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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을 맞아 「싯다르타」를 읽었다. 사실 석가탄신일은 명분일 뿐이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더 읽고 싶었다. 이번 달만 헤세의 작품을 네 권째 읽었다. 헤세의 사상에 동조하건 반대하건, 헤세의 소설은 내 내면에 울림을 일으킨다. 「싯다르타」도 마찬가지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인도의 종교에 기반했기 때문에 신비로운 색채가 많이 짙었지만, 결국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방황한다는 점에서 싯다르타와 나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생각에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싯다르타」에 대한 감상을 말하기 전에, 「싯다르타」가 관념성이 짙은 작품인 만큼 요약과 해석을 붙이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싯다르타는 엘리트로 태어나 주어진 가르침을 모두 소화했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는 개인을 움직이는 원리인 아트만을 찾고자 했다. 이는 자아 속에 파묻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은커녕 자신 안의 원리인 아트만을 찾은 사람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가족의 품을 떠나 고행을 시작한다. 자아를 죽여서 그 안에 있는 아트만을 발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어째서인지 자아를 죽일 수 없었다. 만물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연습을 해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됐다. 싯다르타는 여전히 자신을 위한 가르침들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 싯다르타에게 고타마가 가르침을 전한다. "그토록 명백하고 그토록 귀한 부처의 가르침도 한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바로 세존께서 몸소 체험하셨던 것에 관한 비밀, 수십만 명 중에서 홀로 체험하셨던 그 비밀입니다." 싯다르타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이 가르침에 매달려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했음을 깨닫는다. "나는 나 자신을 두려워하고,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나는 아트만을 추구했고, 브라만을 추구했다. 내 자아의 알 수 없는 심층부에서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기꺼이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내고 껍질을 벗겨내버렸던 거야. 그러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고." 그제야 싯다르타는 자아에 주목한다. 그러고 보니 모든 사물은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는 커다란 가르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자아에 의해 움직인다. 가르침만큼이나 각자의 자아가 느끼는 감각이 중요한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마치 단어를 읽으며 철자 하나하나를 보지 않는 실수를 범한 셈이었다. "사물의 의미와 본질은 사물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사물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 깨달음을 계기로 속세에 투신한다. 자신이 무시하던 자아의 감각적인 측면을 극대화하여 체험할 심산이었다. "감각과 사유, 이 두 가지는 모두 좋은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귀기울여 들어볼 가치가 있고, 함께 작용해야 했으며, 그 어느 것도 경시되어서는 안 되고 과대평가되어서도 안 되며, 두 가지 모두에게서 가장 내밀한 진리의 비밀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통해 육욕을 채우는 기술을 배우고, 카마스바미로부터 세속적인 세계에서 재산을 굴리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런데 이것은 실수였다. 싯다르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속세의 삶에 진정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아이들의 놀이처럼 여겼다. 그러다가 재산이 점점 늘어가며 싯다르타는 속세의 사람들과 동화되어 쾌락과 탐욕에 목을 매게 된다. 싯다르타는 중간을 유지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다 싯다르타는 어느새 나이 든 카말라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도 소진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새가 새장 안에서 죽는 환상을 보고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는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의식도 못한 채 보통 사람처럼 되고자,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처럼 되고자 애를 썼고 그들의 삶을 동경했으나. 그의 삶은 그들의 삶보다 훨씬 비참하고 빈약해졌다. 그들의 목표가 그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고, 그들의 근심이 그의 근심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카마스바미 같은 부류의 세계는 그에게는 결국 하나의 유희,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춤, 희극에 불과했다. 그런 유희를 위해 살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유희는 윤회라고 불리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위한 유희다. 어쩌면 한두 번, 열 번 쯤은 즐길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제까지나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 순간 싯다르타는 유희가 끝났음을, 자신이 그 유희를 더이상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즉시 도성을 빠져나온다. 자신이 잠깐 빠졌던 향락의 삶이 저주스러웠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 싯다르타를 구제한 것은 강(江)이었다. 강은 싯다르타의 모습을 비추어 싯다르타의 현재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방황을 깨닫고, 앞으로라도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방황을 부정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세상의 쾌락과 부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린 시절에 이미 배웠어. 그 사실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직접 체험한 거야. 이제야 그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됐고,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눈과 가슴, 위로도 알게 되었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잘된 일이야!" 싯다르타는 그간의 향락적인 생활에 의미를 부여한다.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높은 가르침을 쌓으며 은연중에 키운 오만함이 속세의 삶을 사는 동안 소진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수데바와 함께 지내며 강으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가장 큰 소득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이었다. "강물은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강의 원천에서나 강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그 모든 곳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또 강에는 다만 현재만 있을 뿐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유년기와 장년기는 단지 그림자로 가른 인위적인 구분일 뿐, 생애 전체는 결국 그 사람의 삶이라는 점에서 어떤 부분이든 본질이 같다. "그 어떤 것도 과거가 아니고 그 어떤 것도 미래가 아니며, 모든 것이 현존하고 있고 모든 것이 실재이며 현재입니다." 그래서 강의 소리에는 삼라만상의 소리가 다 들어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리가 강물 소리에 실려있는 것이다. 강에서의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카말라와 카말라 사이에서 얻은 싯다르타의 아들이 찾아온다. 카말라는 그곳에서 독사에 물려 죽는다. 카말라의 아들은 싯다르타의 생활에 맞출 의지 없이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도망치고 만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곁에는 강과 바수데바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늙은 카말라의 주검에서 자신이 반했던 카말라의 젊은 시절의 모습의 편린을 본다. 늙은 카말라는 눈앞에, 젊은 카말라는 지금 자신의 기억 속에 있다. "이 두 모습이 모두 현존하면서 동시에 실재한다는 감정, 영원성의 감정이 그를 온통 사로잡았다.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느꼈다." 도망친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삶은 자신의 삶과는 다르며, 아이의 모든 시간이 자신이 지금 지내는 시간만큼이나 고귀하다. "모든 충동과 모든 어린아이 같은 짓들,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으면서도 더없이 강하고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지니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드는 강력한 충동과 탐욕, 그 모든 것이 싯다르타에게는 더이상 유치한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무한한 업적을 성취하며,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많은 것을 참아낸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들 각각의 열정 속에서, 그들 각각의 행위 속에서 생명, 살아 있는 것, 불멸의 것, 브라만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이 하나의 강물이라면, 그 안을 흐르는 모든 생명의 물줄기는 시간을 초월해 동등하게 현존한다. 모든 삶은 강의 일부이다. 우리가 어떤 모범을 추구하는 것은 강의 흐름의 일부만을 보는 행위요, 숲을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강 안에서, 세계 안에서 모든 삶은 각기 다른 모습을 띄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은 하나이다. 싯다르타는 여기서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다. "그 순간 싯다르타는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일을 단념했고, 번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의지도 거역할 수 없는 깨달음, 완성을 아는 깨달음에서 생겨난 명랑함이 흘러나왔다. 사건의 강, 삶의 흐름과 하나가 되고, 다른 살마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느끼며, 강물에 자신을 내주고 단일성에 속하게 되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이 단일성의 가르침을 오랜 친구 고빈다에게 전하는 것으로 「싯다르타」가 끝난다.


