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저번 달 보다 더 많이 읽기로 결심했었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다. 나름 핑계를 대보자면 이번에 읽었던 책들이 마냥 쉽지는 않았고, 5월 동안 나다닐 일도 많아서 독서에 집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 달에는 더 분발할 것을 다짐하며 지난 한 달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겠다.
1.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공생적 결합과는 정반대로, 성숙한 사랑은 상대방의 온전성과 개성을 보존한 채로 이뤄지는 결합이다. (…)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둘이기도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In contrast to symbiotic union, mature love is union under the condition of preserving one’s integrity, one’s individuality. (…) In love the paradox occurs that two beings become one and yet remain two.)”
- 사랑의 기술 中 -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1956년 출간한 교양 서적인 사랑의 기술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프롬은 독실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양친 모두 그가 유대교 설교자인 랍비가 되길 바랐지만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법학이 적성에 안 맞다고 생각했는지 전공을 사회학으로 바꿨고, 학교도 고향을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저명한 사회학자인 알프레트 베버(Alfred Weber)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학업을 지속했고, 새로운 전공에서는 두각을 드러내면서 스물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박사가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 사회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정신과 의사인 프리다 라이히만(Frieda Reichmann)과 사랑에 빠졌고, 이후 그녀와 결혼을 하면서 부부가 공동으로 정신과 보건소도 운영했었다. 이렇게 학자로서 승승장구만 하는 줄 알았던 프롬에게 두가지 큰 사건이 들이 닥친다. 뜨거운 사랑을 하던 아내 프리다와 2년만에 애정이 식어 2년만의 결혼이 파경을 맞았고, 그 다음으로는 1930년대 반유대주의를 부르짖던 나치즘이 독일에 창궐하였다. 이렇게 독일에서 삶의 기반이 무너진 그는 1934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낯선 타지에서도 그는 영어를 배워서 자신의 주 전공이었던 사회심리학 및 정신분석학 분야에서 활발히 학술활동과 강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그가 영어로 집필한 최초의 대중교양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가 1941년에 출간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책은 프롬의 인지도를 단번에 정상까지 끌어올렸다. 이후로도 그는 여러 저작들을 출간하며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1956년에 출간된 본작도 프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내가 이 책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철학자로서의 프롬의 명성을 익히 들은 것도 있었고, ‘사랑’에 대해서 심도 높게 고찰한 책이라는게 제 흥미를 끌어서였던 것도 있었다. 더불어, 아직까지도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근처 서점에서 원서를 찾아서 구매해 읽어봤다.
작가는 “사랑은 기술인가? 그렇다면 지식과 노력을 요구한다.”라는 말로 서두를 뗀다. 그러고는 사랑을 단순히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분좋은 감각으로만 보는 통념에 완강한 부정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먼저 그는 사랑이란 인간 실존문제에 해답이 될 수 있는 굉장히 진지한 것임을 피력한다. 인간은 본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면 단절감(separateness)을 느낀다고 하며, 이 단절감을 극복하지 못할때 마다 사람들은 초조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단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타인과 진실로 교감하기를 원하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정신적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작가는 사랑은 어떤 기회가 주어지면서 받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행동해서 이뤄내는 능동적인 것이라는 점을 무던히 강조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단지 사랑받기만을 원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몸도 마음도 자신의 소유물도 주지 않고 쌓아 놓기만하는 것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것을 주면서 기쁨과 생동감을 느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작가는 주체성 없이 상대방에게 막연히 기대기만 하는 일방적인 애정을 ‘공생적 결합(symbiotic union)’이라고 규정하고는, 마치 어머니의 몸에 안겨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갓난아기 처럼 사디즘과 마조히즘 같이 일방적이고 가학적인 관계나 우상화된 존재에 자신의 온전성을 져버리고 종속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유아적인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과 상대방이 지닌 온전성과 개성을 그대로 보존한 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작가는 덧붙이다.
