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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장편소설을 모조리 읽고 남은 마지막 작품 <제7일>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위화 작품을 읽을 땐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지만 막상 감상문을 쓰려고 하면 쉽지 않다.



왜일까? 메모하거나 생각하며 읽기보단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데 급급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면서도 뭔가 작품 속에 뚜렷한 무언가가 드러나지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의미있는 것도 발견할 수 없는 거 아닌가하는 양가적인 감정도 들었다. (으레 독자는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분노를 작가의 무능으로 뒤집어 씌우기 마련인 듯하다)



그래서 내가 무너뜨린 위화라는 작가의 위상을 스스로 다시 세워야만 하는 과제가 있기에 그냥 건너뛸까 하는 마음을 접고 한 번 생각이란 걸 해보기로 했다.




<제7일>이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너무나 식상한 표현이지만 이만큼 잘 와닿는 표현이 없는 것 같다) 양페이는 난치병에 걸리자 짐이 되기 싫어 떠나버린 아버지 양진뱌오를 찾아 헤매다 화재로 인한 가스폭발사고로 죽고, 죽어서도 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양페이의 죽음은 그와 연관된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스스로 휘장을 달고 애도할 뿐인, 죽어서도 묻힐 묘지 한두평 조차 없는 비극적인 죽음이였고 그렇기에 죽어서도 안식에 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으로 간다.



죽은 이의 재생되는 기억 속에선 의도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탄생과 동시에 버려진 양페이와 그를 발견한 양진뱌오의 모습이 재현된다. 양진뱌오는 극진한 정성을 다해 양페이를 친자식처럼 기른다. 결혼이란 욕망을 위해 양페이를 한때 고아원 앞에 버리기도 하지만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결혼 대신 자기 자식 양페이를 택한 양진뱌오의 사랑과 뒤따르는 책임감에서 숭고함이 묻어 나온다.



양페이는 이런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한편, 중국 자본주의 사회에 희생당하거나 중국 정부의 공권력에 희생당해 이 땅에 오게 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자의 역할로서 임무(?)를 다하기도 한다.



왜 1인칭 주인공에게 자기 주도 사건 외에 남들의 이야기도 들어주는 청자의 역할을 겸하게 할까 생각해봤는데, 위화가 에세이에서 밝히길 가끔 신문이나 뉴스에서도 소설 소재를 얻는다고 하니, 쉽사리 믿기 힘든 이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들이 사실은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들이며,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 거주하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해골들과 죽은 자들이 그 희생양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위화의 제7일이란 소설 자체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인물들의 심경을 대변하고 그들에 대한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양페이는 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양페이 – 양진뱌오라는 감격스러운 부자의 이야기와 더불어 현대 중국의 희생양들(그것은 자본주의와 공권력의 미묘한 결합의 결과다)의 이야기가 얽힌 그 복합적인 구성이 <제7일>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과 함께 특히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이란 공간이 눈에 들어 온다. 이 공간의 의미는 저쪽 세계로 통칭되는 현실 세계의 의미와 대비되어 드러난다.



저쪽 세계는 항상 안개가 자욱하고(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안개인지 산업화를 위한 공장 가동에 의한 스모그인지 원인은 불분명하다)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듯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한다. 냉대와 무관심,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관심을 보이는 조건 있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세계다.



하지만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은 산과 들 그리고 강물이 흐르며 나무과 나뭇잎들로 가득한 자연의 세계이며, 서로에게 이익이 없어도 서로의 행복을 비는 진정한 관심, 서로를 위하는 마음, 조건 없는 관계로 형성된 세계이다. 그곳에서 그들 모두는 진정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서로를 위무하고 묘지에 묻힐 곳 없어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영원히 살아야만 하는, 구천을 떠도는 해골들의 장소지만 사실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위화의 다른 작품인 <인생>에서도 그랬듯이 <제7일>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으로 운명에 저항하거나 울분을 토하며 결국 세상을 뒤엎는 수괴들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불행한 운명에 대해 그저 수용하거나 체념할 뿐인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 단죄를 바라거나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창한 목표 따윈 없으며 심지어 분개하지도 않는다.



그저 각기 조그마한 마지막 소원을 바라며 서로를 보듬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어떤 적극적인 의미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그저 위안의 공간에 지나지 않을까? 작가는 인간은 결코 거대한 존재가 아니며, 그저 죽음 앞에 스러지고, 땅에 묻혀서 눈과 입에서 흙을 쏟아내는 해골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걸까?



