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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캐치-22」의 첫 장을 펴고, 난 "첫눈에 반해 버렸다." 문장들 하나하나가 재치 있었고, 문장이 묘사하는 상황 하나하나가 우스꽝스러웠다. 서술 방식이 복잡해서 지치지 않고 읽을 수는 없었지만, 작품이 주는 재미 덕분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전쟁에 관한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자아내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보들이 점차 공개되고 주인공 요사리안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도 점점 웃음을 잃었다. 다행히 결말에서 희망이 보인 덕분에 나는 다시 옅은 웃음을 지으며 책을 놓을 수 있었다. 이 복잡한 전개와 그에 대한 감상을 어떻게 글로 늘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부족한 솜씨로 생각을 기록해두는 것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유익하리라는 믿음으로 이 글을 써 본다.


제목이자 이 소설의 중심 소재인 '캐치-22'는 규칙이다. 정확히 말하면 실재하지 않는 규칙이기 때문에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실제 조항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파악한 캐치-22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자신이 미쳤다고 주장하며 전장에서 이탈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으므로 미치지 않았다. 사람은 미치지 않은 한 위에서 내린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명령 복종의 근거로 캐치-22를 미란다 원칙처럼 읊어줄 필요는 없다.' 딱 봐도 전장에서 이탈하려는 사람을 막기 위해 만든 모순투성이 규칙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만능이다. 위에서 이를 들먹이며 아랫사람을 미치지 않은 사람으로 규정하면, 결국에는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규칙이다. 더 무서운 것은 캐치-22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윗사람들의 지배에 익숙해져서 캐치-22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캐치-22가 존재하지 않음을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었으며, 비웃거나 반박하거나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공격하거나 개정하거나 증오하거나 헐뜯거나 침을 뱉거나 갈기갈기 찢어 버리거나 짓밟거나 태워 버릴 대상이나 텍스트가 없기 때문에 훨씬 더 난처했다."


아무튼 캐치-22의 구속으로 요사리안은 전장에 머무른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장은 수많은 목숨들이 허무하게 희생되는 곳이다. 작중에서 반복돼서 나오는 스노든의 죽음은 정말 보는 사람이 안타까웠다. 스노든은 내장이 몸에서 빠져나간 채로 혈액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난 추워요."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죽었다.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라도 요사리안처럼 이런 일이 목전에서 벌어지면 요사리안처럼 떠나고 싶어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 잔혹한 참상보다 잔혹한 것은, 이런 죽음들이 그다지 명예롭지 않다는 점이다. 요사리안이 겪는 상황들에는 모두 뒷배가 있다. 캐스카트 대령의 진급 욕심, 마일로의 자본주의 논리, 블랙 대위의 시기심 같은 전혀 명예롭지 않은 것들이 사람들의 명예로운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급과 명예를 위해 쓸데없는 의전을 만들고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으려고 종교 행사를 계획하는 장군들을 위해 누가 맨정신으로 희생하고 싶을까?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요사리안의 절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대령이 장군이 되고 싶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똥구멍에 총알을 맞아야 해? 내가 왜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내 문제가 아니라 캐스카트 대령의 일이라는 말이 자네 진심에서 나온 소리야? 눈을 똑바로 떠, 클레빈저. 죽은 사람에게는 누가 전쟁에 이기느냐 하는 건 쥐뿔만 한 의미도 없어." 하지만 요사리안만큼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희생이 그래도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것이다. "폭탄이 떨어지는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위해 아이들이 목숨을 저버렸고, 어느 누구도, 특히 자신들의 젊은 생명을 바치는 아이들은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싶었다." 이 점이 정말 비극적이다. "자넨 차원 높은 조화를 올려다봐야지." "내가 아무리 올려다봤자 죽어 가는 사람들만 보이죠. 천당이나 천사는 보이지 않아요. 모든 훌륭한 충동적인 행위와 모든 인간적 비극이 이루어질 때마다 뒷전에서 속셈을 차리는 사람들이 보여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제쳐놓고 국가 하나만 보자. 어쨌든 사람들의 음모를 따르다 보면 나라에 이익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캐치-22」는 국가에 대한 헌신마저 허무하다는 도발적인 입장을 보인다. 네이틀리와 한 노인의 대화는 마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과 사탄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는 듯 치열한데, 노인은 국가의 허무함을 잔인하게 조롱한다. "로마도 멸망했고, 그리스도 멸망했고, 페르시아도 멸망했고, 스페인도 멸망했어. 모든 위대한 국가들이 멸망했지. 자네 나라라고 다를 것이 있나? 자네 나라가 얼마나 더 존속되리라고 믿고 있지? 영원히? 이 지구 자체도 2500만 년쯤 되면 태양에 의해서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렇다 해도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더 존속할 수 있지 않을까? 노인은 이 질문에 이렇게 응수한다. "난 무솔리니가 정상에 있었을 때는 파시스트였는데, 그가 몰락한 지금은 반파시스트가 되었어. 미국인들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려고 독일인들이 이곳에 와 있을 때는 난 광신적으로 친독일파였고, 독일인들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려고 미국인들이 이곳에 와 있는 지금은 광신적으로 친미파야." 국가의 존속이야 어떻건 간에 개인의 존속은 상황이 좌우한다. 충성은 허울은 좋지만 목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살려면 상황에서 충성을 고집하는 태도가 아니라 상황에 굽히는 재주가 오히려 필요하다. 물론 이런 입장은 도덕적으로 굉장히 불쾌하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도덕을 지키는 행위가 과연 도덕적인가? "살기 위해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겠죠." "그리고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할 가치도 있지."


