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에게 충성하라, 부모의 말에 거역치 말라, 시신은 매장해라, 하느님을 믿어라, 성경을 믿어라, 기타등등...
세상엔 수많은 명령형 형태의 계율들이 있지. 근데 이것들이 '옳은 것' 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없다.
뭐가 됐건 간에 "왜?" 라는 질문을 연쇄하면 결국 대답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어 있다.
"왜 군주에게 충성해야 하는가?" 와 같은식으로 묻고,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하고,
그럼 또다시 "왜 ~이면 군주에게 충성해야 하는가?" 라고 묻고,
또 대답하고... 이렇게 몇 번만 연쇄해도 금세 대답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면 짜증을 내거나, 어디쯤에서 '당연한거지' 라고 말하면서 단호박을 단호하게 자른다.
당연하다면 그 당연함의 근거는 어디에서 가져오는걸까? 대답할 수 없다. 그런거 없고 걍 당연한 거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입으로 자신의 논리적 파산을 선언하는 셈인 것.
여태까지 많은 이들은 이런 질문에 매달리고 있다.
가령 한때 유행을 탔던 마이클 샌델의 JUSTICE 에 보면,
"한 명을 희생시키면 여러 명을 살릴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논제가 나온다.
여기엔 사실 일반화 가능한 대답이 있을 수가 없다.
논리 a 를 가지고 "여러명을 살리고 한 명을 희생시켜야한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논리 b 를 가지고 "여럿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순 없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거고,
논리 a 와 논리 b 는 모두 앞서 말했듯이 결코 완벽하게 뒷받침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런 문제에 계속해서 매달린다. 왜일까?
"이러저러하게 해라! 그러면 된다!" 라는 지침을 얻고싶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불교에서 집중하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불교에서 집중하는 것은 '고통' 또는 '괴로움' 이다.
살아가는 모든 짐승들과 사람들은 괴로움을 안고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건 정답도 없는 논제를 가지고 끝없이 갑론을박을 하는 형이상학적인 윤리 담론이 아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들 괴롭게 살아간다' 는 직관적인 사실이고,
이 괴로움에 공명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여자한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하자.
"자기야~ 자기는 자기 엄마랑 내가 물에 빠졌고, 딱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할거야~?"
답변자가 "둘 다 구할거야" 라고 말하면 질문자는 재차 "한 명밖에 못구한다면?" 이라고 물을 것이다.
짜증나는 상황이다. 질문자는 답변자를 질문으로 괴롭히고 있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식의 함정에 애초에 걸리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런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 부터 이미 쓰잘데기 없는 미로에 빠지는 것이라고 본다.
크게보면 많은 사유들이 그런 쓸데없는 미궁과 같다.
"이러저러한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고민을 생각해 보자.
그 고민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한다" 는 지침 따위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여친과 엄마가 물에 빠졌고,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을 때에는 엄마를 선택해야 한다, 같은 지침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지침을 원했기 때문에 '경전' 이나 '교리' 따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 해메다가 없으니까 결국 만들어 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결국 선택의 문제는 욕망의 결정에 따라 결론지어지게 되어있다. 무슨 뜻이냐면,
엄마와 여친 중에 여친을 선택하는 것은 여친을 더 좋아하거나 더 귀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고,
엄마를 선택하는 것은 여친보다 엄마를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올바른 도덕' 이라는 것은 이런 다양한 행위 가능성 중에서 하나만을 찝어 '마땅히 그래야할 것' 으로 정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난 엄마를 구할 거야. 왜냐하면 내가 믿는 종교에 따르면 그게 윤리적으로 옳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경전에 따른 것 뿐일지 몰라도, 결국은 그게 옳은 것이라고 결정지은 놈은
자기가 더 끌리는 쪽으로 결정한 다음에 그렇게 정한 것에 불과하다.
'도둑질하지 말라' 는 도덕적 명령도 마찬가지다.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고 최초에 정한 녀석은 그 편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만약 왕이 그렇게 정했다면, 백성들이 서로의 재산을 도둑질 하면서 티격태격 한다면 나라 운영에 해가 되니까 도둑질을 금했을 것이고,
백성들이 그렇게 정했다면 그렇게 정해놓고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는 편이 편하니까 그렇게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남의 것을 훔치고 싶어서 미치겠는 놈은 그렇게 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자연 속에서 정해져 있지 않는 것들은 사람에 의해 임의적으로 정해진 것일 뿐이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정답' 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런 함정에 애초에 빠지지 않는 편이 나은 것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아 그럼 도대체 어쩌라고?"