나는 싯다르타의 여정을 '단일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삶의 모습들이 있으며, 심지어 우리 생 내부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한다. 나의 삶을 예로 들면, 공부벌레이던 중학생 시절의 모습, 반항기 어린 모습으로 공부를 게을리하던 대학생 시절의 모습 등으로 나뉠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 혹은 내가 이상으로 여기는 모습과 내가 사는 모습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하하고는 했다. 공부벌레이던 시절에는 사교성을 동경했고, 공부를 게을리하던 시절에는 스스로가 파멸한다고 느끼며 공부벌레를 역으로 동경했다. 「싯다르타」를 읽고 드는 생각이 있다. 우선 이런 굴곡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몸소 상승해 보기도 했고 몸소 떨어져 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충동에 이끌릴 위험성이 떨어졌다. 둘째로 나는 이런 모습이 되어보기도 했고 저런 모습이 되어보기도 했으며 다른 모습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떤 강줄기도 탈 수 있다.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나의 모습이며, 과거와 미래가 상관없이 나의 의지가 만든 나의 현존이다.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모습 또한 나의 잠재적인 모습이다. 모든 모습은 소중하며, 모든 삶은 존중 받아야 한다. 결국 '나'는 세계의 일부이자 세계의 전체이다.


내가 걷는 모든 길이 나에게로 가는 길이며, 거기서 보는 모든 존재들이 곧 나 자신이다. 물론 내가 가고자 하는 길, 혹은 내가 걸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길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우리가 곧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모습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걸음은 '생각'이 아니라 '체험'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인도를 통해 생각을 다듬을 수는 있지만 삶을 다듬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 매진해야 한다. 모든 체험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다가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관문들이다. 생각날 때마다 강물에 자신을 비춰 자신의 현재 모습을 파악하는 일만 해준다면, 나는 언젠가 원하는 모습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잠재적으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물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내게 주는 교훈이자 희망이다.


「싯다르타」는 그간 읽은 헤세의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르침을 강요하지 않고, 신비한 소재들을 쓰면서도 신비주의에 매몰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우리를 끌고 가지도 않는다. 내가 「싯다르타」를 옳게 해석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나'라는 물줄기의 흐름에 들어와 내 생각을 흔든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내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지금 모습을 답보할 수도 있고, 혹은 독서를 계기로 각성하여 힘차게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세계의 일부이자 전체이기에 어떤 모습이든 배우고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음을 깨달았으니, 내 지금 모습 또한 내 삶이 지속하는 동안 가르침을 줄 영원한 모습으로 인식하고 사랑해야겠다. 나아가 주변에 널린 스승들이자 나 자신과도 같은 존재들을 사랑으로 살펴보려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