자신을 국가의 부품으로 생각하는 일이 과연 타당할까? 사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르지만 국가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그렇게 취급하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캐치-22」를 읽으며 내 군 시절이 많이 생각났다. 그때 받은 훈련들도 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함이라고 포장돼있지만 결국 장비를 다루는 살아있는 부품들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때 받은 통제들도 우리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어서 '우리는 통제를 했는데 잘 안 따랐다.'라고 말할 구실을 만들던 것이 아닌가. 채수근 해병이 불과 작년에 죽지 않았던가. 그것도 사단장의 복장 점검이 예정돼있어서 맨몸 수색으로 복장을 통일했다가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캐치-22」에서 캐스카트 대령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을 사진을 찾는 것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말 똑같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중동은 아직까지도 한창 전쟁 중이다. 서로 병사 개인이 싫어서 총을 겨누는 전쟁이 어디 있을까? 국가 사이의, 혹은 군대 내부의 알력 다툼 때문에 그들은 장기짝처럼 움직이고 목숨을 잃을 뿐이다. 발아래에 밟히는 개미를 생각하며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은 없다. 높은 사람의 의지가 아랫사람을 의지와 무관하게 휘두르는 것이 당연한 모습인데, 따지고 보면 전혀 당연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병영 부조리와 비교가 안되는 운명의 부조리를 사람들은 자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각을 한차례 더 넓혀 보자. 과연 「캐치-22」에서 제시하는 문제가 전쟁만의 문제일까? 사실 우리가 사는 일상도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여당과 야당의 싸움이 건전하지 못하면 국민들이 피를 본다. 기업들의 전략에 개미들이 쓸려나간다. 「캐치-22」에서 마일로가 계약 이행을 위해 아군을 폭격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는데, 따지고 보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단지 폭격까지는 안 할 뿐이다. 이런 굴레에서는 도무지 빠져나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과 신앙으로 극복하는 것도 허울 좋은 얘기다.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신화는 깨진지 오래다. 「캐치-22」에서 가장 크게 절망하는 사람이 군목이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불행한 일이 많다고 그는 생각했으며 남들의 불행은 고사하고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도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는 비극적인 생각에 음울하게 머리를 떨어뜨렸다." 클레빈저와 요사리안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긴 인생이란, 길게 느껴지려면 많은 불쾌한 상황들로 가득 차야 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런 인생을 누가 원하겠어?" "그것 말고 뭐가 또 있기나 해?"


