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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로 불린다. 그 명성에 끌려 나 또한 「돈키호테」를 읽게 됐다. 얼마 전 독서 갤러리에서 "「돈키호테」를 꼭 읽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읽은 적이 있다. 「돈키호테」를 완독한 지금,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돈키호테」를 모두가 읽을 의무는 없지만, 당신이 책에서 어떤 것을 구하고자 하든 「돈키호테」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도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며 재밌는 여행을 따라갔고, 정말 많은 감동을 느꼈고, 많은 교훈을 얻었고, 많은 여운을 남기고 책을 덮었다.


「돈키호테」는 희극이다. 당대의 세태를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로 점철돼있는 작품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정치상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답하련다. 무대 장치는 많이 변했지만 배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인간들이며 그들은 변함없이 인간일 것이라고. 나는 「돈키호테」에서 꼬집은 세태들을 현대인의 입장에서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오만에 빠져 적을 만들고 악을 낳는다. 예를 들어 16세기 스페인은 무어인을 차별했다. 순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무어인이라도 쫓아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정도로 수위가 높은 차별을 보지 못한다. 다만 교실 같은 곳에서 이뤄지는 왕따 문제, 사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차별 문제와 역차별 문제를 여전히 본다. 예전보다 은밀해졌을 뿐, 적과 아군을 가르는 인간의 습성은 여전히 흉악하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돈키호테가 행차한다. 돈키호테는 분명 미친 사람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기사도와 무관한 모든 분야에서 명석한 모습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초능력자도 아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선물한다. 물론 돈키호테의 선물이 아니라 우연의 선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사람들이 그 선물을 온전히 받도록 격려하는 힘을 갖고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살 것을 권하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마음의 소리를 듣고 행동하도록 돕는다. 돈키호테는 그저 이상주의자이다. 단지 다른 이상주의자들보다 기사도를 맹신할 뿐이다.


그러나 돈키호테 또한 현실에 좌절한다. 돈키호테의 정의를 관철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장난스러운 곳이다. 단지 자기네들 웃으려고 돈키호테와 산초를 교활하게 학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돈키호테는 어쩔 방법이 없다. 방법이 있다고 해도 돈키호테는 노령이어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돈키호테를 따르는 산초 또한 마찬가지다. 산초는 돈키호테와의 고행 끝에 원하던 자리에 오르지만, 그 자리의 무게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모든 것을 포기한다. 돈키호테의 흥망성쇠는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상에 다가가는 과정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현실의 벽이 이상으로 더는 다가갈 수 없게 한다. 이 벽 앞에서 돈키호테는 살아갈 의미를 잃는다. 돈키호테의 삶은 한계를 넓히는 과정이 아니라 한계를 느끼는 과정이었다. 「돈키호테」는 그래서 비극이기도 하다.


미친 사람의 이야기에서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돈키호테」를 읽을수록 점점 돈키호테와 산초의 여정에 애정을 느끼게 됐다. 이들의 삶은 나와 닮았다. 물론 나는 기사도에 관심이 없고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읽은 적도 없다. 하지만 나 혼자 이상에 잠겨 있다가 낭패를 본 일은 많다. 대학교에서 남들이 다 보는 족보를 안 보고 오로지 내 실력으로 시험을 보려다가 시험을 망친 적도 있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때 규정을 위반하는 장난을 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말렸다가 겁쟁이라며 대놓고 망신거리가 된 적도 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딱딱한 것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절대 붙을 기미가 없는 시험에 계속 매달리는 사람들, 일확천금을 누리려고 일은 안 하고 코인만 쳐다보는 사람들... 이렇게 보면 「돈키호테」는 우리의 거울이다. 우리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지만, 그 웃기는 모험이 우리 삶의 객관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이상한 것을 믿는다. 이에 활기를 얻고 살지만, 이내 현실에 좌절한다. 우리 삶도 한계를 넓히는 과정이 아니라 한계를 느끼는 과정이다.


「돈키호테」를 다 읽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돈키호테는 알론소 키하노보다 행복했다. 당치도 않은 꿈이었지만, 그걸 쫓을 때 그는 행복했다. 돈키호테가 기사를 내려놓는 장면은 곧 돈키호테와 알론소 키하노 둘 다 살아갈 이유를 상실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믿고 있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 바보 같고 덧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길이길이 책으로 박제될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한계를 내가 직접 체감하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나도 돈키호테처럼 바보 같아도 당당하게 살고 싶다. 삶이 한계를 느끼는 과정이라면, 정말로 그 한계선에 맞닿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바보처럼 살고 싶다.


이제 이 책을 놓아줄 때가 왔다. 독자로서 돈키호테와 산초와 함께 하는 여행은 정말 즐거웠다. 동시에 정말 아쉬운 이별도 경험했다. 둘의 모험은 끝났다. 하지만 그 후속작으로, 비록 세르반테스만큼 멋지게 표현할 수도 없고 그 시절만큼 극적인 일은 없겠지만, 나의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질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말미에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작별했지만 나는 그 말을 지우고 내 문장을 새로 쓰고 싶다. 내가 믿는 이상한 것이 이뤄질 수 없는 터무니없는 것임을 스스로 확인할 그날까지 나는 모험을 떠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