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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는 그야말로 욕망의 일대기이다. 욕망의 화신 엠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욕망에 지배당하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욕망을 갖지 않은 사람이란 애초에 없고, 또 작중 인물들이 다 욕망에 의해 추태를 보이기 때문에, 욕망의 연대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마담 보바리」를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겠다.
엠마는 그야말로 자극에 미친 사람이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를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다. 어릴 적 수도원에서 보인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타고난 성정이 그런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해설은 엠마가 '현재'보다 '미래와 과거'를, '여기'보다 '다른 곳'에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엠마는 권태를 참지 못해 끝없이 자신의 환경을 바꾸려 한다. "지금 자기가 영위하고 있는 이 고요한 생활이 지금까지 꿈꾸어 왔던 바로 그 행복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엠마의 불륜도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극이 필요해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른다.
진한 욕망은 현실을 보는 눈을 왜곡해서, 그녀는 바람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그녀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물질적 사치의 쾌락과 마음의 기쁨을 혼동하고, 습관에서 오는 우아함과 감정의 섬세함을 혼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가 읽은 소설 속 인물이 되며, 심지어 상황마다 그 캐릭터마저 바꾸고는 한다. 심지어는 한창 애욕을 불태우는 시기가 지나고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하면 성녀를 연기하며 숭고한 자아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녀에게는 되고 싶은 모습만 있을 뿐 지키고 싶은 모습은 없었다.
결국 욕망을 채울 수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욕망을 섣부르게 실현하려 든 것이 엠마가 파멸한 원인이다. 비유하자면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녀는 수단이 부족해지자 도덕에서 벗어난 수법도 썼다. "거짓말이 이제는 어떤 필요, 광적인 습관, 쾌락이 되어버렸다." 윤리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는 가정에서도 집에서도 대놓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충족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잠깐 욕망하던 것과 접촉하면 이제는 권태가 밀려온다. "우상에는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칠해 놓은 금박이 손에 묻어나는 것이다." 그녀의 일생을 요약하는 훌륭한 문장이 있다. "모두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그 뒤에는 권태의 하품이, 환희마다 그 뒤에는 저주가, 쾌락마다 그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고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오직 보다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남을 뿐이다." 바라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에 가상을 씌우려다 파멸한 불쌍한 인물. 그녀의 허무맹랑하고 병적인 심리는 '보바리즘'이라는 단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엠마의 파멸은 전적으로 엠마 자신이 자초한 것이다. 하지만 엠마가 겪는 문제가 엠마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제목인 '보바리 부인'만 해도, 사실 작중에서 그렇게 지칭할 수 있는 인물이 엠마를 포함해 세 명이다. 한 명은 샤를르 보바리의 어머니인 보바리 부인이다. 그녀는 궁합이 안 맞는 남편 밑에서 자신의 욕망을 샤를르에게 투영했다. "자신의 삶이 고립되어 있다 보니 그 여자는 흩어지고 부서져버린 자신의 모든 허영심을 그 어린것의 머리에다 걸었다." 우둔한 샤를르가 의사라는 섬세한 직업을 맡게 된 부조화도 여기서 기인한다. 샤를르가 재혼한 뒤에도 자신의 입맛대로 부부를 조종하려 했으니, 그녀의 욕망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또 다른 보바리 부인은 샤를르의 전처다. 그녀는 마치 엠마가 마음이 식은 로돌프를 대하듯 샤를르를 계속 의심하고 추궁해댔다. 자신의 악행의 대가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금전적으로 파멸하고 목숨을 잃은 것마저 엠마와 판박이다.