이런 의혹에도 이 공간은 의미가 있다. 이 땅에 모이는 사람들은 가족들이 묘지 한 평 마련해줄 사람들 또는 돈이 없는 존재, 세계에서 제일 소외된 존재들로 사실 저쪽 세계에선 존재했는지 조차 희미한 존재들이었다.



저쪽세계에서 상실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죽은 자들의 땅에선 되살아난다. 이곳이야말로 서로의 행복과 위안을 진정으로 빌어주는 진정한 휴머니즘이 피어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되살아나는 공간이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을 배회하는 이들은 그들의 사망은 은폐되거나 또는 신문에서만 떠들썩하지 실제론 누구 하나 위안하지 않는 죽음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모두 신문 뉴스에 나온 그들 서로를 기억하거나 은폐된 죽음을 기억하면서 현실 세계의 후일담을 들려주며 위로한다.



즉, 그들은 서로를 기억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 기억되고 위로받는다. 과연 운명에 저항해 지하세계에서 부인을 데리고 탈출하는 오르페우스만 긍정적이면서 능동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능동적인 재생의 과정을 거쳐 그들도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서로에게 확인받는다.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결과적으로 짝퉁 아이폰 때문에 자살한 셈이 된 류메이는 남자친구 우차오의 신장 판매로 생긴 돈을 통해 없던 묘지가 생긴다. 방공호 지하에서 지지리 가난하게 하던 그녀가 드디어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되자 모두 류메이의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빌며 함께 그녀를 씻기고 배웅하는 장면에서 이 공간의 특성인 휴머니즘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류메이가 안장된 후에 남자친구 우차오가 헐레벌떡 뛰어 와서 뒤늦은 걸 알고 후회하며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저 공간은 도대체 무어냐고 묻자, 양페이는 자신있게 소개한다.



“저 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이 땅에선 소외된 자들의 존재가 되살아나고, 그들의 존재가 세계의 전부가 된다. 이런 모든 존재들을 되살리고 위로하는 게 이 공간의 의미이자, 그리고 <제7일>이란 작품의 의의가 아닐까?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 상 아쉬운 점도 분명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양페이다. 그렇기에 설령 서브 스토리가 있다 해도 결말은 양페이 부자의 이야기여야 가장 깔끔하고 여운이 남지 않을까?



어느 새 작품 중간에 양진뱌오와 양페이 부자의 이야기만큼 중요하게 부상된 류메이와 우차오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사랑얘기가 비중이 너무 커져버린 게 부자의 찝찝한 마지막 만남의 여운을 없애고 이야기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이란 공간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류메이의 안식을 부각하는 것은 백번 타당한 것 같지만(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부각되는 것도), 양 부자의 재회 이후 우차오가 등장하고, 양페이에게 얘기하는 류메이의 미담은 사실 없어도 되는 부분이 아닐까? 굳이 작가가 상호적 희생을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의 완전성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설령 그걸 표현하려했다한들 끝을 이렇게 맺어야만 했을까? 오히려 다소 산만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위화는 <제7일>에서 사용한 이 이야기 구조를 <원청>에서는 성공적으로 다루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청>에서는 린샹푸의 한때 아내였던 샤오메이의 후일담이 미친 듯이 궁금했는데 일언반구도 없어 아쉬웠지만, 린샹푸에 대한 이야기 장이 끝나자 샤오메이에 관한 이야기에 또 한 편의 장을 할애함으로써 궁금증을 완벽하게 풀어줌과 동시에 이런 산만함을 해결한다.



감상을 적는 도중 정신 산만하게도 다른 사람의 메일을 받았다. 자기 볼 일과 함께 평안한 저녁이 되라는 형식적인 인사가 더해진 메일이었다. 그도 혹시 <제7일>을 읽어봤을까? 아마 아니겠지. 그가 말하는 평안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도 평안할까? 하지만 나는 <제7일>을 읽고 평안했다.



문득 책을 읽느라 흐려진 시야 속에서 스멀스멀 위화 싸인회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름철 땀에 절어 있는 장아찌가 되어 흐린 눈을 하고 있는 작가 위화가. 그리고 그에게 사인받기 위해 기다리느라 같이 땀에 절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사인을 위해 긴 지네처럼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손엔 각기 각색의 뽀송뽀송한 위화의 새 책이 들려있었다.



<인생>, <허삼관매혈기>에 싸인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중국 대학생들의 손엔 전부 <제7일>이 들려있었다. 아아, 국내에서 위화 작품 중 최하위의 인기를 구사하는 <제7일>이란 작품에 사인을 받다니 중국 사람들의 문학력은 형편없구나란 거만한 생각을 잠시 가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읽어보니 알게 되었다. 중국의 독자들도 제법이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