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이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유랑하여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린 것이 아님을 내 어찌 알겠는가?
여희는 애艾 땅의 국경지기 딸이었네. 진晉에서 처음 그녀를 잡아갈 때, 그녀는 눈물로 옷을 적셨지.
그러나 궁궐로 들어와 왕과 네모반듯한 침상을 함께 쓰고 꼴과 곡물을 먹인 가축들의 고기를 먹게 되자, 그제야 눈물 흘렸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가 이전에 간절히 살고 싶어 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지 내 어찌 알겠는가?
꿈속에서 연회를 즐기던 자도 날이 새면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자도 날이 새면 사냥을 떠난다네.
우리는 꿈을 꾸는 동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꿈꾸는 도중에 그 속에서 꾼 꿈을 해몽하기도 하지.
꿈에서 깨어나서야 꿈을 꾸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일세.
최종적으로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최종적으로 꿈임을 알게 되겠지.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안다고 확신한 나머지, 제후입네, 마소 치는 사람입네 한다네.
참으로 구제 불능이지!
자네와 공자, 두 사람 다 꿈이고, 자네를 꿈이라고 부르는 나 역시 한바탕 꿈일세.
공자가 했다는 그 말에 대한 적절한 이름은 '번뜩이는 기발함'弔詭이라네.
만대가 지난 뒤 위대한 성인이 나타나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아침저녁 사이에 벌어진 듯한 일일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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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구분한다' 해도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것이 남게 되고, 아무리 '양자택일적 선택지들을 분별한다' 해도 그 선택지들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닌 것이 남게 된다.
사람들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성인은 그것을 가슴속으로 간직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양자택일적 선택지들을 두고 왈가왈부하면서 그것을 서로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양자택일적 선택지들을 분별하는 것'은 어떤 것을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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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도 '다른 것'이 아닌 게 없고, 어떤 사물도 '그것'이 아닌 게 없다.
그대들이 자기 자신 역시 '다른 것'으로 대한다면, 그것들[다른 것과 그것]은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면, 그것들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다른 것'을 따른다."
이는 '그것'과 '다른 것'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죽어가는 동시에 살아 있다.
어떤 것은 허용될 수 있는 동시에 허용될 수 없는 것이 되고, 또 허용될 수 없는 동시에 허용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상황에 따라 그것이면 상황에 따라 아니고, 상황에 따라 아니면 상황에 따라 그것이다.
성인이 이 경로를 따르지 않고 사물들을 하늘의 빛으로 열어놓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경우도 역시 상황에 따른 '그것이다'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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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 저장되어 있는 세상은 달아날 곳이 없다.
그것은 변치 않는 사물의 궁극적 본질이다.
우리는 우연히 인간의 형체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한다.
인간의 형체 같은 그런 형체가 만 번의 변화를 거치면서도 그 끝을 모른다면, 우리가 누릴 기쁨은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노닐려고 하는 곳은 사물들이 달아날 데가 없어 모두 다 존재하고 있는 그런 곳이다.
성인은 젊어서 죽는 것이 좋다고 하고 늙어가는 것도 좋다고 하며, 시작하는 것도 좋다고 하고 끝나는 것도 좋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충분히 본보기 삼을만 하다.
하물며 만물이 다 매여 있는 곳, 우리가 단 한 차례 변화할 때에도 의지해 있는 것, 그것이라면 어떻겠는가?
마성의 책이야 정말
불교적이기도 하고 포모적이기도 하네
동양사상중에 공자 말고는 장자가 제일 흥미롭더라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