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 성운은 남명 조식과 교류도 하였고, 남명 조식 사후엔 <묘갈명병서>을 써 주기도 한 점에서 밀접한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같은 시기에 유일로 천거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생전에는 퇴계 이황이 대곡 성운 . 남명 조식을 싸잡아 비판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곡 성운과 남명 조식 간에 어떠한 접점이 있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성운의 경우
<「대곡성선생(성운)행장(송준길 : 『동춘당집』)」>에 보면, 하기 두 기록이 주목된다.
1. “극기(克己)의 단계가 실로 학문을 하는 첫 번째 공부이다. 이른바 ‘기(己)’는 내 마음이 좋아하는 바로 천리(天理)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말하니, 모름지기 일상 사이에 자세히 점검하고 살펴서 잠시라도 사욕(私欲)임을 깨달으면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이 사의(私意)를 잘라내고 마음자리를 깨끗이 씻어 사욕의 싹을 남겨 두지 않으면 자연히 천리가 밝게 드러나서 인욕이 천리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이 말은 송시열이 지은 大谷成先生墓碣銘 幷序에는 “공부하는 자는 우선 뜻을 세워야 한다. 만약 그 뜻을 항상 들추어 세우고 일깨우지 않는다면 아무리 바탕이 아름다워도 절대로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뜻이 확고히 선 뒤에 자신의 마음을 세밀히 살펴 혹시라도 사(私)가 끼었음을 느낄 때는 하나의 싹도 남김없이 몰아내고 나면 천리(天理)가 자연 밝게 나타나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역시 경건한 마음가짐이 모자라기 때문인데, 만약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외사(外邪)가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2. “학문을 하는 차례는 책에 실려 있고,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은 송유(宋儒)의 해석에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니, 후학들은 성법(成法)을 독실히 지키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논리를 세워 글을 짓는 자가 더러 있으니, 이 어찌 첩상가옥(疊床架屋 - 옥상옥)이 아닌가.”』
조식의 경우
1.시냇물에 목욕함[浴川(욕천)
온몸에 사십 년간 쌓여온 때를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깊고 맑은 시냇물에 모조리 씻네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혹시 때가 내장에서 생긴다면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씻어버리리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 이종문 교수 번역
상기 시는 남명 조식이 49세 거창 감악산에 친구들과 유하러 가서 읊은 시로, 그를 대표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사욕 제거 방법이 시 형태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성운이 찬한 묘갈명에도 "학문은 과욕(寡慾)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여겨 극기(克己)에 힘을 다하여 마음속 사욕(邪慾)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어 천리(天理)를 함양하였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도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은미하고 혼자만 아는 곳에서도 반성하며 살폈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사욕의 척결 문제를 중히 여겼음을 의미한다. 그는 <戊辰封事>에서 "則必以敬爲主。所謂敬者。整齊嚴肅。惺惺不昧。主一心而應萬事。所以直內而方外"라고 했듯이 엄히 다스려야 할 사욕 척결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글에 "孔子所謂修己以敬者。是也。故非主敬。無以存此心。非存心。無以窮 天下之理。非窮理。無以制事物之變。不過造端乎夫婦。以及於家國天下。只在明善惡之分。歸之於身誠而已。由下學人事。上達天理。又其進學之序也。捨人事而談天理。乃口上之理也" 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경을 위주로 하데, 인사를 버리고 천리를 말하는 하는 것은 口上의 理 즉 입 바른 소리라는 것이다. 또한 주경공부 결여를 학위(學僞)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인 도희령이 이 시에 차운을 하였고, 이 이후에 후인이 차운하여 다수 읊었다.
2.
성운과 조식의 사욕 제거 방법이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졍주이후 저술이 필요치 않다라는 견해는 명나라 학자 설선(薛瑄)의 견해로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운과 조식은 추구하는 학문 성향이 흡사함을 볼 수 있다. 상기 이러한 면에서 설선의 再版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많은 저술과 사칠논변등등을 비롯한 강석 논변한 이황과는 서로 대립된다. 즉 이황의 경우는 주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인 반면, 조식의 경우는 설선의 견해를 받아들여 송대에 정주학이 완전한 완성되었다고 본 점에서 서로 간에 충돌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표면화된 것이 1564년 서로 간에 서찰인 것이다. 즉 조식이 이황에 대해 상달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한 이유도 이러한 측면에 있었던 것이다. 이황도 설선의 견해를 인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별 대응을 못하고 기대승과의 사칠논쟁을 중지했던 것일 것이다.
