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저자 임승수 작가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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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상을 낳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노예제의 폐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노예 해방 사상이 나타났고 신분제의 폐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신분제 폐지 요구가 제기되지 않았겠는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상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본주의를 정확히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지금처럼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기 이전에 인간 사회는 주로 농사를 지어 먹고살았다. 경제 활동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농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생산 수단은 무엇일까? 토지다. 농경 사회에서 광활한 농지를 독점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고대나 중세에 벌어진 다양한 전쟁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 본질은 결국 권력자들의 땅따1먹기 싸움이다.
그 시대 지배 계급은 자신이 보유하고 통제하는 토지에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도록 독려 및 강제했으며 백성들이 일구어낸 생산물의 일정 비율을 조세 혹은 지대의 형태로 가져갔다. 이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생산물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으로 수탈당했다. 불평등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사회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차별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집단적 세뇌 기제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신분제’다.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어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차등을 두고 신화와 종교 같은 허구의 이야기로 이러한 차별을 뒷받침한다. 교육 기관, 종교 기관, 문화 기관들은 집단적 세뇌 기제를 풍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대중에게 일상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주입한다. 이를 통해 인민 대중은 순종적이고 유순한 백성으로 길들여진다.
‘저들은 양반이고 귀족이니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우리는 평민이고 낮은 신분이니 저들의 고귀한 활동을 뒷받침하며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세뇌 기제가 당대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동했는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이 거대한 착취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지배 계급이 제정한 법과 제도에 근거해서 공권력을 동원해 합법적으로 탄압하고 말살했다.
신분제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그들만의 천국이 계속되리라 기대했겠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항해술의 발달로 인한 교역 확대와 식민지 개척,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기계제 대공업의 발흥 등으로 인해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발전을 주도한 자본가 계급이 거대한 부를 쌓게 되었고 그들의 경제력은 기존에 대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새롭게 등장한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을 옥죄는 신분제 사회 질서에 불만을 느꼈다. 기존의 사회 시스템은 귀족의 이익을 위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공장을 더 짓고 싶어도 토지는 봉건 귀족들이 대를 이어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노동자를 더 고용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농노 혹은 소작인의 형태로 묶여 있고, 봉건적 길드의 규제는 상공업 발전의 방해물이었다. 이런 사회 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해서 법과 제도를 고쳐야 했지만 당시 정치 참여는 신분 높은 귀족에게나 허락되었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존 사회 질서를 전복하고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귀족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기존 사회 질서를 지켜야 했다. 자본가와 귀족 사이의 필연적 갈등과 충돌이 유럽에서 혁명적 상황을 초래한다. 그 과정에서 신분제 철폐와 공화주의를 내세운 자본가 계급이 승리를 거머쥐었고 봉건 사회 질서는 해체되었다. 드디어 자본가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한 것이다. 사회의 시스템, 즉 법과 제도를 바꿀 권력 말이다.
자본가 계급은 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며, 사적 소유권을 강력하게 보호하는 등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주의 가치를 담은 법과 제도를 도입했다. 특히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적 소유권’이다. 귀족이 신분제를 통해서 토지(생산 수단)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누리며 부를 축적했다면, 자본가는 사적 소유권을 통해 기업(생산 수단)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누리며 부를 축적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귀족은 자신의 땅에서 일하는 농노 혹은 소작인에게서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준의 생산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조세 혹은 지대의 형태로 수취하는 방식으로 착취했다. 귀족들은 농노나 소작인이 열심히 일한 성과물의 상당 부분을 그 시대의 법과 제도에 근거하여 ‘합법적으로’ 갈취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자본가 계급의 방식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자기 소유의 기업에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일할 노동자를 고용한다. 노동자들은 해당 작업장으로 출퇴근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자본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임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대체로 임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중세의 농노나 소작인이 그러했듯 말이다.
기업은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를 판매하고 돈을 벌어들인다. 이 돈에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제반 비용을 제하고 남은 게 이윤이다. 이윤 일체는 회사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보유한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그 과정에서 자본가는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소유권’은 고대와 중세의 ‘신분제’가 하던 기능, 다시 말해 특권층에게 부를 합법적으로 몰아주는 기능을 현대 사회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신분제를 통해 귀족에게 부가 몰리듯 사적 소유권을 통해 자본가에게 부가 축적되니 말이다.
