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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삶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의 무거움을 간신히 짊어지고 무언가 삶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 듯 싶으면 빠져나가고 다른 것을 발견한 듯 싶으면 또 다시 빠져나가고 이런 지옥의 형벌이 반복되던 찰나에, 드디어 나는 책에서 무언가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의문의 꺼먼 먹구름 속에서도 또 다시 책이라는 나무 속 구멍같은 안락한 공간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책벌레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던 와중에 간만에 그리스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그 노인을 만나고 싶어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어 들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동포를 해방시키러 험지로 떠나는 친구와는 달리 행동하지 못하고 관념에 사로잡힌 책 ‘벌레’입니다. 그는 부처에게서, 그리고 <신곡>이란 책에서 맛보는 관념적 자유를 맛보곤 즐거워합니다. 삶의 자유보다도요. 이 빌어먹을 책벌레가 쓴 책을 탐닉하는 또 다른 책벌레로서 주인공의 모습에서 제 모습이 비춰보였습니다.
이 책벌레에 대항되는 인물이 알렉시스 조르바란 인물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란 작품은 주된 사건의 흐름과 함께 주인공의 관념 서술, 조르바와의 대화와 행동 제시, 그리고 주인공의 변화라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그렇기에 조르바란 인물의 캐릭터가 맛있어야만 하죠. 주인공이 본받고자하는 인물이 그저그런 건달이라면 작품은 필경 곰팡내를 풍기는 지하보관실에 처박혀 아무도 찾지 않은 채 봉인되어 있을겝니다.
조르바란 인간을 설명해보자면 즐겁게 살고자 했지만 즐거운 삶을 살지 못했던 니체의 영원회귀적 이상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조르바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몇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자주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그러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주의하지 않고 보아 넘기는 것들이 그의 앞에서 엄청난 수수께끼로 되살아났다. 가령 그는 지나치는 여자를 보고 몸서리를 치며 멈춰 서서는 물었다. “이건 무슨 조화죠? 여자란 무얼까요? 어떻게 내 머리 꼭지를 돌게 만드는 거죠? 이건 또 뭡니까? 말 좀 해봐요.” 그는 어떤 때는 사람을, 어떤 때는 꽃이 핀 나무를, 또 어떤 때는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몇 번이나 말해줘야 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무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절대로, 정말 절대로 더 낫지 않죠! 그놈도 짐승이에요.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죠. 나는 오직 그놈만을 잘 알 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하죠. 다른 모든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헛것이에요. 내가 죽는 순간 모든 것들도 죽죠. 조르바의 세계 전체가 바닥으로 사라지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위대한 예언자들이나 시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모든 것을 처음인 듯 보고 느낀다. 매일 아침 자신들 앞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을 본다. 새로운 세상이 안 보이면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그리고 처음 보는 듯이 삶의 모든 것을 만끽하는 조르바를 보고 ‘나’는 잉크가 서서히 종이에 젖어들면서 그 얼룩이 점점 커지듯이 종이와 잉크 속 관념보다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커집니다.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말죠.
그럼에도 ‘나’는 조르바처럼 욕망을 핥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방해물은 최후의 인간 부처! 욕망이란 항구에 정박하려 하면 부처란 파도에 밀려 궤도를 벗어나고 또 다시 밀려납니다. 하지만 소망이 강하면 언젠간 실천에 나서게 되는 법. 결국 암말 같은 궁둥이를 가진 과부와의 사랑이란 달콤한 과실의 결실을 맛보게 됩니다. 주인공의 모든 심리 빌드업은 결국 이 순간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별 묘사도 없지만 독자마저 짜릿해지죠.
하이틴 영화보면 순결을 잃고나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자랑하죠 예에~ 나 더 이상 총각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과부와의 사랑 이후에 인생의 참맛을 보고 조르바와 함께 환희합니다. 아 물론 이 장면이 성욕, 육체적 사랑의 탐닉만이 삶이라는 걸 나타내는 장면은 아닙니다. 모든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에 얽매이는 것도 하나의 얽매임일까요? 과부와의 사랑을 통해 ‘나’는 드디어 욕망을 비워내라는 불교와 그것에 얽매이는 자발적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그리고 진정한 나를 맛보게 됩니다.
