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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은 나에게 죽음을 연상시킨다.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 그리고 그 경험을 가감 없이 소설에 녹였던 사람, 결국 끈기 어린 시도로 자살에 성공한 사람이라 그런 것일 테다. 아직도 「인간 실격」을 처음 읽은 날이 떠오른다. 그토록 음울한 글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인간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쓰고 싶던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생명을 버리려고 하면서도 삶의 의지를 아예 놓지는 않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한다. 부끄러운 삶을 버리고 싶지만 그런 삶이나마 이어나가려는 의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쓰지 마. 아무것도 읽지 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오직, 살아만 있어!" 그리고 이 의지가 「만년」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고백했던 작품이니, 어쩌면 이 「만년」이야말로 진정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만년」도 썩 긍정적인 작품은 아니다. 삶에 대한 혐오가 계속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만년」의 음울은 명백하게 다자이 오사무의 것이다. 그의 과거를 진솔하게 그린 「추억」이나, 그의 동반 자살 실패 경험이 바탕이 된 「어릿광대의 꽃」을 보면, 다자이 오사무는 확실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지고 있는 꽃잎이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 그는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소심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고독을 잘 참는 사람이 아니지만 친부모와는 거리가 멀었던 듯 보인다. 진심을 터놓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이지만 진심을 털어놓기에는 강압적인 환경에서 살았던 듯 보인다. 다자이 오사무만큼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도 충분히 괴로울만한 조건인데, 거기에 본인의 소심한 태도가 더해져 부끄러운 짓들을 쌓아갔으니,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염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만년」에 많이 나오는 모티프가 있다. 소설을 쓰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즉 자기가 소설을 쓰는 모습, 아니면 누군가가 소설을 쓰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아예 「어릿광대의 꽃」은 자신이 오바 요조라는 인물을 직접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승화시키기 위해 쓰는 글조차도 부끄러워한다. "난 숙명을 믿어. 바둥거리지 않아. 사실 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못 견디게 그리고 싶어. ……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원숭이 얼굴을 한 젊은이」는 아예 자신의 창작에 대한 자조로 보인다. 「원숭이 얼굴을 한 젊은이」는 소설을 통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지어내며 헛된 희망으로 자위하는 사람을 그리는 소설이다. 이렇듯 다자이 오사무가 「만년」에서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은, 그 조건부터가 암울한데 자신의 성격과 맞물려 더 암울해질 운명에 놓인 모습들이다. "범부에게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하고 꿈이라 덧씌운 채 바라보며 지내 왔을 뿐 아닌가." 다자이 오사무는 삶의 본질이 무한한 몰락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그것으로 「만년」을 끝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출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절망하는 모습 못지않게 많이 보여준다. 「어복기」에서 결국 스와는 고독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모색할 기회를 얻는다. 「로마네스크」의 세 주인공들은 결국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 「원숭이 섬」은 결국 일본원숭이들이 동물원을 탈출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유혹은 진실을 닮았다. 어쩌면 진실인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속에서 크게 비틀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하지만 피는, 산에서 자란 나의 멍청한 피는, 여전히 집요하게 외친다. 싫어!" 물론 이들이 맞을 미래가 썩 밝게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삶을 내려놓지 않고 새로운 국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뜻깊게 느껴진다.
「만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부정하고 싶은 과거들을 나열하면서도 그것들이 결국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소설을 쓰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마음에 들지 않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창작은, 「추억」에서 드러나듯이, 그가 나름대로 찾은 배출구이다. 그의 글이 과거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결국 그 자신을 대상으로 삼은 글이기 때문에 가치는 있다. 그리고 그의 과거가 그의 글만큼 어둡다 하더라도, 그의 것이 맞는 한 그에게는 가치가 있다. "자신을 현실주의자라 일컫는 사람은 말할지도 모른다. 이 나흘간은 풍자로 가득 차 있다고. 그렇다면 대답하지. 내 원고가 편집자의 책상 위에서 아마 질주전자 받침으로 쓰인 듯, 까맣게 탄 커다란 자국이 난 채 반송된 것도 풍자. 내 아내의 어두운 과거를 나무라며 일희일비한 것도 풍자. 전당포 포렴 밑을 지나면서도 옷깃을 여미고, 자신의 몰락을 숨기려 차림새를 가다듬은 것도 풍자. 우리들 자신, 풍자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현실에 찌부러진 남자가 힘겹게 내보이는 인내의 태도. 네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난 너와 영원히 타인이다. 어차피 풍자라면 좋은 풍자. 진정한 생활. 아아, 그건 먼 일이다. 난, 적어도 사람의 정이 넘치는 이 나흘간을 천천히, 천천히 그리워하련다."
「만년」은 자신을 무한히 비하하는 사회적 자살이 아니다. 삶의 본질과 의미를 파헤치는 거창한 시도도 아니다. 「만년」은 크게 휘청이며 몸통을 간신히 지탱하는 자신의 다리가, 비록 부끄러워서 밉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런 다리나마 내 하체에 달려있는 한, 나는 나의 두 다리로 설 수 있다. 떳떳하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설 수 있다. 살아갈 의미를 못 찾더라도,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살아갈 가치는 있다. 이것이 「만년」을 통해 다자이 오사무가 하고 싶던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우울증이 있다. 내성적인 기질 때문에 마음의 고민을 눈덩이처럼 부풀리다가 결국 재작년에 군대에서 터져버렸다. 누구의 말처럼 냉수마찰과 기계체조로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세상도 싫었지만 그런 하찮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더욱 싫었다. 결점만 무수히 늘어날 운명을 직감하고 생을 미리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나를 붙들어주는 주변 사람들 덕에 지금은 그런대로 이겨낸 편이다. 지금도 나 자신을 변변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내 미래는 썩 밝지 않고, 자신이 그렇게 가능성 있는 인물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꾸역꾸역 살다 보니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래도 내 삶은 나만의 이야기니까, 유일한 이야기니까, 내가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도 무언가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만년」은 뜻깊게 다가온다. 나나 다자이 오사무나 삶을 뒤집을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한 나의 삶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만년」을 통해 배웠다. 삶은 앞으로도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이라도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내 이야기가 적힌 책을 두껍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살고 싶다.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 「만년」의 첫 문장이다. 미래를 그릴 수 있다면, 그 미래까지 가는 기다림이 삶을 지속할 이유가 되어 줄 것이다. 언젠가는 부끄러운 과거도 추억이 되고, 머나먼 달콤한 바람도 코앞까지 오는, 그런 날이 와주지 않을까? 오지 않더라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기 위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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