프롬은 사랑에 대해 고찰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사랑이 사회 시스템에 따라 어떻게 왜곡되는지도 짚어보고, 이를 비판하는데도 지면을 할애한다. 이런 까닭에 본작은 프롬이 책을 집필할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사랑에 관한 담론에 대한 반박문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우선 가장 비판이 되는 대상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잡은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계몽주의에 경도되었던 근대 유럽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 전역에 팽배한 회의적인 분위기와도 맞물려 프로이트표 정신분석학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정신분석학에 몸을 담던 프롬도 프로이트가 인간의 사고에 무의식을 끌어들이면서 학문의 새 지평을 열어젖혔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와 별개로 사랑에 관한 프로이트의 견해에는 준열한 비판을 가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인간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두뇌에 가해지는 화학적 반응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프롬은 이런 견해가 사랑이 지닌 관계지향적인 성격을 완전히 경시했다고 반박한다. 덧붙여 그는 프로이트 말마따나 사랑이 단순히 가려운 데를 긁기라도 하듯이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화학적 반응이라면 사랑 문제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자위행위 밖에 없을 거라며 꽤나 원색적인 비판을 가한다.
두번째로 프롬은 현대인들이 인식하는 사랑이 다분히 자본주의와 상업화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점 또한 지적한다. 세간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사랑을 베풀것인지 고민하고 그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어떻게하면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지에만 골몰하고 있다. 이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상업화 현상과 맞닿아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근대화를 거치고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사회는 빠른 시간 안에 최대 수량의 물건을 생산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 하는데 총력을 다한다.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는 별탈 없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고 균일한 능력을 낼 수 있고 언제든지 대체가 가능하도록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표준화시킨다. 또 별탈 없이 시스템을 굴리고자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수단마저도 표준화해 놓는데, 소비야말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선전하며 대중들의 소비 현상을 부추긴다. 이를 통해 실상은 한없이 많이 생산된 몰개성한 기성품을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소비하는 것에 행복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더욱 더 많은 소비를 하면서 자신은 그 누구보다 개성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착각마저 심어준다. 이렇게 몰개성하고 상업주의에 찌든 근대 사회상은 사람들의 연애관에도 고스란히 스며든다. 프롬은 작품 서두에도 밝히듯이 현대 남성들은 사랑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부를 축척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현대 여성들은 미모를 가꾸고 예쁜 옷을 사서 모으고, 둘 다 이루기 위해 신경쓰는 남성과 여성도 있다. 이렇게 외양적인 조건을 갖춰서 사랑스럽게 보이고, 이를 통해 서로가 끌려서 결합하는 과정은 놀랍도록 사람이 소비재에 매력을 느껴 구매까지 이르는 과정과 매우 닮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이 조금 안되기 전에 프롬이 지적한 부박한 연애관은 현재 한국 사회에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몇년 동안 경제적인 조건만을 우선에 둔 천박한 연애담론이 대두되고 이에 편승해 조회수 장사에 여념이 없었던 레드필 유튜버들이 범람했던 걸 생각해 보면 프롬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난이도가 제법 어렵다는 평을 들어본 적이 있어서 직접 읽어보려는 게 꺼려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딱히 내용이 난해하지 않아 너무 어렵지도 않았고, 오히려 작가가 간명하면서도 깔끔한 문체로 개념을 일일히 설명해준 덕에 쉽고 재밌게 읽었던 것 같았다. 물론 엄연히 정신분석학적 견해가 들어간 학술서이자 철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책이다 보니 프로이트의 견해와 철학에 대한 기본 개념은 잡혀 있어야 원활하게 읽을 수 있는 편이긴 하다. 배경지식을 조금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만 감안한다면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알찬 책이기에 시간이 난다면 인터넷에라도 프로이트를 검색해서 그가 주창한 정신분석학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를 훑어본 뒤에 읽어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2. 구토 (La Nausée)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유 없이 탄생해서 연약하므로 그 목숨을 유지하다가 조우에 의해서 죽는다.”
