서는 꼭 한번씩 언급함 의의와 비판점 모두 소개할 정도로 - dc App
인터넷이 없을 때 한국은 한동안 해외 여행도 자유롭지 않은 지식의 갈라파고스였으니까.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몇 권 되는 것 같아.
역사학 주요 저작 모음 독갤에도 올려주시나
정성글 추!
슈펭글러식 역사학은 한참 전에 한물갔나
그러면 이제 이거 말고 뭐 읽으면 되나
또 학문적 변방국의 설움이군... 이쪽 분야 잘 모르긴 하는데, 이론적 디테일에서 비교 불가하더라도 큰 틀에서 제시하는 방향성은 가다머랑 유사한 것 아닌가? 별 비중 없는 에세이인 거지 총균쇠처럼 전공자들한테 막 까이는 그런 내용은 아니지 않아?
그냥 카의 관점은 드로이젠에서부터 시작되는 주관주의 견해의 연장선에 불과하고, 거기에 모더니스트적인 소박한 진보관을 덧댄거임 역사이론 분야의 영향력 측면에서도 코젤렉이나 스키너, 아르톡이랑은 비교할 건덕지도 없고 그냥 역사이론 전공자들한테는 별로 언급할 내용이 없다고 봐야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