노동자는 일한 대가로 임금을 받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사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은 부자가 되고 노동자 계급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를 《자본론》에서 숫자로 풀어서 증명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월급은 한 달 일한 노동의 대가이고 시급은 내가 일한 노동 시간만큼의 대가라고 여긴다. 요컨대 자기가 일한 양만큼 돈으로 보상받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러한 생각이 잘못됐음을 논증한다. 노동자가 직장에서 받는 임금은 노동자가 수행한 노동량에 비해 필연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으며 그 차액이 자본가에게 이윤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수식으로 밝힌다.
예컨대 한 노동자가 하루에 8시간을 일하고 일당으로 6만 원을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하루 8시간 ‘노동의 대가’가 6만 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계산하면 1시간에 7,500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자는 원래 1시간에 7,500원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 예컨대 노동자가 1시간에 창출하는 가치가 2만 원이라면, 일당으로 받은 6만 원은 3시간에 해당할 뿐이다.
하루 8시간의 노동 중에서 3시간에 해당하는 부분만 임금으로 받았으니 추가로 일하는 5시간에서 창출되는 가치 10만 원이 자본가에게 이윤으로 돌아간다. 8시간 노동 중 3시간은 나 자신을 위해 일하지만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는 뜻이다. 어떤 회사에서 100명의 노동자가 이런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자. 자본가는 노동자 한 명당 하루에 5시간씩 총 500시간의 노동에 해당하는 가치를 이윤으로 벌어들인다. 이러한 착취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빈부 격차의 원인이라고 마르크스는 날카롭게 지적한다(구체적인 증명 과정은 다소 난해하다. 관심 있는 사람은 나의 책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참고하시라).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일한 만큼 받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고 했다. 노동력의 대가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 음식도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하고 의복과 거주 공간도 필요하다. 더불어 자식을 낳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존 노동자의 수명이 다해도 새로운 노동자가 끊임없이 수혈되어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요컨대 노동자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돈이 바로 임금이다. 애초에 일한 만큼 받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노동자가 죽지 않고 다음 날 나와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비용이다. 그것이 노동력의 대가, 즉 임금의 진정한 의미다. 노동력의 재생산비용!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받은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착각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받고, 자본가는 회사의 소유자로서 정당한 몫인 이윤을 가져간다고 여긴다. 농노나 소작인이 양반 혹은 귀족에게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면서도 신분제 질서를 내면화 및 내재화해서 당연하게 여기듯 말이다. 과거에는 종교나 신화가 착취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했다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의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하고 강제하는 경제학 이론 및 법과 제도들이 그 역할을 한다. 교육 기관과 미디어는 종교적 교리를 주입하듯 자본가 계급의 입맛에 맞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세뇌시킨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자본가가 이윤을 취득하는 명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나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의 대가’라고 말이다. 회사를 설립하는 데에 자본가 개인의 돈이 들어갔으니 이윤을 가져갈 권한 또한 있다는 얘기다. 대부분 이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노예제 사회의 논리에서는 노예를 부리는 게 당연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게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논리라는 지적 감옥의 바깥으로 탈주해야 한다.
이제 마르크스의 논리로 상황을 재해석해보자. 자본가는 자본을 댔으니 이윤을 전부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걸까? 예컨대 내가 A라는 회사를 소유한 자본가다. A를 운영하며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이 내 몫의 이윤이다. 운영이 잘되어 이윤 적립금이 순식간에 불어나고, 그 돈으로 회사 B를 새로 설립했다고 하자. 이제 B에서 발생하는 이윤 또한 전적으로 내 몫이다. 왜냐면 회사 A에서 번 ‘내 돈’으로 회사 B를 세웠으니까.
