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제목에서 보이듯이 이 글은 “사회” 개념에 대한 아도르노의 짧은 논문이다. 아도르노는 사회가 본질적으로 과정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사회가 과정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회”의 개념을 정태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법칙은 항상 사회의 변화=운동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렇다고 해서 아예 사회라는 개념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아도르노는 사회적 요소 없이는 개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논하는데, 이는 개념을 통해 개념 내부에서 비개념자에 다가가야 한다는 아도르노 특유의 입장을 연상케 한다. 아도르노는 사회 개념을 전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세한 이론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이 연역적 방식 특유의 역동성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아도르노는 아예 사회의 개념이 역동적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설명을 포기하려드는 태도가 기만적이라고 말한다. “화해되지 않은 상태가 이 상태에 대한 이론에 대항하는 금욕에 의해서 단순히 감내되고 있으며, 감내된 것은 종국적으로는 집단적인 강제적 속박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사회를 찬미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가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규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도르노는 사회를 본질적으로 상이한 두 흐름의 변증법적인 충돌로 구성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아도르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아도르노는 심지어 이 글에서 계급관계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 향상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사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영역을, 그러니까 아도르노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화’산업’을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으로 다루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놀랄 만한 점은 아니다.
이렇게 아도르노는 포스트-담론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며, 단순히 모든 것은 모든 것에 매개되어 있다는 추상적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 반면 대부분의 프랑스 신좌익 이론들은 이러한 인식에 머물렀다고 생각된다 – 그런 상호연관체에서 어떠한 것이 주요한 것이고 어떠한 것이 부차적인 것인지에 대한 조사로 나아간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여기서 아도르노와 마오주의는 서로 만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경제적 모순만으로는 사회적 문제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소위 신좌파 이론 태동의 근거였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보편자가 개별자를 필연적으로 산출하고 또 개별자에 의해 보편자가 실현되며 표현되고 인식된다는 헤겔적인 도식을 도입함으로써 대응하고자 했는데 – 이는 명백히 마오주의의 공적이다 – 아도르노 역시 여기에서 “주요모순”의 이론적 등가물을 찾고자 한다. 그러니까, 여러 사회적 모순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는데, 그 상호작용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무래도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과학철학의 용어를 이용한 비유가 하나 떠올랐는데, 콰인에 따르면 우리의 믿음들은 서로 연관되어 그물망을 이룬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타나면, 우리는 우리 믿음의 그물망을 이루는 요소를 수정하며, 어떠한 요소가 수정되는지는 과소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수정되는 믿음, 즉 주변논제와 그렇지 않은 믿음, 즉 중심논제가 있는데, 즉슨 믿음의 수정에 있어서 반증의 과소결정만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논제와 주변논제 사이의 지위적 차이도 어떠한 믿음이 수정되는지에 대해 관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중심논제는 믿음의 수정에 대해, 즉 모순의 해결에 대해 실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과소결정 하나만을 내세우며 일종의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는 실천적으로는 현재의 중심논제를 자기도 모르게 옹호하는 이율배반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비유로 맑스주의자 아도르노와 포스트-담론들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사회의 중심 요소는 무엇인가? 아도르노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고려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동일성 사고”일 것이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실제로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이 동일성 사고는 단순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저 “차이를 무시하는 것 뿐인 사고”가 아니다. 아도르노에게 동일성 사고는 명백히 물적-경제적 토대를 가지며 그것에 기반한 것이다. 바로 교환법칙이라는 토대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도르노가 사적 유물론의 기반 위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교환법칙은 마르크스에게서 유래한 개념으로 – 존-레텔과 같은 신칸트주의적 영향도 있지만 넘어가자 – 간단히 말하자면 10의 가치를 갖는 아마포 하나와 10의 가치를 표현하는 화폐 하나가, 분명히 다른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것인 것 마냥 교환되는 것을 말한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교환하는 실천이 동일성 사고를 낳는다고 – 이는 역사적으로 선험적인 지위를 갖는다 – 판단한다. 그리고 교환법칙의 모순에서 사회적 모순들이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는 기술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는데 이 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여하튼 아도르노는 사회가 이러한 모순을 가리기 위해 그리고 또 그러한 모순으로 인해 계급의식을 저하하고 허위의식=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사회를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어려움을 인식하는 것에 사회개선의 희망을 건다.
전체적으로 좋게 말하자면 아도르노 사회철학의 주제가 압축되어 있는 글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논지가 이리저리 튀는 – 물론 나름의 흐름은 계속 유지되지만 정신이 사나운 흐름이다 – 글이었다. 그리고 사회학치고는 꽤나 사변적이면서도 사회철학치고는 또 경험과학스러운 느낌이다…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