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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심부름꾼>

 

언어란 무엇인가? 발화될 수 있는 표상들의 세계이자 그 세계를 탐구하는 수단이 되는 것. 제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우로보로스적 운명 속에서 학자, 저술가, 예술가들은 발버둥친다. 맥길 크리스트는 이 운명 위에 올라타 언어 위에 있는 세계의 풍경을 조망하고자 한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좌우반구에 대한 연구들로 그 발걸음을 뗀다. 뇌는 왜 좌우로 나뉘어져있을까? 왼쪽과 오른쪽의 기능과 역할이 다른 걸까? 그렇다면 반구적 분리는 필수적인가? 뇌량의 역할은 통합 뿐 아니라 분리와 격리에 있는 것인가? 뇌의 이원 구조 자체가 인식의 근원인가? 궁극적으로 양 뇌의 차이가 사람의 인식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문화, 사회, 문명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 환경이 다시 사람의 인식을 재구성할 것인가? 저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좌우 반구 연구는 우로보로스적 운명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말하는 뇌인 좌뇌와 침묵하는 뇌인 우뇌. 그래서 똑똑한 좌뇌와 멍청한 우뇌라는 기존의 잘못된 이분법적 통념을 새로운 질문들과 새로운 증거들을 통해 해체하고, 뇌의 구조를 다시 세운다. 뇌에 대한 지식조차 뇌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뱀의 운명 탓에, 뇌의 이원 구조는 형이상학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격상된 좌우 반구는 서구 문명의 역사를 해설하는 도구가 된다. 저자는 이 도구를 손에 들고 언어의 우로보로스적 운명에 참여한다. 호메로스부터 르네상스 시대 화폭에 담긴 얼굴의 방향, 근현대 정치철학과 사회에까지 이어지는 현학적 논증은 서구 사회의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좌우 반구의 우세 전환 추세를 포착한다. 그럼에도 좌뇌와 우뇌의 역할을 간단히 범주화하기는 쉽지 않다. 세계가 정말 단순하더라도 그 인식의 근원인 뇌의 복잡성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좌뇌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우뇌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추상과 논리, 합리화, 기계적 조직화, 부분, 구체성, 일반화, 이미 아는 것을 다루는 좌뇌. 경험과 직관, 받아들임과 다가감, 유기적 표현, 전체, 모호성, 고유함, 새로운 것을 다루는 우뇌, 이 둘 간의 동시병렬적 구조와 상호작용. 이 복잡성을 범주화하려는 모든 시도 자체는 현학적일 수 밖에 없다. 인식의 구조가 너무도 복합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저자는 고유함과 일반화가, 구체성과 모호성이, 부분과 전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 자체에 대한 언어적 재현을 통해 제시한다.

 

이 현학적 여정 안에서, <주인과 심부름꾼>은 좌뇌를 똑똑한 심부름꾼으로, 우뇌를 현명한 주인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이 관계가 적절하게 유지될 때 문화의 황금기가 도래하고, 눈먼 하인이 주인 행세를 할 때 문화가 극단적으로 뒤바뀐다고 이야기한다. 이윽고 눈먼 하인이 주인 행세를 하며 세운 현대 문명 속에서 우리는 현명한 주인을 영원히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음을 주장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세계는 '세계 그림'이 되었다. 새로운 세계 그림이 아니라 세계가 그림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의 본질을 구별해 주는 점이라는 것이다.”

 

곧 저자는 우반구의 역할, 언어 저 밖의 무언가를 대변하는 우뇌적 인식을 복권하기 위해 우반구를 침묵시켰던 좌뇌적 인식을 해체하고, 말이 많은 좌뇌에게 어느 정도의 침묵을 요구한다. 요구한다는 점에서 좌뇌의 도구적 측면이 사용된다. 그러니까 좌뇌를 침묵시키기 위해 좌뇌를, 분석을 통해 분석적 사고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좌반구에만 의존하는 정도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욱 자의식적이 되며,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발언되지 않은 경험 요소들을 무시하게 되며, 결국엔 해석자 자신이 그 자신을 해석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에게 말로써 표현해주는 세계는, 말 자체가 창조한 세계이다. "말에 대한 말" 이라는 니체의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는 외롭고 자기에게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그에게 아무것도 말을 걸지 않는다

 

우반구에서 이루어지는 인지는 조각들을 순차적으로 더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의 처리 과정이 아니라, 초점이 안 맞던 것을 맞추어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과정이다.”

 

부분을 조합한다고 해서 고유한 전체가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경험은 두뇌의 아주 낮은 층위에서도 전체적으로 이미 일관되며, 더 높은 층위가 하는 일은 조각을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성장을 허용하는 일이다.”

 

좌반구와 세계의 관계가 손을 내밀어 쥐고 일하는 관계라면, 우반구는 단지 다가가는 관계이다.”

 

뇌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인식에 대한 뇌의 이원 구조 논증도, 좌뇌의 강력한 도구적 특성들과 우뇌적 조화로운 경험적 특성들도, 주인과 심부름꾼이 올바른 관계를 이룰 때, 개인과 사회는 더 풍요롭고 평화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예술적 사례들도, 좌뇌가 주인 행세를 하며 몸과 생명을 논리, 기계화 시켜버린 세계에서는 만성적 지루함이 나타나 만성적 쾌락주의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그 끝에 나타날 억압적 평등주의와 기계적 비효율, 그로 인한 만성적 갈등 상태에 대한 예언도. 모두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그 해법을 동양의 신비로운 음양의 조화적 사고방식에서 찾기를 바라는 결말은 다소 아쉽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세우는 책도 아니고, 세계의 고유함과 모호성, 복잡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사방팔방을 휘젓고 다니는 현학적 문체는, 언어와 개념을 오남용하는 듯한 인상도 남긴다. 그러나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재구성하여 일련의 흐름을 포착하고 우뇌적 인식을 복권하는데 얼추 성공했다는 점에서, 또 조금 어려운 대중서로써, 이 책을 창의적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주인과 심부름꾼>은 서구 문명에 대한 길고 긴 개략적 해설을 통해 우뇌가 주인인 삶을 바라본다. 파편화와 만성적 소외를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본다면, 좌뇌가 주도하는 현대적 삶의 전체란 고작 모자이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동하는 전체는 오직 우뇌의 산물이며 전체로써 존재하는 예술만이 삶을 온전히 은유한다. 좌뇌가, 눈 감고 귀를 닫은 심부름꾼이 주인 행세를 할 때 모든 것은 명시화된다, 곧 삶의 모호성은 제거되고, 삶을 보여주는 창은 너무 투명해 의미를 갖지 못하거나, 너무나 불투명해 삶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예술은 반투명함을 유지해야 한다. 예술은 단지 체계적 표상에 머물지 않고 몸, 신체를 얻어 생명화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 노력하여 분석하고 배후에서 조각조각 쪼개어 작업한 뒤에는, 그것을 살아 있는 작품으로 다시 한 번 변신시킬 때에는 과거의 모든 노력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