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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에서 '인생의 2막' 같은 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보통은 고난 끝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밝은 미래를 개척한 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다만 그런 사람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 사람들이 원해서 2막을 연 경우는 그다지 없다는 것을. 갑작스러운 풍파를 맞았거나,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졌을 때, 인생의 1막은 내리고 2막이 필요해진다. 재수 없는 사람들은 1막이 닫혀도 2막을 시작하지 못해 어영부영 삶을 마치기도 한다. 「대성당」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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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이라는 단어는 좋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새로움 안에는 '낯섦'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새로움을 막연히 좋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대성당」에서 자주 나오는 모티프는 '아이'이다. 부모, 혹은 주인공 개인은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의 존재가 이것을 막는다. 아이가 있는 한 부모는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없고, 돈을 자신을 위해서만 쓸 수 없다. 사랑의 결실은 삶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데, 그 인생의 2막이라는 것이 상상과는 다르게 부자유하다면 어떨까? 분명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뒤엎을 방법은 없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운명의 신이 있다면, 아이는 신이 박은 쐐기일 테니까. 이렇듯 인생에 있어 새로운 국면이 나타나는 것은 곧 자유를 망칠 새로운 고난이 나타날 징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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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유로운 삶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사이에 사는 한 우리는 생계라는 가장 기본적인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사랑, 윤리 같은 것들이 설상가상으로 얹히면 사람은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다. 삶에는 목적이 없으므로 나를 위해 움직이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내 기대에 맞게 변하는 무언가를 한없이 그릴 뿐이다. 그 그림이 실현되는 일은 딱히 없다. "요컨대, 그 우물 바닥에 있는 그에게 삶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 작은 푸른색 원을 가리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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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뒤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굴레」에서 홀리츠가 미처 버리지 못하던, 그러다 결국 두고 간 굴레. 굴레는 본디 말(馬)을 위한 도구이다. 하지만 말로 대박을 치는 꿈에 얽매였기에 홀리츠 자신에게 굴레가 씐 셈이었다. 그리고 홀리츠처럼 굴레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은 운명이라는 굴레에 씌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재갈이 당겨지는 것을 느끼는 것뿐이다. "재갈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 때가 바로 그때라는걸.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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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운명에 의해 지금의 안정된 곳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면, 우리는 재갈을 물고 매달리기보다는 차라리 몸이 끌리는 방향 그대로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운명에 순응하자는 말은 부정적으로 해석되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항하건 말건 운명이 제 갈 길로 나를 이끈다면, 운명에 반항하는 것은 멋진 바보짓이다. 극복할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것이 옳다. "하워드, 없어. 스코티는 이제 없고, 우리는 앞으로 그런 삶에 익숙해져야만 해. 혼자 남는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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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떤 시련에도 익숙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다. 사실 익숙해지는 데 성공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익숙한 체 할 뿐 자신도 매우 힘들어하고 있으니까. 다만 마음을 비우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모범답안이기는 할 것이다. 마이어스가 여행의 끝에 자신은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끝내 인정했듯이. 또는 삶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 아니더라도 삶을 메우고 있는 자잘한 그루터기에 기대는 것도 방법일지도 모른다. 힘들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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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의 마지막 이야기인 「대성당」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장면이 나왔다. 맹인에게 대성당을 설명할 길이 없자, 맹인이 주인공의 손에 자기 손을 얹은 채로 대성당을 그리게 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시각에 익숙하지만 맹인은 시각을 잃었다. 다만 그에게도 시각이 있다. 그가 다른 감각으로 물질을 그릴 수 있다면, 그 감각이 곧 시각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난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이런 감각의 전향은 주인공도 독자도 매료시킨다. 마치 인생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낯선 국면을 만난 다음 그것을 낯선 방법으로 극복하는 느낌이랄까.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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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환은 사건의 전환으로 시작해서 감각의 전환으로 끝난다.' 「대성당」의 맹인이 주는 교훈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대로 사건이 흘러가지는 않는다.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이런 인간의 조건을 부조리라 느껴서 싸워도 좋고, 수용해도 좋다. 분명한 것은 이 안에서 우리가 끝내 사용하기로 한 감각이 우리 삶의 1막을 완전히 닫고 2막을 연다는 것이다. 삶은, 어찌 됐든,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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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속의 이야기들은 달콤한 맛이 거의 없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퍽퍽하기만 하다면 살맛이 안 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현실에 모습을 자주 비춘다. 그러니까 그것들에 매번 싸우려 들지 말고, 차라리 고개를 돌리려 해보자. 지금까지 유심히 지켜보던 것들이 사라지면 차라리 다른 것들을 보려 노력해 보자. 그동안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 마치 귀지를 뚫고 맑은 소리가 들리듯, 좋은 감각으로 삶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지혜가 아니라 사건에 슬기롭게 쓸려가는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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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것뿐이지. 조만간 다른 시기가 찾아올 거야. 이런 시기도 있고 다른 시기도 있는 것이니까. 결국에는, 그러니까 모든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