그런데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B를 설립하는 데 사용한 자금은 A에서 벌어들인 이윤인데 앞서 마르크스의 분석에 의하면 이윤은 노동자가 자신이 받은 임금보다 더 많이 일하고 그 부분을 자본가가 취득해서 발생한 것이다. 요컨대 회사 A에서 취득한 이윤은 순전히 자본가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발생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회사 B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 A의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투자했다는 자금의 형성 과정을 소급해 분석하면 이윤은 자본가 혼자 잘나서 번 돈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다만 그것이 사적 소유권이라는 현대판 신분제를 통해 자본가에게 ‘합법적으로’ 귀속됐을 뿐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부는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이룬 사회적 성과물이라는 얘기가 성립된다. 한 개인이 뛰어난 지식과 역량으로 놀라운 혁신을 낳는 사례도 있지 않냐고? 그 대단하다는 개인이 가진 지식 대부분은 과거 수많은 사람이 쌓아 올린 지식의 탑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내 머릿속 지식 중에서 과거 사람들의 열정, 노력과 헌신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요컨대 자본주의는 사회적 협업의 성과물을 소수 자본가에게 몰아주는 불평등한 시스템이며, 이 불평등의 명분과 구실로 사적 소유권이 기능하고 있다. 회사나 공장의 소유자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면 그는 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착취 면허를 취득하는 셈이다. 그러니 자본가 계급이 사적 소유권을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건 필연적이다. 그 옛적 귀족들이 신분제를 자신들의 생명선으로 여겼듯 말이다. 공동으로 일군 재산임에도 불구하고 사적 소유권만 있으면 마술처럼 자기만의 것이 되니까.
여담이지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는 돈 더 달라고 생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빼앗긴 것의 일부분이라도 되찾아오려는 행동이다. 물론 자본가의 회계 장부에서 임금은 비용으로 분류되고 자본가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가능한 한 임금 인상을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의 사정일 뿐 노동자에게 임금은 어떻게든 늘려야 할 생존 비용이다. 왜 노동자가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하나? 평민이 양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가 임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이유다.
자본가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법적 장치가 사적 소유권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공장이나 회사가 특정인의 소유임이 인정되면 그는 노동자가 지니지 못한 특권을 합법적으로 행사한다. 그러므로 사적 소유권은 현대 사회에서 사실상 신분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불편한 내색을 하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자본가가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고, 직원 월급 꼬박꼬박 챙기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고, 사업 실패의 위험 부담은 온전히 자본가의 몫이지 않냐고 말이다.
물론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옛날 옛적 왕과 귀족들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비가 오지 않아 농사짓기 어려워지면 이 모든 게 과인이 부덕한 탓이라며 성심성의껏 제사 지내고, 자연재해나 재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 구휼 사업을 벌였다. 권력 다툼과 당파 싸움에서 패배하면 심한 경우 일가친척이 몰살당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엄청난 위험 부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봉건적 신분 제도를 옹호할 이유가 되지 못함은 상식이다. 마찬가지다. 자본가만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착취 시스템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 활동 일체가 이윤 극대화라는 지상 목표에 종속된다는 데에 있다. 자본가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력과 생산 수단을 활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착취와 무분별한 환경 파괴가 자행되기 일쑤다.
자본가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기업에 이윤이 나야 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정말 이윤을 나지 않으면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이 불가능할까? 우리가 무인도에 표류했다고 치자. 거기에서도 안정된 거주를 확보하려면 집을 지어야 한다. 사람들이 무인도에서 힘을 모아 통나무집을 지을 때 굳이 이윤을 계산하지는 않는다. 그저 살기 좋게 지으면 그만이다. 먹고살아야 하니 농사도 지어야겠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추수할 때 이윤이 얼마나 나올지 계산할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필요한 만큼 식량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이렇듯 이윤이 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산 활동은 가능하다. 우리는 이윤 지상 시스템에 길들어져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있어야만 사회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선 시대처럼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만연한 실업 문제 또한 맹목적인 이윤 추구와 연관되어 있다. 자본가는 이윤이 기대될 때만 노동자를 고용한다. 만약 노동자 한 명을 고용하는데 매달 100만 원이 든다면 그 인건비를 지불하고도 추가로 돈을 벌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야 채용한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실업자가 되는 건 개인이 게으르고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단지 자본가의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가로서는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지 않는 게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겠지만 국가 공동체 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비효율이자 손실이다. 개별 자본가의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마어마한 인구가 무위도식하게 되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영역에서의 중요한 결정을 자본가의 이윤 추구욕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가 공장이나 회사 같은 생산 수단을 자본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에 대한 자본가의 독점적 소유를 근절하고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해서 공익에 기반해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사회에 존재하는 부의 대부분은 공동체 구성원이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고 협업해서 이룬 성과다. 따라서 생산 수단을 사회 구성원 공동의 소유로 전환하는 것은 자본가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의 성격에 맞는 자리로 회복하는 조치다.