놀라운 자유의 순간입니다. 붓다 아래 갇혀있던 자신의 세계와 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금은 점점 균열하고 더 넓게 퍼지더니 결국 세계는 깨지고 맙니다. 그 틀에 서 있던 '나'는 그 틈에 신발을 빠뜨리고 허둥대다 끝내 세계의 붕괴와 함께 무너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붕괴일까요? 아니오, 그 틀이 깨지고 추락한 세계 속에선 진짜 자유가 나를 마중 나와 반겨줍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조르바의 대사 한 구절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로부터도 벗어나고, 돈으로부터도 벗어나고, 탈탈 먼지를 털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난 먼지를 털어냅니다. 그리고 가벼워집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유로워지고, 사람이 돼갑니다.”
그러나 과부와의 사랑 이후에 비극이 발생합니다. 과부를 쫓아다니던 마을 청년은 과부에게 거절당하고 시름에 빠져 절벽 아래 바다에 몸을 내던졌는데, 마을 사람들은 과부를 벼르다 못해 기어코 부활절에 과부를 잡아 목을 칩니다. 물론 ‘나’와 조르바는 그것을 필사코 막아보지만 세계의 대세는 일개 개인들이 거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조르바 일행의 무기력을 나타내고 세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허무를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나’와 조르바 일행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의 변화한 상태가 오히려 더 두드러지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이 가진 욕망을 달성하지 못해 삶을 포기하는, 결과적으로 삶에 잡아먹힌 나약한 청년과, 복수를 위해 낫을 들고 목을 그어버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 조르바와는 달리 욕망의 달성이 요원하니, 그 욕망을 거세하려는 일종의 허무주의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욕망의 화신 조르바를 몸소 따르기 시작한 ‘나’와의 관계에서 대비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인지라 과부가 죽은 이후에 시름에 잠기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원망하며, 운명을 탓하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조르바는 자신을 억누르는 운명에 침 퉤 뱉고 절대 자기를 함락시킬 수 없으리라 저항하리라 자신의 인생은 그것의 반복이었음을 천명합니다. ‘나’도 동조하죠. 그들은 훌훌 털고 일어섭니다. 또 다시 해변가에서 미친놈들마냥 산투리를 키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죠. 그들은 그렇게 과부의 죽음 속에 부활합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고작 몇 시간 함께 했을 뿐인데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추며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조르바다ㅡ
나는 무적이다ㅡ
(대충 조르바콘)
이게 바로 국가에서도 잡아들이지 못할 합법적으로 허용된 마약 이른바 조르바 뽕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는 순간 삶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맛봅니다. 하지만 어쨌든 갈탄광 사업과 목재운반 사업이 시원하게 망하고(이와 관련하여 기독교를 맥이는 것도 중요한 테마 중 하나긴 하지만 논외로 하겠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다시 책의 세계로 홀연히 떠나버리고 말 듯 이 책을 읽고 느끼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진한 사랑도 영원하진 못할 겁니다.
이내 곧 현실의 무거움 앞에 삶에 대한 사랑 따윈 눈 녹듯 사라지고 말거란 말이요, 아시겠슈 독갤 대장? 하지만 이런 감정이 영원히 사라질까요? 저는 내면에 일종의 산이 있다는 가정을 하곤 하는데요, 책을 읽으면 마음에 눈이 내리고 산에 쌓입니다. 우리는 아마 이 산을 잘 되돌아보지 않겠지만 그 눈은 녹지 않고 쌓이고 쌓여있습니다. 다만 익숙한 나머지 눈에 띄지 않을 뿐이죠.
이 만년설처럼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감정, 그리고 곧 사라져버린 이 감정은 눈에 띄진 않지만 내 몸 어딘가를 부유하며 떠다니고 있을 겁니다. 언제 날아오를지 모르는 풍선처럼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릴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풍선이 무슨 계기로 솟아올라 하늘로 날아가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 줄을 꽉 잡아.
과연 그때 우리는 그 풍선 배꼽에 매달린 가느다란 줄을 꼭 잡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때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까요? 조르바가 일러주는 조언은 그 순간 그 줄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줄을 잡고 나서야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우리 인생의 자유도, 삶을 향한 사랑도 해방되어 만천하에 드러날 겁니다. 그게 진짜 삶의 자유이자 사랑입니다. 모든 자유와 사랑은 내가 가진 모든 틀들을 깨부수고 삶을 향할 때라야 비로소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오?”
“보쇼, 자유인이란 거요.”
잘 읽었어요. 내일 오는데 기대되네요