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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백야」를 읽었다. 읽으면서 「키스」가 생각났다. 둘은 정말로 비슷한 작품이다. 내용도 주제도, 마치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보고 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래서 두 작품을 함께 감상해 보려 한다.


「백야」는 한 몽상가의 좌절을 그린다. 몽상가는 몽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다.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이며, 현실 감각이 있더래도 현실을 어떻게 할 능력은 전무한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몽상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몽상은 초라한 자신을 그나마 기쁘게 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새로운 꿈은 곧 새로운 행복이지요! 정교하고 관능적인 새로운 독약을 들이켜는 일이랄까요! 아, 우리의 몽상가에게 현실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그에게 몽상이 실현될 기회가 온다. 실연당한 것으로 보이던 나스텐카를 돕다가 둘 사이의 정이 깊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벽을 넘으려던 순간에 나스텐카의 사랑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몽상가는 다시 현실에 의해 쫓겨난다.


「키스」도 좌절을 그린다. 랴보비치는 특색 없이 초라한 남자다. 그는 어느 날 잘못 들어간 방에서 잘못 향한 키스를 받는다. 랴보비치는 그 키스가 원래 자신이 받을 키스가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굉장히 기뻐한다. 처음 하는 경험이자, 동시에 늘 갈망하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공상하는, 지금 나에게 불가능하고 도무지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본질에 있어서는 아주 평범한 것에 불과하다.' 그 역시 보통 사람이고 자신의 인생도 평범하다는 생각에 그는 기뻤고 힘이 솟았다. 그는 어느덧 여인의 모습이며 자신의 행복을 과감하게 그려보고 거칠 것 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그 경험으로 랴보비치는 상상의 날개를 달고 온갖 달콤한 앞날을 그린다. 그러나 랴보비치는 키스를 받은 공간에 다시 방문해서 깨닫고 만다. 그 경험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재현될 일도 없고 진전될 일도 없다는 것을. 랴보비치는 실의에 빠진다. 그가 느끼던 나무의 향기도 바람도 이때를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소멸하고 만다.


둘은 분명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달콤한 현실은 자격이 있는 자만 누릴 수 있다. 가혹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특히 나를 위해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세상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다. "이 모든 세상이, 모든 삶이 랴보비치에게는 이해할 수 없고 목적도 없는 장난처럼 여겨졌다."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그래서 몽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물론 몽상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며 삶을 좀먹다가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몰라서 몽상에 빠진 사람도 별로 없다. 아무튼 몽상 안에서는 행복하다. 그것이 몽상에 빠질 이유의 전부이다.


이 소설들을 읽고 다짐한 바가 있다. 나는 칙칙한 인생에 몽상을 양념처럼 곁들이는 것을 결코 비웃지 않기로 했다. 몽상가와 랴보비치의 몽상이 독자인 나마저도 환희와 기대에 차게 만들었다. 몽상가와 랴보비치의 절망이 독자인 나마저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한계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인생은 살 게 못 된다. 물론 몽상가로 사느라 현실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취하지 않을 정도의 음주가 사회생활과 건강에 이롭듯이, 취하지 않을 정도로 몽상하는 일은 사실 누구에게나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짜 세상에서 가짜 행복을 누린대도, 결국 행복은 행복이니까. 몽상가들은 그만 브레이크가 고장 났을 뿐이다.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이지 비웃을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나도 어떤 분야에 대해 몽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모습을 두 소설에서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몽상가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그만 두자.


「백야」의 몽상가는 잠깐 몽상을 현실로 만들 뻔하며 느낀 황홀함에 겸허히 감사를 표하고 떠난다. 랴보비치는 세상사가 헛된 장난임을 깨닫고 운명에 반항하는 의미에서 새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아마 몽상가는 새로운 몽상에 잠겨서 삶을 소진할 테고, 랴보비치는 몽상에 취하는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몽상가는 새로운 꿈속에서 행복할 테고, 랴보비치는 어떤 반전도 없는 삶에서 갈증을 계속 느낄 테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현명한지는 모르겠다. 이성은 랴보비치가 현명하다고 말하고, 감성은 몽상가의 편을 들고 있으니 말이다. 나스텐카의 말처럼, 몽상과 현실 두 존재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는 것, 현실과 몽상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이자 인류 평생의 숙원인 듯하다. 세상사가 장난이라면, 이왕 나한테도 재미있는 장난이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