사회주의 기업의 운영 목표는 이윤 추구가 아니다. 사회 구성원에게 필요한 재화 및 서비스를 제때 공급하는 것이다. (민간보험회사 말고) 국민건강보험공단 같은 공기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수많은 사람이 일하는 거대 기업이다. 하지만 공단의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다. 국민 누구나 차별 없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공공 보험을 제공해 국민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적자를 감수할 수도 있다. 수익이 공단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 말고) 국공립학교의 목표 역시 이윤 추구가 아니다. 국민 누구에게나 적절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학교에 가면 훈련된 교사가 학생을 성심껏 가르치며 점심식사로 급식이 제공된다. 아이들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을 얻으며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키워나간다. 이러한 서비스는 국민이 납부한 세금을 재원으로 공익을 위해 운영된다. 코로나 감염병 대응 방식 또한 철저하게 사회주의식이었다. 국민 누구나 무료로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공공 기관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방, 치료, 방역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보편적 공공 서비스를 통해 사회주의를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있다. 의료와 교육, 그리고 감염병 대응 같은 것조차 완전히 사기업에 맡겨진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를 떠올려보라. 당신은 과연 그러한 사회를 원하는가? 대다수 국민이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그러한 복지 시스템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의 사회주의 성격이 강화될수록 공공 서비스와 복지 시스템이 확대되며 공기업이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유통에서 더 많은 영역을 담당한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무상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 자연스럽게 공무원 일자리도 늘어난다.
물론 의료와 교육을 민영화해서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자본가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아파트를 분양해 어마어마한 초과 이득을 누리고 싶은 건설업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회주의를 악마화한다. 자신들만의 천국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서 말이다.
자본주의 기업은 소유권자인 자본가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사업 계획을 세우고 고용한 노동자에게 상명하달식으로 업무를 지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한 독재 시스템이다. 초등학교 반장도 투표로 뽑는 세상이지만 사장을 노동자의 투표로 뽑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만큼 자본주의 시스템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사회주의 기업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특정인이 전횡하며 내키는 대로 운영할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나 국공립학교가 운영되는 방식을 보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 혹은 지방의원이 해당 기관이 제출한 예산안과 운영 계획을 철저하게 검토해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사회의 민주적 분위기가 발전하고 성숙할수록 공기업의 내부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되며 공공서비스와 연관된 다양한 이해 당사자가 예산 및 운영 계획에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자본주의 기업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기업이야말로 상명하달식 군대와 가장 유사한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군주국의 백성들이 그저 왕이 어질고 현명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노동자는 그저 자본가가 양심적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현대 사회에서 가장 비민주적이며 전근대적인 영역이 바로 자본주의식으로 운영되는 기업이다.
** 제 책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올립니다. **
그러고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결국 좌파들은 '사적 소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거냐고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까 봐 추가로 글을 남깁니다. 제가 최근 작업하고 있는 책 원고의 일부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인 마르크스에 대해 가지는 오해와 편견이 있습니다. 소유권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 아니냐, 네 것도 내 것도 없다고 하면서 결국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약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일군 재산을 빼앗아 가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설마 마르크스가 개인이 가진 노트북 컴퓨터를 국가가 빼앗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마르크스는 소유 일반에 대해서 비판한 게 아닙니다. 자본가에게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을 쥐여주는 특수한 형태의 소유, 그러니까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를 비판한 것입니다.”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요?”
“자본가를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것은 아시죠?”
“그럼요.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 아닌가요?”
“대충 맞습니다. 그러면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란 무엇이냐? 지금 소유하신 노트북 컴퓨터는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것은 그냥 일반적인 소유입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그러니까 자본가들이 기업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목적은 노동자를 고용해 이윤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발생하지요.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하는 걸 비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이지요. 이것 때문에 극심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이 야기된다고 본 것이죠.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기업이나 공장을 자본가 개인의 소유에서 공동체 소유로 전환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는 독일 빨대남 마르크스처럼 버는 것
진짜 불쌍하다
불쌍한 프롤레따리아뜨 독붕이는 친구 빨때 꼽아 독붕이질 하면서 호의호식했던 맑스가 부럽다는고야..
하루죙일 글 쓰고 거지같이 살았는데 잘도 맑스처럼 살고싶겠다. 맑스 자녀 몇명씩 병사한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