역시 함정에 빠져있다.
"빡치넼ㅋㅋㅋㅋㅋㅋㅋㅋ"
함정에 안 빠졌다.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길은 거기에 정답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공(空) 이다.
그러한 윤리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고 나면, 그저 마음가는 대로 살면 그뿐이다.
하지만 마음가는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러가지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먹고싶어도 먹을 것이 없었을 수도 있고,
너희은 연애를 하고 싶지만 못생겨서 여친이 없을 수도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싶은데, 사회성이 떨어지는 성격 탓에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지능이 낮아서 공부를 못할 수 있고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받을 수 있다
마음가는 대로 살 수 없는 탓에 괴로움이 생긴다.
부처는 궁을 나와 세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괴로움에 둘러싸여 사는 것을 목도했고,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을 지를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었고, 지금에도 승려들은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면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괴로움에서 해방된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내가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넘어간다.
해탈에 이르고 나면 나의 괴로움은 없되, 다른 사람들과 짐승들의 괴로움은 납는다.
이 괴로움을 긍휼히 여겨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가름침을 주고,
그밖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이 승려들이 남은 생을 보내면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짐승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육식도 하지 않고,
벌레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밟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다.
식물은 괴로움을 느낄 뇌 자체가 애초에 없기 때문에 괜찮다. 그래서 식물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얘네들은 어느정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기 좋은 방향으로 답을 내려버린다.
가령 '이웃을 사랑하라' 는 기독교의 도덕적 명령을 생각해 보자.
이웃끼리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는 세상은 아마 꽤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정답을 정해놓고 따르라고 하는 방식은 필경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변화하며, 한 때의 유용했던 정답이 다른 시대에는 해악(더 많은 괴로움)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중세 기독교에서 강도짓을 한 사람을 '아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 는 이유로 처벌 (사형, 옥살이 또는 태형 등등) 한다면,
이는 강도를 괴롭게 했으므로 강도에 대한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셈이 되고 만다. 논리적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강도짓을 당한 사람의 편을 들면 강도에게는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고,
강도의 편을 든다면 강도짓을 당한 사람에게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아까 예로 든 물에빠진 엄마와 여친의 예에서도 그렇다. 여친을 구하면 엄마가 괴롭게 되고,
엄마를 구하면 여친이 괴롭게 된다. 누구의 괴로움이나 괴로움은 똑같이 괴로움이다. 어느 한 쪽의 편만 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려들은 세상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되도록 지양하게 되는데, 그래서 불가에 몸을 담으려면 세속을 등지게 되는 것이다.
탈속 (속세에서 빠져나옴) 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탈속 또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경전속의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가령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이들이 괴로워할 때, 승려들은 세상 일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면서
뒷짐만 지고 있는다면 병마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줄일 수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또 속세에 뛰어들어 환자들을 보살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을 돌보기에 앞서, 우선 '나' 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령 내가 강도를 당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그 강도가 미울 것이고, 음식을 빼앗긴 탓에 배를 곯아야 한다면 괴로울 것이다.
혹은 내가 돈을 잘 못 벌어서 겨울에도 난방을 못하고 춥게 지내야 한다면 그것도 괴로운 일일 것이고,
다른 이들의 괴로움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 추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나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하고, 이렇게 싹튼 생각은 세상에 대한 사유로 자라난다.
이 사유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 결국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있고,
그냥저냥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괴로움은 있고, 괴로움에서 출발한 세상에 대한 나름의 사유를 가지고 있다.
"니들은 열심히 살아라" 라고 자기 나름의 진리 (열심히 살아라) 를 설파하는 사람
자신의 괴로움 (노력의 부재로 인한 현재의 가난함) 에서 출발한 나름의 사유를 했을 것이고,
그 결과로서 나름의 진리 (노력은 하는게 좋다) 에 도달했을 것이며, 그것을 설파하고 있는 셈일테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에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이미 부처가 있다" 고 말한다.