인생이 이런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단 요사리안과 비교를 하기 위해 내가 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 본다. 나는 요사리안보다 조건이 훨씬 좋았다. 북한이 도발을 계속 해대서 순탄한 시절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전쟁이 정말로 일어나지는 않았고 1년 6개월이라는 제한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대다수가 대대장의 과분한 야망 때문에 계획된 헛일임을 알았지만 아무튼 대대장의 목적이 아예 국가에 해로운 일은 아닐 테니 1년 6개월 동안 맘에 안 드는 선행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나의 태도는 「캐치-22」 종장에서 댄비 소령이 보인 태도와 비슷했다. 형태가 너무 맘에 안 들고, 헛됨을 내심 감지하고 있지만, 아무튼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버텼다.


요사리안은 실제로 전쟁 중이었고, 캐스카트 대령의 더러운 욕심 때문에 출격 횟수 제한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임무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고 그는 많은 동료들을 눈앞에서 잃었다. 그래서 요사리안은 도피를 선택했다. 도피라고 말하면 어감이 안 좋게 보인다. 그가 전장에서 해야 할 소임을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빚을 떠넘긴다는 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사리안의 생각은 다르다. "요사리안의 때 아닌 서거를 역사는 요구하지 않았고, 그가 죽지 않아도 정의는 실현되었고, 발전은 이룩되었고, 승리는 달성되었다. 사람들이 죽으리라는 것은 필연성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죽느냐 하는 것은 상황이 결정했는데, 요사리안은 상황의 제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요사리안에게 전쟁은 애당초부터 자신이 모두 책임져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은 요사리안의 계획에 의해 벌어진 사건도 아니며 귀결까지 그런대로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요사리안이 다 짜인 연극에서 굳이 죽을지도 모르는 배역을 맡아야 할까? 요사리안은 「캐치-22」의 주인공이자, 그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다. 전쟁의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요사리안은 물론 군대 안에서 책임을 갖지만, 그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이제 난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좀 해야 되겠습니다. 난 내 책임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죠. 나는 책임을 향해서 달리는 거예요. 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망친다는 건 부정적일 것이 하나도 없어요." 무엇보다, 요사리안은 할 만큼 했다. 그는 병원에서 몇 번의 출격을 빼먹었지만 캐스카트 대령이 제시한 출격 횟수들을 꼬박꼬박 채워나갔으니 말이다.


내가 취했던 태도와 요사리안의 태도를 보니 요사리안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겠다. 요사리안은 내가 실존할 수 없는 한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준다.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혹은 나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해도 좋다는 믿음이 있다면, 나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내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도록 국가권력과 경제논리가 강제한다면, 나는 요사리안처럼 용기를 내보고 싶다. 물론 내가 그간 책임져왔던 것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다. 계속 캐치-22의 존재를 믿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다 해서 하루아침에 행동을 180도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리 나를 구속하는 현실의 캐치-22를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야겠다. 내가 진정 책임져야 할 것,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데 세상이 나에게 떠넘긴 것을 구분해야겠다. 그리고 후자가 너무 무거워져서 나를 망치는 것 같다면 나는 과감히 전자를 향해 뛰어야겠다. 나는 내게 진정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므로 미치지 않았다. 다만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캐치-22에 복종하지 않는다. 캐치-22에 모순되는 행동이므로 나는 캐치-22의 관점에서 미쳤다. 그러므로 나는 요사리안처럼 자유롭다.


자신이 원치 않은 짐을 진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아니, 개인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이 정녕 있을까? 재벌도 엄청난 책임을 타고나 행복하지만은 않은 세상이다. 나는 이런 구속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개인이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를 무시하고 내가 보기에 헛되다는 이유로 남을 비판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그 짐의 무게에 질식되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문득 밀려오는 중압감에 단번에 무너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런 사람들은 짐을 벗어던지기에 이미 늦어버려서, 캐치-22에 걸려든 채로 출격을 계속해서, 결국 명을 재촉하게 된 것과 다름없다. 삶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간 걸어온 길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그 길을 걸어온 자신에게 그 의미를 옮겨주자. "그가 맞는 모든 나날은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위험한 출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십팔 년 동안 그것들을 이겨 왔다." 요사리안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우리도 요사리안처럼 매일매일을 자신을 위해 살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