- 구토 中 -
1905년 파리 태생의 소설가,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장편소설인 구토를 읽어봤다. 그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부르주아였던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윤택한 삶을 누렸다.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던 그는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줬는데, 프랑스의 손꼽히는 그랑제콜인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고,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였다. 그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초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1933년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서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사태가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천명하며 세계에 나타나는 현상 자체를 실증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만든 학문인 현상학(Phenomenology)을 공부했었다. 이 때 배웠던 내용은 사르트르의 사상적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2년간의 유학 생활을 정리하며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938년 구토를 출간하면서 프랑스 문단계에 데뷔하였고, 이후로도 그는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등의 철학서와 파리떼(Les Mouches), 닫힌 방(Huis clos) 등의 희곡을 내놓으며 명성을 얻었고, 이내 그는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문학가로서 자리 매김한다. 그가 이룩한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사르트르는 서구에 지나치게 치우친 스웨덴 한림원의 편향성도 고까워했어서 수상을 거절하였다. 내가 사르트르의 작품을 찾아서 읽어보게 된 이유는 사르트르가 유럽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점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가 커리어 초기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 호기심이 동해서였기도 했다. 그리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모도 구토가 재밌다며(?) 내게 일독을 권했던 것도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모한테서 책을 받아서 한 번 읽어봤다.
이 책은 서류철에서 발견된 어떤 종이뭉치가 발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종이뭉치를 쓴 사람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앙투안 로캉탱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는 6년간 프랑스를 떠나 세계 등지를 여행했었다. 그러면서 이뤄낸 학문적 성과도 괜찮은 편이었는지 인도차이나에서 있었을 때 메르시에라는 프랑스 식민지 관료가 로캉탱에게 고고학 조사차 벵골행 여행을 제안했었지만, 그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음에도 돌연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갑작스레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는 파리에 정착할까 계획했지만 그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17세기 귀족 드 로르봉에 관한 기록이 프랑스 북부의 해안 도시 부빌에 몰려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서 3년동안 살았다. 로캉탱은 세계 곳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고 한때는 안니라는 여자친구도 사귀었던 적이 있었지만, 부빌에 와서부터는 대부분의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교류를 하는 사람으로는 드 로르봉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시립 도서관에 갈 때마다 한 번 씩 마주치는 독서광 P. 오지에 씨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캉탱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바닷가로 나가 물수제비라도 튕겨 보고자 자갈을 하나 손에 쥐어봤다. 근데 그는 자신이 자갈을 쥐는 것이 아니라 자갈이 자신의 손을 만지고 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구토'할 것 같은 기분도 느끼고 그 이후로도 비슷한 역겨움을 계속 느끼게 된다. 이 불쾌한 느낌이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가지 않았던 로캉탱은 이 느낌을 어떻게는 떨쳐내고자, 사람이 많은 카페나 바로 들어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찜찜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와중에 평소에도 자주 마주치던 독서광이 로캉탱이 여러 나라를 편력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는 호기심을 내비치며 그에게 여행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내심 귀찮았던 로캉탱은 독서광에게 마지못해 사진 꾸러미를 들고와 그에게 보여줬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독서광은 감사의 말을 전하며, 자신이 모험에 관해 품고 있었던 동경심이 얼마나 큰지 그에게 피력하였다. 그덕에 로캉탱은 모험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며, 어쩌면 그가 내내 느끼고 있었던 구토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에 그는 평소보다도 열심히 부빌 시내를 이곳 저곳을 누비면서 공상에 잠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로캉탱은 어느 날 4년 전 헤어졌던 연인 안니로부터 파리에 있는 스페인 호텔로 찾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구토는 꽤나 난해한 작품이다. 단순히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문장이 복잡하고 길어서라기보다는, 이야기의 형식이 기존의 전통적인 소설과 판이하게 달라서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본작은 철저히 주인공인 로캉탱이 주위에 있는 사람과 사물을 어떻게 의식하고 감각하는지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그렇다보니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그때 그때 로캉탱이 보고 만지는 사물과 사람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묘사하는 내용만이 작품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작중 로캉탱이 다른 인물들과 얘기를 나누는 내용도 분명히 있지만 결국엔 주인공이 심상이 어떤지 보충 설명을 해주는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 내내 로캉탱이 가장 의식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존재'입니다. 작중 주인공은 다양한 사물을 보고 느끼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이를테면 그는 각 사물에 주어진 이름과 용도(예: 전철 안 의자, 나무 뿌리)를 떼어내고 사물 자체만 바라보면 어떻게 인식되는지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되면 네 개 다리 위에 얹혀져 있는 붉그스름한 살점 비슷한 것, 땅에 검게 들이 박혀 있는 쭈글쭈글한 형상만으로만 인식된다. 그리고 사물에 주어진 이름과 의미는 존재와 함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물의 모양이나 용도에 따라 사람들이 의미와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을 때닫게 된다. 이로서 로캉탱은 존재 자체는 한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낸다. 이는 사물과 동물뿐만 아니라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사실 사람이 태어난 것도 처음부터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것임을 사르트르는 본작을 통해 역설한다. 사르트르의 명언 중 하나로 회자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말도 본작에서 드러나는 내용이 기반임을 알 수 있다.
