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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무서워요. 이제는 무서워서 방문은커녕 이불 밖으로도 나갈 자신이 없어요. 깜빡 잠이 들었다가 덜컥 내일이 찾아오는 게 두려워요. 다시 또 펼쳐질 별 볼 일 없는 하루와, 꼭 그만큼 더 잃어가는 젊음을 마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잠을 못 자나 봐요. 오늘만큼은 내일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패배할 일도, 잃어갈 것도 내겐 없다고 믿고 싶어서요…….

- <기면증> 중


책의 시작은 '우울'이란 주제를 잡은 본작답게 그러한 우울로 내일이 두려운 화자가 나타납니다.


버려진 이들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목마른 이가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는 일과 무척 닮았다. 왜나하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미 비극적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몸 안이 소금물로 푹 절여질수록 한층 더 고통스러우리라는 것까지 모두. 그런 이들에겐 훗날 비가 내릴 거란 믿는 일조차 독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쓰러지게 만들지만, 희망은 쓰러진 그대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한층 잔인하다. 다리가 통째로 부러지거나 잘려나간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사람들은 선한 의도를 갖고 한 일들이 으레 선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는다. 자신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슬픔을 알고 있다고, 모든 타인을 위로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산다. 내가 내미는 온정의 손길이 누구에게나 따뜻할 거라고 여기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의 체온을 모른다. 다른 누군가와 접촉해보기 전까지는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 <고슴도치> 중


오랫동안 우울한 이들에게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네요, 그럼. ……벌서 시간이 다 됐네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여쭤 봐도 될까요? 우울할 때 뭘 하실 건가요?"

"꼭 뭘 해야 하나요?"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꼭 해야 하는 게 있다면 그런 거겠죠. 우울할 땐 최선을 다해서 우울해할 수밖에 없어요. 있는 힘껏……"

- <해가 없는 연립방정식의 풀이> 중


우울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최선을 다해서 우울해하는 것.

이묵돌 작가의 최근작 『최선의 우울』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선 여기랑 다르게 모든 게 바뀌니까. 아무것도 '그대로' 있지 않아. 이건 알아두렴. 시간이 흐르면, 배경이 움직이면, 거기에 따라서 너도 따라서 걷거나 뛰어야 해. 그럼 안녕……." 토끼는 마지막 인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사라졌다.

- <한여름 밤의 꿈> 중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삶에 맞추어 걷거나 뛰어야 합니다.


다만 노인은 많은 이들이 막연히 영원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타인과의 관계, 사랑, 행복과 불행, 국가와 이념, 전통과 권위, 철근과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건물들까지―이 덧없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하물며 기다림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한 번 썩으면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인이 지금껏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그 원형을 유지해 온 것은 기다림이었다. (…) 그렇게 썩어빠진 기다림을 껴안고, 고독한 죽음에 매일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 <남행렬차> 중


비록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삶 속에서 그리움만은 남아있습니다.


"더 멀리 볼수록 우리의 가까움을 실감하게 돼요. 우리가 얼마나 서로의 곁에 있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래서 아이들한테는 우주가 얼마나 드넓고 광활한 곳인지도 알려주어야겠지만, 동시에 이토록 가까이 있는 서로가 얼마만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지도 말해 줘야 해요. 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건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 교사가 해야 할 일에 가까우니까요."

- <천체, 물리학의 이해> 중


저 드넓은 우주를 보더라도, 우리는 서로가 가까이,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니까.


트레이너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으면서, 나는 왜인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어딘가 너무 쓰라려 아프지만, 곧 거기에도 굳은살이 생길지 모를 일이라고. 언젠가 또 다시 떨어져 나가더라도, 죽어라 아파도 살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고. 당장은 물집이 터지고 진물이 흘러나오겠지만…….

- <굳어가는 일> 중


죽어라 아파도 살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니까요.


베이스는 제 목소리로는 절대 낼 수 없을 만큼 낮은 음을 연주할 수 있어요. 보통은 높은 음이 귀에 잘 들리죠. 가수들은 높은 음역대의 노래를 소화하는 능력에 따라 급이 나뉘기도 하구요. 그런데 베이스는 지나치게 높게 갈 필요도 없어요. 필요에 따라서 더 낮아질 순 있지만 그건 정말 필요해서 그런 거지 뭘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베이스는 그냥 베이스예요. 다른 무언가로 판단되지 않죠. 경쟁할 필요도 없고, 어떤 악기와도 어울릴 수 있어요. 내가 받쳐주는 소리 위에서 마음껏 뛰놀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왜 모두가 위로 올라가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낮은 곳에서도 너무나 자유로운데요.

(…)

그냥 거기 있어요. 우리가 미워하든, 사랑하든 간에.

우리에겐 그런 베이스 같은 것들이 필요해요.

- <BLUE MATTER> 중


우리가 낮게 위치한다고 한들, 우린 여기 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든, 사랑하든 간에, 우리는 그런 낮은 존재로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묵돌 단편선 1 『시간과 장의사』보단 조금 가슴찡한 무언가가 없지만서도

이 글들 덕분에 어떻게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