설선의 견해가 1568년에 유입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었으나, 그러나 이 서찰이 조식과 이황 간에 왕복된 시기가 1564년이고, 또 『퇴계선생문집』에 보면, 답이강이(정)」라는 서찰에 보면, "설공(설선) 『독서록』"에 대한 평과 홍인우를 통해 간행본이 귀부(貴府)에 있다는 것을 들었다며 빌려 달라는 내용이 실렸는데,2) 이 서찰이 「與李剛而 甲寅(1554년)」보다 전에 실렸고, 또한 홍인우 사거가 1554년 11월이기에 이 이전에 쓴 서찰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견해가 이 서찰 이전에 유입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광한(1484~1555년) 『企齋別集』 卷之一 詩에 보면, "薛公(설선)讀書錄"라는 문구가 있는「簡謝羅(世纘)監司寄韓詩外傳,薛公讀書錄,畫龍寶墨」라는 시가 「奉送任武伯 虎臣 觀察慶尙道」라는 시보다 앞에 실렸는데, 임호신(1506~1556년)이 경상감찰사에 부임한 해가 1547년이므로, 이 이전에 지은 것이 된다. 또 이황의 종질 인(寅 ? ~?)의 사위인 금보(1521~1584년)가 1556년 여름에 지은【四書質疑(『梅軒先生文集』) 】의 〔논어〕 . 〔맹자〕 편에 "辥文淸讀書錄"에 관한 기록이 각각 1 번식 보인다. 또 같은 해 김부필의 사촌 아우이자 퇴계 이황 문인인 김부륜(1531~1598년))과 교류한 남명 조식 문인인 곽율(1531~1593년)이 작성한 「書薛文淸讀書錄下方贈金惇叙(禮谷先生文集)」 "嘉靖丙辰秋下澣(1556년 가을 하한)에 이 책(『독서록』)을 얻어 읽었는데 경언(警言)이 심해 참 학자(眞學者)에게 마땅한 보배니 잃어버리면 안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이 『퇴계문집』의 기록의 2년 후이다. 그런데 이 기록이 주목되는 이유는 퇴계 문도들 보다 '남명 그릅'에서 이 책에 대한 인식을 빨리 정확하게 캐치해 퇴계 문도에게 권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어서 김부필(1516 ~ 1577 년)이 "書薛文淸讀書錄後" 라는 발문이 작성한 때가 1564년 2월이라고 기록되었다.3) 이 기록이 상기 조식과 이황 간에 왕복 서찰한 같은 해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기대승의 고봉집에도 설선의 『讀書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는 "1569년 6월 20일"로 기록되어 있다.4) 이러한 측면에 볼 때,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논변의 전야의 사상계 동향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퇴계 . 고봉 간의 이 논변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논변이 중단된 이유도 이러한 사상계 동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논변이 중단된 시기가 김부필이 상기 발문을 쓴 해와 겹친다는 점이다. 즉 이황의 나이도 노령에 접어들었지만, 이 논변을 지속할 정도로 사상계 상황이 뒷받침해 주지를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황이 조식의 출처를 노장이라고 비판한 것을 두고서, 홍가신(1541~1615년)은 조식 혼자만 출사에 불응하였던 것이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우서』 저자인 유수원(1694~1755년)은 "화담(서경덕) . 남명(조식) . 대곡(성운) . 송당(박영) 제인이 당초 너무 명성을 얻었고 國俗鹵莽(나라의 풍속이 거칠고 서투룸)이 극에 달한 유학규모문로(儒學規模門路)로 퇴계에서 시작해 이미 명백히 사람들이 노장기미(老莊氣味)로 그들을 안 방문별전(傍門別傳) 때문에 오히려 예전같이 다시 사모할 수 없게 되었다(以花潭南冥大谷松堂諸人言之。當初得名之過重。亦由於國俗鹵莽之致。儒學規模門路。自退溪後。亦旣明白。則人亦知其爲老莊氣味。傍門別傳。不復慕尙如前矣。<『迂書 』卷十 「論變通規制利害」>)"라고 개탄했다.