어째 소설이라기 보다는 철학책에 가까운 책인 것 같지만, 그래도 사르트르가 불문학에서 손꼽히는 문필가인 만큼 뛰어난 작문 실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상술하였듯이 본작은 로캉탱 주위 환경과 사물이 어떻게 인식되는지 묘사하는데 많은 활자를 할애하고 있는데, 사르트르가 이걸 그냥 밍밍하고 담담한 문장으로만 풀어내는 게 아니라 조금 문장을 늘여서 쓰되 적절한 비유를 동원한다. 그덕에 문장을 음미해보면 다채로우면서도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 책을 읽기 전 제가 사르트르에 대해 얄팍하게 추측했었던 것과 달리 미문가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 때 사르트르와는 동지였지만 정치적인 입장 차로 인해 결별했던 알베르 카뮈가 간결한 문체를 구사한 편인데, 두사람이 문장 스타일에서 조차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 나에게 꽤나 흥미로웠다.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이 책은 꽤나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책이다. 분명 책의 내용이 심오하면서도 삶에 와닿는 점도 있는만큼 충분히 시간을 할애해서 읽을 만한 책이지만, 너무 책이 난해한 만큼 이 책을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다. 만약에라도 이 책에 관심이 생긴다면,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서 독서 내공을 쌓은 다음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3.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예술은 보다 깊은 즐거움을 안겨 주고, 신속하게 기력을 갉아먹는다. 예술은 그것에 봉사하는 사람의 얼굴에 공상적이고 지적인 모험의 흔적을 각인해 준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수도원에서처럼 조용하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 예술은 방탕한 열정과 향락으로 가득 찬 삶조차 낳을 수 없을 것 같은 까다로운 취향, 지나친 섬세함, 피로와 신경질적인 호기심을 낳는 것이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中 -
1875년 독일 뤼베크 태생의 작가이자 20세기 초 독문학을 넘어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중단편집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다시 읽어봤다. 만은 한때 북독일에서 유서 깊은 상인 가문의 자손인 아버지와 독일계 브라질인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소 독특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그는 아버지로부터는 흔히 독일인하면 연상되는 규범적인 생활양식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열정적인 성격과,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감각을 물려받았다. 원래 거상 가문에서 나고 자랐던 만큼 만의 유년시절은 제법 유복한 편이었지만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고, 이후 아버지가 회사가 청산되면서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고향인 북독일을 떠나 남독일의 대도시인 뮌헨으로 이주한다. 거기서 그는 보험회사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짬짬히 대학 강의도 청강했습니다. 생업에 바빴던 와중에도 만은 어렸을 때 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었기에 문예지에서 여러 단편을 기고하며 문학가로서 두각을 드러냈고, 1901년 출간한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후에도 여럿 내놓았던 중단편소설들도 좋은 평가를 얻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본 중단편 소설들이 이때 나온 작품들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던 때는 작년 여름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 이름부터도 재미가 없어보였던 토마스 만의 작품을 반신반의한 채 읽었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까 이야기가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만이라는 작가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의 책을 읽은지 1년이 조금 안됐지만 만의 작품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서 읽어봤다.