엠마가 가정적인 면에서는 악녀이지만, 욕망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은 늘 남자들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로돌프의 심사는 처음부터 추악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달콤한 비소가 엠마를 중독시켰다. 엠마를 구슬리려고 흉계를 꾸미는 로돌프를 본 사람들은 로돌프의 고백을 주변에서 수상(受賞)하던 가축과 퇴비처럼 불쾌하게 느꼈으리라. 로돌프도 따지고 보면 엠마보다 처지가 나을 뿐 심사가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불을 지르는 것을 즐기는 작자이니 욕망의 화신이라는 말이 엠마보다 로돌프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레옹도 로돌프와 별반 다를 것 없다. 레옹은 애욕보다 출세욕이 더 컸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 있었을 뿐이다. 나는 처음에 레옹이 자신의 애욕을 출세욕으로 돌리는 것을 건전한 전회라고 생각하며 지지했는데, 다시 나타난 레옹이 끝없이 달리는 욕망의 마차에서 닦달할 때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비록 레옹이 나중에 다른 짝을 만났지만, 나는 레옹이 모든 것이 안정돼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을 때 같은 짓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보바리 집안의 비극은 이렇게 치정 관계 때문에 몰락했지만, 「마담 보바리」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찾자면 금전욕과 명예욕이 있다. 엠마가 탈선했을 때 뢰르는 그녀를 부추겨서 빚을 고의로 늘린다. 샤를르가 치정 관계에 둔감해서 엠마를 별반 방해하지 않은 터라 나는 뢰르야말로 「마담 보바리」의 메인 빌런으로 보였다. 솔직히 내가 엠마가 되는 것보다 내 옆에 뢰르가 있는 것이 더 무섭다. 「마담 보바리」의 주변부를 장식하는 오메도 인간미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아는 것을 떠벌이기 위해 산다. 엠마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데 옆에서 신경학 얘기나 하고 있는 그가 개탄스러웠다. 심지어 오메는 샤를르가 자신보다 권위가 낮아졌다고 직감하자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던 샤를르를 버렸다. 오메의 명예욕을 아는 독자는 오메의 학식과는 별개로 오메를 응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습게도 샤를르에게도 명예욕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샤를르는 늘 엠마를 사랑했고 늘 가족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욕망을 악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가 명예를 쌓으려는 것도 결국에는 가정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투른 명예욕이 이폴리트의 다리를 없앴다는 점도 빼먹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욕망은 도처에 널려 있다. 욕망도 사람의 동력원이다. 꿈과 욕망은 어감은 천지 차이여도 본질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니 어쩌면 아예 둘이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꿈을 좋아한다. 꿈은 심장을 뛰게 한다. 꿈이 곧 우리가 사는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꿈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미몽에서 깬다. 그래서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은 어딘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사람은 자기가 현실의 벽에 부딪힌 줄도 모르고 앞으로 가려다 생채기만 늘릴 운명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옆 사람을 붙잡고 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마담 보바리」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질문은 이것이다. "욕망을 품는다면 어디까지 품어야 할까?"
엠마가 파멸한 결정적인 원인은 그녀가 저지른 비위지만, 윤리가 만사의 원칙이 되길 바라는 것도 일종의 꿈이다. 「마담 보바리」의 모든 등장인물이 욕망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 세상의 원칙은 윤리보다 차라리 욕망에 가깝다. '나쁜 짓 하지 말기' 따위를 가르치려고 「마담 보바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마담 보바리」는 가슴이 두근대게 하는 모든 일이 좋은 일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내 꿈을 좇다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가르친다. 누군가가 내 꿈을 응원할 때 설렘만큼 의심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꿈보다 의심에 파묻혀 사는 것도 그만큼 불행할 것이다. 엠마가 부정을 저지르며 거짓을 말할 때도 그녀가 느낀 기쁨과 사랑은 분명 그 당시에는 진심이었다. 결국 우리는 꿈 때문에 산다는 전제도 꿈 때문에 망한다는 전제도 버릴 수 없다.
결국 「마담 보바리」가 내게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기." 엠마는 꿈속 자신이 정말 자신이라고 자아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꿈이 자신을 뜯어먹고 있을 때 우리는 정말 그 꿈이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꿈을 좇다가 몸에 생채기가 나도 버틸만하면 괜찮다. 하지만 몸에 있는 생채기를 없는 셈 쳐서는 안 된다. 상처가 너무 아프면 자신이 걷는 길이 과연 옳은지 잠시 멈추고 자신의 이야기를 쭉 훑어야 한다. 꿈을 뚜렷이 보는 만큼 거울도 뚜렷이 볼 줄 알아야 한다. 엠마가 읽던 수많은 치정 소설들 속에 「마담 보바리」가 있었다면 엠마도 자신의 모습을 읽고 멈췄을 지도 모른다. 결국 어디까지 욕망해도 되는지는 경험이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지 못해 경험의 가르침을 떠올릴 수 없다면, 통증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담 보바리」를 통해 플로베르가 의도한 메시지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마담 보바리」를 통해 이렇게 배워간다.
이렇게 「마담 보바리」 읽기를 마친다. 저번에 「돈키호테」를 읽고 꿈의 아름다운 면에 감동했다면 이번에는 「마담 보바리」를 읽고 꿈의 어두운 면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만큼 「마담 보바리」는 표현력이 「돈키호테」만큼 우수한 작품이었다. 훌륭한 경험이었다. 문장으로 그린 점묘화라고나 할까. 개개의 문장 중에서도 우수한 것이 많아 이 글을 쓸 때 버린 문장들이 계속 아깝다. 특히 「마담 보바리」는 문체 면에서 의미가 깊은 작품으로 계속 바뀌는 시점을 분석하는 재미도 있지만, 분량상 이 부분은 다루지 못해 유감스럽다. 대신 민음사 판본은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도 해설이 가장 우수한 축에 속하니 「마담 보바리」를 읽거든 민음사 판본의 해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ㄴㄷㅉ
예전에 읽을 때 엠마가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다시 읽고 싶어지네
주변에 시상하고 있던?
다시 읽어보니 문장이 어색하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ㄴㄷㅉ
ㄴㄷ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