남명 조식 별세 시에 제문을 받치었던 김홍미(1577~ 1605년)는 창석 이준에게 설선의 『독서록』을 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 또 동강 김우옹도 설선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고,6) 또 한강 정구는 <書讀書要語續選後>라는 발문을 짓었고,7) 또 탁계 전치원도 설선의 『讀書錄』 을 애완을 그치지 않다고 기록되었고, 8) 또 오문 또는 오한(1546~1589년)이 독서롣을 손에 놓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9) 이는 '남명 그룹'에서는 설선의 『독서록』이 두루두루 애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이후 '남명학파의 자장권' 내의 인물인 하홍도 . 조임도 . 박민 . 박태무 . 송정렴등등이 설선의 『독서록』을 독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중 박태무는 「讀書錄後小識(西溪先生集卷之六 / 跋)」라는 발문을 남겼다.
이황이 성운과 조식의 학문성향과 출처관을 한꺼번에 싸잡아 비판한 것도 이러한 측면에도 있었을 것이다. 상기와 같이 볼 때, 성운 . 조식이 어느 시기에 설선의 『독서록』을 접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조식의 경우는 1564년에 이황에게 서찰을 보내기 이전에는 적어도 설선의 『독서록』을 독했을 것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 薛文淸讀書錄要語 설문청독서록요어 청구기호 : 一簑古028-Se63s】에는 조식 남명집에 실린 <행단기 >. <누항기>가 실린 것으로 보아 남명 조식 존숭한 인물이거나, 남명학파 자장권 내에 있었던 인물의 소장 도서였을 가능이 짙다.
또 하나 첨언을 하자면, 서애 유성룡이 1604년에 작성한 하기는 발문이다.,
書南冥集後 甲辰
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吾於此書。亦云。萬曆甲辰跋。
이 발문도 김홍미의 청으로 작성되지 않았나 한다. 김홍미는 조식의 문인이기도 하지만, 서애 유성룡의 문인 동시에 그의 형 운룡의 사위이기도 하다.
상기 논한 것을 통괄하면, 설선의 견해는 늦어도 1564년에 유입되었을 것이며, 『讀書錄』도 이 이전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讀書錄 에 主敬의 공부와 실천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薛瑄과 그의 제자 閻禹錫에게 공유되는 학문적 관점이라는 점9)에서 조식 . 성운은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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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유심춘 - 江皋先生文集 卷之十四 墓碣銘 「永平敎授守吾堂吳公墓碣銘 幷序」 “德溪吳先生有賢從弟。諱僴字毅叔號守吾堂。... 公以嘉靖丙午。生于山陰之德邨第。萬曆己丑卒于晉州茅谷別業。距生年四十四。公蚤受業於德溪。又登南冥曺先生門。操行修整。論議峻發。爲儕類所推重。棄擧子業。專精實學。手不釋辥文淸讀書錄。曺先生嘗稱之曰性簡行高。南州第一人 ...“
2) “薜公讀書錄。非困知傳習之比。其言皆親切有味。最多喚醒人處。偶因洪應吉。聞貴府有刊本。前敢冒叩。卽此垂寄。使衰懦者有所策勵。公之惠我周行至矣。僕何能有獻於左右耶。": 이황- 『退溪先生文集 』 卷之二十一 書 答李剛而
3)後彫堂先生文集 卷之四 / 讀書箚錄 書薛文淸讀書錄後 (從姪壕赴試在都也。琴上舍夾之印得兩件。贈余一件: 원주) “公諱瑄字德溫。山西河津人也。永樂辛丑進士。正統判陞大理寺左右少卿。以獄事詿誤。閒居七年。用言官薦起爲大理寺丞。天順陞禮部右侍郞兼翰林院學士。入內閣轉左侍郞。年六十九乞休致。章三上乃允。七十六終于家。自號敬軒。贈禮部尙書謚文淸。嘉靖甲子(1564년))二月日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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