상술하였듯이 토마스 만은 유년 시절 시민적이고 규범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자유분방하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이었던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가 병존하는 가정환경은 그에게 평생동안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강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근대 독일 교육을 싫어했던 만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문학을 좋아했던 만큼 자유분방함과 열정을 쫓아 소설, 희곡을 여럿 집필하면서 예술가의 길을 걸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규칙적인 일과대로 살았고, 대단히 부지런하게 집필활동을 해왔다. 이렇게 완전히 상충되는 생활양식이 서로 섞여있던 삶을 살았던 만은 두 생활양식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깊은 고뇌에 빠졌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일반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고립되어 있는 예술가이다. 책의 첫장을 장식하는 ‘글라디우스 데이(Gladius Dei)’의 경건주의자인 히에로니무스도 그렇고 ’트리스탄(Tristan)’에서 아프지도 않는데 탐미적인 심상을 찾아 요양원에 들어온 데틀레프 슈피넬, 홀로 고독히 예술에 푹 빠져있고, 딜레탕트를 경멸할 정도로 예술에 혼을 태우면서도 선민의식에 빠져 있지만 평범하고 생기 넘치는 일반인과의 교류를 희구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술적인 면모에서도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실생활에서도 규칙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적당히 균형을 맞춘 듯하지만 실상은 나른하면서도 퇴폐적인 삶을 갈구해왔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의 주인공 구스타프 아셀바흐에 이르기 까지 각 작품들의 성격에는 일관적인 면모가 있다. 이들이 겪는 갈등과 고뇌는 작가가 실제로 겪어왔던 고민과도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작품의 주요 테마가 시민성과 예술성의 충돌이다 보니 두 요소가 어떻게 대비를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도 관건이다. 작중 작가는 시민성을 일견 얄팍해 보이면서도 엄격해 보일지언정 생동감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강건한 존재로 묘사한다. 반대로 예술성은 자유분방하고 삶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심오함을 갖췄을지언정 쓰잘데기 없는데다 신경질적이고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병적인 존재로 그려낸다. 전술한 바와 같이 묘사된 두 요소는 단순 다른 걸 넘어서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기미 조차 안보인다. 이 때문에 작중의 주인공들은 크나큰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주인공들도 사람이니 만큼 외로움을 못 견뎌해서 주위에 있는 대다수의 시민적인 사람들과 교류하려고 애쓰지만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예술성에 발목잡혀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불어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 예술성이라는 게 파멸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도 하다 보니, 예술성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인물은 아예 파국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만이 대표적인 중단편을 썼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했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도 두드러지는데, 거기서는 시민성으로는 가장 모범적이었던 거상 가문이 세월의 풍파와 예술성과의 결합을 거치며 가문이 송두리째 몰락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만 작가는 시민성과 예술성이 상극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격렬히 긍정하지만 그렇다고 둘을 통합하려는 시도 자체는 절대 회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앞서 얘기하였듯이 작가 본인도 규범적인 시민의 생활양식으로 예술가의 삶을 살아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 예술을 하면서 겪게 되는 저주에 가까운 정신적 고통에도 무력하게 굴하지 않고, 시민적인 삶이 주는 인간성과 생동성을 쫓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 감동적이면서도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내가 작년이나 금년이나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중 주인공들의 처지를 제 삶과 겹쳐보면서 느꼈던 감동에 있는 것 같다. 작중 주인공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너무나도 다른 사고방식 때문에 무리에서 소외되고 고독감에 시달리는데, 내가 처한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격한 공감을 했었다. 그럼에도 작중 주인공들이 시민적인 삶을 희구하면서 타인과 교류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감동을 느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제게 이 책은 적잖은 도움이 되어 주었다. 토마스 만이 워낙 문장을 늘여서 쓰는 편이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좀 지루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가볍게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섬세하면서도 심오함이 드러나는 명작이니 만큼 작년과 마찬가지로 본작을 읽어보시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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