누구나 고민을 계속하고 결국 꺠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한 갈래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것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길을 걷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출발은 '괴로움' 에 있었고,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며, 그 귀결도 여기로 향한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은 이 괴로움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인 '자비' 인 것이다.
'나'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괴로움을 긍휼히 여기는 자비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내게 괴로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난 그냥 이렇게 괴롭게 살게 되어 있는거지 뭐"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물론 애초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괴로움이지도 않겠다만.)
혹은 "난 원래 이렇게 괴롭게 사는거야" 라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나에대한 자비심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관련 책 추천좀
음 너가 말하는게 무문관 그런거야?
무문관은 명상 수행의 구체적 방법론이고
그래서 책은??
불교를 빙자해서 뭔 개소리를 하고 있어. 공은 애초에 그런 개념이 아니고 불교에는 정해진 윤리가 없다거나 기독교는 고정된 윤리로 사람을 속박한다거나 그딴 건 죄다 니 망상이지 병신아.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건 그들이 불성을 갖고 있어서이지 각자의 괴로움을 안고 각자의 사유를 하고 각자 나름의 결론을 가져서 하는 말이 아님. 니 말대로라면
연쇄 살인범조차 나름의 살해 이유가 있는데 그럼 연쇄 살인범의 살인이 나름의 진리냐? 석가는 윤리나 도덕 진리를 그런 식으로 무한 상대주의로 몰아간 적이 없다. 또한 긍휼은 기독교적인 개념이며 긍휼은 자비가 아니다. 식물은 괴로움을 느낄 뇌가 없어서 괜찮다느니 뭐니 혼자서 되도 않는 망상하지 마라. 석가모니가 그딴 이유로 채식만 하라고 한 적도 없고 애초에
불교는 육식을 금한 적이 없다. 한국 불교가 육식을 안하는 건 중국 불교가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아 육식을 안하던 관습이 있던 게 그대로 중국서 넘어온 것이다. 불교 역시도 수없이 많은 경전 속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뭔 기독교는 이웃사랑 어쩌고이고 불교는 그딴 식이 아니란 헛소리냐? 심지어 석가모니는 개인의 수입을 어떻게 분배해서 저축하고 재테크를
해야 하는지 같은 소소한 영역에까지 지침을 내려놓았다. 니가 불교철학을 좋아한다면 혼자서 개똥철학 무한양산해내지 말고 한글 번역 니까야부터 충실히 완독해서 공, 불성, 자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나 탑재해라. 특히 긍휼=자비 이건 어이가 없네. 니까야의 많은 본문이 있지만 맛지마 니까야부터 먼저 읽도록.
불교 역시 수많은 명령형 계율이 있고 무수한 형이상학적 갑론을박이 있으며 이런저런 의문과 질문에 석가모니는 반드시 답을 했지 그런 건 정해진 답이 없다느니 되도 않는 헛소릴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수많은 의문에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니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건 근원적으로 오온이 무상하기 때문이지 세상사 속의 여러 의문
질문 갈등 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 혼자 방구석에서 니 혼자 없는 불교 창조해 내지 말고 이미 있는 불교를 니까야 읽고 충실히 개념정립해라. 온갖 종교 사이비들이 다 지혼자 망상한 후 되도 않는 논리를 혼자 정립해서 다른 이들에게 떠들고 다녀서 발생하는 거지. 너처럼.
오우... 왜 이리 화났어?
무슨 일본 아베도 아니고 망언 작렬하니 지적한 것뿐이다. 종교적 망언은 혹세무민으로 연결되니 그 자체로 심각한 죄악이다.
아니 좀 살살 말할 수도 있잖수. 나도 말 싸가지 없게 하는 놈인데 님 보니 혀를 내두를 지경이네. 상대방을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최대의 정신적인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 문장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공격성을 심어가며 말하는 말투같애.
암튼 님 리플 내용 자체는 동의함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네
심지어 이런 똥글을 딴 갤러리에까지 올려놓았네. 기가 찬다.
그 아이피
불교철학 입문하고 싶은데 책 좀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옳은게 옳은줄 알고 맞음 아님 틀림이고 흑아니면 백밖에 모르던 놈들이 노장이나 불교에 맛들리면 그제서야 지가 뭐 대단한 진리라도 발견한양...나이처먹고 중2병에 걸려버리지...
대공감
글 잘읽고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